[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편] ‘태권도, 나의 길’(7부)

  

송덕기 선생과의 만남


박철희 사범과 송덕기 옹이 경회루 앞에서의 시연 모습


송덕기(宋德基 1893~1987) 선생은 1958년 또는 1959년 경에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全國武術個人選手權大會)’에 시연자로 오게 되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1958년 이승만 전(前)대통령이 태권도 시범을 본 후 ‘택견’이라는 말을 언급한 이후, 경무대 경호원이 송덕기 선생을 개인적으로 알아서 시연자로 모시고 온 것이었죠. 당시 60대이셨던 송덕기 선생은 움직임을 볼 때 명인이셨다. 송 선생님은 이후 경무대 상무관에 거의 매일 놀러오셨던 관계로 만남이 지속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무예에 대해 조사하기를 좋아했던 나는 어디에 뭐가 있다고 하면 찾아다니곤 했습니다. 이리(지금의 전북 익산)역 앞에 택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분은 장심 단련을 위해 나무에다 새끼를 감아놓고 그 것을 밟고 지나가는 훈련을 많이 했으며, 서울 답십리에도 80이 넘으신 정노인이라는 택견을 잘하는 분도 계셨다. 이분은 내가 찾아뵈었을 때는 너무 연세가 들어, 움직임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송덕기 선생을 뵙기 전에 이미 택견에 대해 알고 있긴 했죠.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 때 출전하게 된 한국 대표팀이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장에 전시할 것으로 태권도가 채택되면서, 그 옛 모습으로 ‘택견’도 같이 전시할 수 있게 되면서 본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문교부 체육과’가 이 일을 주관했는데, 경복궁 경회루에서 택견동작을 3~4시간에 걸쳐 사진 촬영했습니다. 당시 경복궁은 일반인들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문교부 체육과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송덕기 선생은 두발당상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문교부에 필름을 줄 것을 요청했는데, 없어졌다는 회신만 돌아왔습니다. 이 사진들은 40년 후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저한테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미군 해군대령이자, 태권도를 수련했던 나종남 씨가 ‘사범님이 가지고 계셔야 될 거’라면서 되돌려 준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그 사진을 입수해 보관하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송 선생을 뵌 후 택견을 보존하기 위해서 가칭 ‘사단법인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을 설립하려고 문교부 체육과에 제출했습니다. 하루는 문교부의 사무관이 와서 ‘선생님 위에다 말 좀 해주세요. 유사단체에서 반대가 들어왔어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그랬더니, 더이상 일이 진행되지 못하고 법인문제가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을 때도 체육과에 아는 사람이 있어 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4․19, 5․16 등의 사건이 발생했고 내가 미국에 가게 되면서 송덕기 선생님과의 인연도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송덕기 선생님은 경무대와 선생 댁이 가까워서 시간이 나시면 자주 방문하셨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내가 택견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던 탓에 그랬는지 송덕기 선생님은 저를 무척이나 신뢰했습니다. 송 선생님은 그 때 황학정에서 활을 쏘러 다니곤 했습니다. 법인 문제로 문교부 학예국장을 만났을 때는 ‘박철희 사범에게만 택견을 가르친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송덕기 선생의 말에 의하면, 지금의 을지로에 위치한 국립의료원이 위치한 곳은 구한말 훈련원이 있던 자리인데, 모래밭에서 택견시합을 했다고 합니다. 시합을 결련이라고 하였는데, 강조한 것이 손이 땅에 닿으면 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합에서 가장 중요한 택견 기술은 발바닥으로 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손은 주먹을 사용해 치는 게 아니라 손바닥으로 공격을 하는 거라고 말씀을 하셨죠. 그리고 아랫대와 윗대는 누상동과 누하동을 일컫는 말로 누상동이 웃대, 누하동이 아랫대라 했습니다.

태수도협회


박철희 사범의 수련 모습


1960년 5월 16일 이후 문교 위원회에서 유사단체 통합에 관한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문교위원회에서(문교 위원: 홍종철) 소집책임자로 9명을 지정했습니다. 한국체육관 관장사무실에서 모여 통합에 대해 논의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황기, 노병직, 엄운규, 현종명, 남태희, 고재천, 이남석, 이교윤 등이 있었습니다.

통합회의를 여러 차례 했는데 수박도의 황기 선생과 공수도 지도관의 윤쾌병 선생이 적극적으로 참여 하지 않았죠. 당시 한국체육관 건너편에 있던 동남빌딩의 지하실에 있던 동남다방에 문교위원회 김용채씨하고 문교위원 보좌관 이효석 씨가 저를 찾는다고 해서 나갔습니다. 통합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러 온 것이었습니다. 진행에 대해선 ‘우리끼리 알아서 결정 할테니 상관하지 말라’고 해서 돌려보냈습니다.

통합이 지지부진 한 가운데, 통합의 효율을 높이고자 9명 중에서 적은 인원으로 실무자를 줄이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엄운규, 이종우 씨가 그 일을 맡게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와 엄운규, 이종우 씨와 여러 번 만나게 되었죠. 이 두 분도 “박 사범에게 일임할테니 윤쾌병 선생하고 황기 선생을 가입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건을 걸었습니다.

“종신심사위원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자, 두 사람이 ‘그건 박 사범이 알아서 하라’고 했고 그래서 그 일을 도맡게 되었습니다.

윤쾌병 선생이 재직하고 있는 건국대와 황기 선생이 있는 무덕관을 10여 차례 이상 왔다갔다하면서 협회에 가입하시기를 부탁드렸습니다. 윤쾌병 선생은 ‘황기 선생이 좋다고 하면 당신도 좋다’고 하셨죠. 황기 선생을 유도회 회관 들어가는 데 있는 수양다방이라는 곳에서 뵙고 ‘모든 것을 맡기고 젊은 관장들은 그만둘테니 원로들이 하시라’고 했습니다. 황기 선생은 ‘태권도라는 이름은 좋은데, 최홍희가 회장이 되는 것은 좋지 않아’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만났을 때는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나는 두 분에게 ‘최고 심사위원이 되시라’고 하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시 종신 최고 심사위원으로 두 분을 아무런 조건 없이 모시겠다고 한 것이었죠. 이 부분에 대해 태권도 역사를 다룬 글들에서 종신제 최고 심사위원을 윤쾌병, 황기 선생이 요구한 걸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대우해드린다고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물론 이전 협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관여한 ‘태수도협회(跆手道協會)’ 때는 내가 먼저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말씀을 드렸지만 계속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셔서 힘이 들었습니다.

두 분을 만날 때마다 엄운규 씨와 이종우 씨에게 종로 영풍빌딩 자리에 있던 건물의 2층 명 다방에서 진행 상황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분들과의 일이 원만히 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엄운규, 이종우 씨가 ‘안 되겠다. 우리끼리라도 해야겠다’고 해서 협회를 구성하게 된 것입니다.

소집인들을 모아서 명칭을 무엇으로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말들이 오갔는데, 태권도를 싫어하는 자도 있고, 공수도라고도 할 수 없어서, 결국은 발을 뜻하는 ‘태(跆)’자하고 손기술을 뜻하는 ‘수(手)’자를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대한태수도협회’가 발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 후 대한 체육회에 산하단체로 가맹을 했습니다. 대한체육회에 가맹을 하면 전국대회 등에 참여할 수 있어서 태권도 보급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입니다.

태수도협회 이후에는 개인적인 일로 1971년 미국에 건너가면서, 국내 협회 일에서는 손을 떼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이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편집 =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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