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훈 태권도장(목동) 수련생김재훈 태권도장 50주년 축하합니다성인이 되어서 태권도를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느덧 성인 태권도 3년차에 접어든 태권도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는 목동 관원생입니다. 김성훈 관장님을 비롯하여 이지영 사범님, 이희진 사범님, 조민성 사범님까지 모두 훌륭한 인품과 교육관으로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의 태권도 실력 향상을 위해 교육하시는 모습은 늘 존경스럽습니다. 매번 작은 부분까지 수정해주시고, 안 되는 부분을 반복해서 잡아주시고 원리와 그 쓰임을 알려주시니, 그 동작은 더 나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나아지고 고쳐지면 또 다른 동작이 완벽해지도록 지도해주시는 모습에서 끊임없이 샘 솟는 에너지와 열정이 느껴집니다. 또한 진정한 교육자, 지도자, 수련가의 모습을 한결같이 보여주시는 관장님과 사범님 모습에 저도 그런 모습을 갖춘 수련가가 되고 싶다고도 늘 생각합니다. 지난 4월 김재훈총관장님께서 목동지관을 방문하셔서 아이들, 성인들, 지도진들을 세심하게 지도해주셨습니다. 관장님께서 항상 스승님이라고 지칭하며 존경심을 드러내던 총관장님! 태권도 동작을 지켜보시고 세세한 부분을 차분하게 지도해주는 모습에서 관장님과 사범님들의 지도 스타일이 오버랩되었습니다.사명감을 가지고 미국 보스턴에 태권도장을 여시고, 지금까지도 지도하는 것이 즐겁다고 말씀하시던 총관장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태권도장으로 수련하러 갈 때마다 관장님과 사범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 이렇게 성인이 되어서도 태권도를 배울 수 있는 도장이 동네에 있음을, 제대로 잘 배울수 있도록 지도해주시는 능력있고 친절한 지도진이 있음을, 이런 지도진을 지도해주시는 분이 김재훈 총관장님임을 감사하게 됩니다. 김재훈 태권도 화이팅!!! 감사합니다!
07-22
50주년 축하드립니다!배우면 배울수록 재밌고 매력이 많은 태권도입니다.덕분에 창헌류도 배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나이들어서까지도 꾸준히 오래 수련하고 싶은 수련생입니다. 성인들에게 태권도 수업을 여는 곳이 거의 없는데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고 더 많은 지점이 생겨 널리널리 알려지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목동 지점도 응원해요. 감사합니다.!
태권도를 전세계에 알려주신 김재훈 총관장님! 너무 존경하고 본보기가 됩니다. 태권도를 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총관장님뜻을 이어받아 후대에도 강한 태권도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07-20
김재훈 태권도장의 50주년을 축하드립니다!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태권도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태권도의 원형인 창헌류를 전하고, 세계로 나아가서 태권도의 역사와 정통성을 보존해주시고 알려주신 김재훈 총관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앞으로도 김재훈 태권도장이 창헌류의 가치를 널리 알리고, 태권도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를 기원합니다.새로운 50년을 향해 나아가는 김재훈 태권도장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과 영광이 함께하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07-20
김재훈 태권도장 개관 50주년 축하합니다.
저는 일산 김재훈태권도장을 10년정도 다닌 성인 관원입니다
처음 갔을때는 성인이 되서 처음 태권도를 배운거라 잘 따라갈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관장님이 교육과정을 단계별로 체계적으로 잘 만들어 놓으셔서 너무 재밌게 잘 배우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성인 관원분들은 다들 원형 태권도의 품새를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실전에서 사용할수 있는 동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관장님과 사범님들이 성인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품새의 동작 하나하나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주셔서 더 이해가 쉽고 재밌는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더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서 나중에 할머니가 되서도 김재훈태권도장 도복입고 멋지고 우아하게 천지,단군,도산 등등 원형태권도의 품새 시연하고 싶네요.
07-20
유파의 형성 - 쇼토칸, 시토류, 고쥬류, 우에치류의힘 무도정신 오스
07-20
유파의 형성 - 쇼토칸, 시토류, 고쥬류, 우에치류,ㅌㄱ류 전세계의유파류형성
07-20
전통 카라테 유파의 형성 - 쇼토칸, 시토류, 고쥬류, 우에치류오키나와 카라테는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되고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19세기말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류쿠처분(1879)으로 류쿠가 오키나와(沖繩)현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영토로 편입되고 카라테는 지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공개된 장소에서의 교습이 가능해 졌고 근대식 교육제도가 도입됨으로서 학교체육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도테(唐手)가 학교체육화 됨으로서 교습의 스타일과 수련 방법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카라테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한 필살기가 아니게 되어 위험한 기술은 대폭 삭제되었고 고류 오키나와테의 특성이 소멸되어 간 것이다. 더불어 오키나와테의 명인들이 대거 일본 본도에 진출하여 카라테를 보급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극진으로 대표되는 지찐카라테(실전공수, 實戰空手) 이전의 카라테 유파, 그리고 고류(古流) 오키나와테와도 구분되는, 일본에서 보급되고 교습된 카라테를 일단 전통가라테라고 부르기로 한다. 전통 카라테라는 용어가 쓰이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그것이 공인된 용어인지는 필자는 잘 모른다. 일본의 전통카라테는 수백 가지 유파가 있으나 크게 세 그룹으로 구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토스류(사주류, 絲洲流), 고쥬류(강유류, 剛柔流), 우에치류(상지류, 上地流)가 그것이다. 다만 이토스류는 다시 쇼토칸(송도관, 松濤館)과 시도류(사동류, 絲東流)로 분류될 수 있지만 원형은 같다고 봐도 될 것이다. 각 유파별 특징과 형성 경위에 대해 알아보자. 1. 쇼토칸(송도관, 松濤館) 카라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송도(松濤) 후나고시 기찐(船越義珍, 1868-1957))이 창시하였다. 송도는 서예가로도 활동하였던 후나고시의 호이다. 그의 고향 나하의 해안에 소나무 숲이 유명하고 바람이 불면 소나무의 물결이 장관을 이루는 것에서 호를 소나무의 파도, 송도라 지어졌다고 자서전에 밝히고 있다. 어릴 적 아자토 야스쯔네(安里安恒, 1828-1906)로 부터 데를 전수 받았고 이후 또 다른 스승인 이토스 야스쯔네(絲洲安恒, 1831-1915)를 사사하게 된다. 아자토와 이토스는 마쓰무라 소콘 문하의 동문이고 계보 상으로 슈리테가 되지만 이토스는 따로 마쓰무라 고사쿠로부터 토마리테를 배운 바가 있으므로 후나고시에게 토마리테의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후나고시는 슈리, 나하, 토마리의 모든 테의 특징을 아우르지만 쇼토칸의 특징은 그래도 빠르고 경쾌한 슈리테를 특징으로 하며 후에 이것은 태권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타일이 된다. 그의 유년기는 몰락한 무사 집안의 가난하고 병약한 불우한 것이었다. 학교 졸업 후 공립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그 중에 자신의 도테(唐手)를 가르치게 된다. 마침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취하고 있던 일본 정부는 유도등 무술종목을 학교체육으로 도입하고 카라테도 오키나와의 학교에서 정식으로 가르쳐지게 된다. 시범단을 조직하여 오키나와 전역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행한 몇 번의 시범은 일본에서 온 관리의 눈에 인상적으로 보여 그는 일본 본토로 진출할 기회를 얻는다. 1917년 최초로 본토에서 시범을 보인 것이다. 이후 그는 카노 지고로(嘉納治五郞, 1860-1938)가 설립한 코도칸(강도관, 講道館) 유도장의 한편에 카라테 클래스를 만들어 지도하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상복 차림으로 수련하던 것을 유도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통일된 지금의 카라테 도복을 만들었고 띠의 색깔, 단(段)과 급(級)의 체계 역시 유도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였다. 혹자는 띠의 색깔을 말할 때 띠를 다른 색깔로 만드는 게 아니고 처음엔 백띠였던 것이 풀밭에서 오래 수련 하다 보니 처음엔 땀에 절어 누렇게 됐다가 풀물이 들어 퍼렇게 된 다음 피와 땀이 말라붙어 갈색이 되고 더욱 더 연륜이 쌓이면 검게 변한다고 하나 이는 터무니없는 지어낸 이야기다. (필자도 이걸 그대로 믿고 띠 색깔이 변하도록 일부러 빨지 않은 기억이 있다.) 혹은 띠 색깔이 일본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역시 근거 없는 얘기다. 벨트시스템은 수백년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우 80년 전인 1923년에 카노 지고로가 만든 것이며 후나고시가 이것을 모방했을 뿐이다. 어쨌든 후나고시에 의해 현재의 카라테 도장의 모습이 시작된 것은 사실이다. 후나고시가 일본에서 카라테를 가르치기 시작한 1920년대 일본에서 일본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오키나와적인 것을 숨기고 가장 일본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복에 유도적 분위기를 도입했으며 시합의 방법도 검도의 것을 도입했다. 쇼토칸에서 일격의 슨도메(寸止)로 승부를 결정짓는 시합 룰을 만든 것은 검도의 영향이라고 말해진다. 빈손검도인 셈이다. 카타의 이름도 일본화 시켰다. 쿠샹쿠는 간쿠(관공)로, 나이판치는 테키(철기)로, 세이션은 한게츠(반월)로, 완슈는 엠피(연비)로, 친토는 간가쿠(암학)로 새로운 이름을 창안하여 붙였다. 더불어 오키나와 말로 된 명칭을 비슷한 일본어 발음의 한자어로 표기하였다. 피난을 헤이안으로 읽고 평안(平安)으로 표기한 것처럼. 이후 후나고시 스타일은 빠르게 일본화 되어 갔다. 1922년에 문부성 주최 고무도 박람회에도 참가하였고 1924년 최초로 게이오(慶應)대학에 당수부를 만들고 이어 그 경쟁 대학인 와세다(早稻田)대학 등으로 대학 당수부를 조직해 나갔다. 1934년 드디어 자기의 호를 따서 쇼토칸을 창립한다. 쇼토칸이 일본 본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로 자리 잡게 된 배경에는 당시 지식계급인 대학생들에게 이를 가르친 것과 관련이 있으며 특히 한국의 유학생들이 이를 배움으로서 태권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쇼토칸 스타일은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일본 전통 카라테이지만 동시에 오키나와테의 특징이 많이 상실된 점도 있다. 참고로 카라테가 공수(空手)로 한자 표기가 통일된 것은1936년의 일이다. 최초로 카라테를 공수로 표기한 것은 후나고시의 동문인 하나기 쵸모(花城長茂, 1869-1945)인데 1906년의 일이다. 이후 당수가 많이 쓰이고 간간히 공수라는 말도 쓰였지만 일본이 군국주의로 감에 따라 적국인 중국을 연상시키는 말 대신 공수로 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하나기와 강유류의 창시자인 미야기 쵸준 등이 공수로 통일한 것이다. 唐手든 空手든 발음은 가라테이다. 공수의 공(空)자로 무슨 불교와의 연관성을 찾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무근이다. 기술적인 부분은 복건성의 남소림사(소림사는 청조 초기에 만주족 정권의 공격을 받아 하남성 등정시의 북소림과 복건성의 남소림 두 곳으로 나뉘게 된다)의 영향을 받았지만 불교와 공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토스 역시 카라테는 불교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제자인 후나고시가 1956년에 저술한 자서전 공수도일로(空手道一路, karatedo : my way of life)에 보면 공(空)의 개념을 불교와 연관시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수란 empty hand 로서 반야심경의 색즉시공과 일맥상통한다고. . . 상당한 인텔리였던 후나고시까지도 죽기 한 해 전 88세 때에 발표한 자서전에서 그렇게 썼고 또 그렇게 알고 죽었을 것이다. 근거 없는 신비주의는 이처럼 도취적이다. 2. 시토류(사동류, 絲東流) 시토류는 마부니 겐와(摩文仁賢和, 1889-1952)가 창시하였다. 슈리의 무사집안 출신으로 13세 되는 1902년부터 이토스 야스쯔네 문하에서 슈리테, 토마리테를 배우고 친구인 미야기 쵸준의 권유로 1909년부터 히가오나 간료에게서 나하테를 배웠다. 비슷한 시기에 스승 히가오나의 스승인 아라가키 세이쇼로부터 오키나와 고부도(古武道-창, 봉, 흔히 쌍절곤이라고 하는 눈차쿠등이 있다)를 직접 배웠다. 이토스 도장의 2대 사범을 역임하였다. 고교 졸업, 군 제대 후 경찰에 투신하여 1918년 경 후나고시, 미야기 쵸준등과 당수연구회를 발족시켜 카라테를 연구, 보급하며 구니왕자. 가토왕자가 오키나와를 방문했을 때 시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이름자 즉 이토스(사주, 絲洲)의 사(絲)자와 히가오나(동은납, 東恩納)의 동(東)자를 한 자 씩 따고 이를 그대로 음독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시토류(사동류, 絲東流)라고 이름 지었다. 하지만 사동류는 류파의 이름이고 단체의 명칭은 여전히 이토스카이(사주회, 絲洲會)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니혼 카라테도 이토스카이 (日本空手道 絲洲會)이며 카라테 역사에서 이토스의 비중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시토류는 쇼토칸과 더불어 이토스류로 통칭되고 있지만 일본화 되어버린 쇼토칸에 비해서 오키나와데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3. 고쥬류(강유류, 剛柔流) 고쥬류와 후술(後術)하는 우에치류는 앞서 말한 쇼토칸이나 시도류와는 형성 경위와 기술적 특성이 많이 다르다. 그것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중국 남파 권법의 영향이다. 이 두 유파의 창시자들은 본인이 직접 중국에 가서 중국 남권을 배웠고 오키나와테로 변하기 전의 중국 권법을 직접 체득 한 것이다. 고쥬류는 미야기 쵸준(宮城長順, 1888-1953)에 의해 창시되었다. 오키나와의 관료계급 출신의 숙부에게 입양되어 부유한 환경에서 테(手) 수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특히 그 숙부는 상선을 가지고 중국과 무역에 종사하여 그는 중국을 왕래하는데 비교적 자유로웠을 것이다. 14세 되던 1902년 당시 나하테의 명인이던 히가오나 문하에 들어가 나하테를 수련하고 발군의 실력을 보여 히가오나의 우찌데시(內弟子)가 된다. 1905년 중국 복건성을 방문하여 남파권법을 배우고 이후 두 차례 더 중국을 방문하여 약 3년간 체류한다. 중국에서 돌아와 고향 나하의 지방 경찰국의 무술사범을 역임하였고 나하 상업고등학교에서도 가르쳤다. 한때 이토스를 찾아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이토스는 그가 이미 나하테를 마스터 했다고 생각하여 제자로 거두는 것을 거절하고 대신 몇 가지 시연을 해 보이고 이론적 부분에 조언하는 것으로 그친다. 그가 1940년에 창안한 겍사이 카타가 이토스의 슈리테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일본 본토에 자주 여행하며 카라테 보급에 진력하여 교토대학과 간사이 대학에서 당수부를 만들어 가르치고 제자들을 배출한다. 1933년 카라테로는 최초로 일본 부도쿠카이(무덕회, 武德會)에 가입한다. 고쥬류는 그 명칭부터 다분히 중국에서 출발한다. 1930년 일본본토에서 당수를 보급하고 있던, 그의 수제자가 다른 유파로 부터 그 스타일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하고 이 사실을 스승에게 보고한다. 테, 나하테, 또는 도테(唐手)는 유파의 명칭이라기엔 좀 곤란했던 것 같다. 제자의 보고를 받고 미야기 초준은 며칠 고심 끝에 자기 스타일을 고쥬류(강유류, 剛柔流)라 명명한다. 강유(剛柔)는 모원의(茅元儀)가 쓴 무비지(武備志)의 권법편에 나오는 요결의 한 구절이다. 인심동천지(人心同天地) - 사람의 마음은 천지와 같고 혈맥사일월(血脈似日月) - 혈맥은 일월처럼 순환된다. * 법강유탄토(法剛柔呑吐) - 호흡은 강하고 유하게 삼키고 뱉어야 하며 신수시응변(身隨時應變) - 운신은 시간과 기회에 변화무쌍하고 (후략). . *참고로 무비지는 모원의가 1621년에 편찬한 19책 240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군사 서적으로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표준이 된 책이다. 이처럼 강유류는 무겁고 느리며 호흡을 강조하는 중국 남파권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강유류는 카타를 수련할 때 소리 내어 호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산찐(三戰, 삼전)을 강조하는 것 역시 남권의 영향으로 보인다. 미야기 쵸준의 제자 중 한국인 소네이쥬(조형주, 1907-?)가 있었고 그와 함께 최영의가 강유류를 수련하게 되는 것이다. 4. 우에치류(상지류, 上地流) 우에치류는 우에치 간분(上地完英, 1877-1948)에 의해 창시되었다. 그는 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로 19세 때 중국 복건성으로 건너가 13년 간 체류함으로써 청년기를 중국에서 보내는 것이다. 어릴 때는 특별한 스승이 없이 몰락한 무사 집안으로 농사를 짓고 살던 그의 부친 우에치 간도쿠로부터 도테와 오키나와 고부도(古武道)를 고루 수련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를 오키나와데의 계보와 연결시키기가 좀 애매하다. 중국에 건너간 그는 쓰시와(1874-1926, 추치우,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라는 중국인의 도장에서 수련한다. 쓰시와는 강력한 남소림권과 부드러운 아이션켄(?)이라는 스타일을 합쳐 판가이온 (半剛穩 쯤으로 써지는지 모르지만 반은 강하고 반은 부드럽다는 뜻)이라는 스타일을 만들어 도장 겸 약국을 개설하여 가르치던 인물이었다. 우에치 간분은 특히 산찐(삼전, 三戰)을 강조하여 첫 3년간 오직 산찐형만 연습했다고 하며 후에도 자주 "삼전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하곤 했다. 중국에서 체류한 13년간 그는 산찐, 세이션, 산세이류의 단 세 가지 형만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콩깍지를 단지에 담아 관수단련을 하여 동료 제자들이 신기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무술 수업과 의학을 함께 공부했다. 1904년 27세 때 쓰시와의 조수가 되고 1907년에 남경에서 자기 도장을 개설한다. 1910년 도장 문을 닫고 오키나와로 돌아오지만 그는 무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시 오키나와는 경제난이 심각해져 그는 직장을 얻기 위해 47세가 되던 1924년 일본 본토로 건너간다. 관서지방의 한 섬유공장 노동자로 취업을 하고 1925년이 되어서야 자기의 도장을 개설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돌아온 지 15년 만의 일이며 판가이온이라는 중국권법이 우에치류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우에치류는 가장 중국적인 카라테라 할 수 있으며 그의 아들인 우에치 가네이가 이를 이어받아 일본 전역으로 보급시킨다. 출처: https://ajurnak.tistory.com/entry/가라데의-기원 [蓮花中君子者也]
07-20
태권도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태권도는가라테를 변형, 발전시켜 대박난 현대무술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탄생, 이전 여러이름 난립태권도 최홍희, 태권도 태 발을 의미하고 태껸과 연결태권도 국기로 확립 이론화 체계화 이후 세계화 박차태권도 : 한국 무도인이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세계적인 무술이 되었다>1.가라테를 변형, 발전시켜 대박난 현대무술태권도(跆拳道)는 한국 고유의 전통무술이나 민속놀이인 태껸을 계승한 것이 아니다.태권도는 일본 가라테(からて, 空手道)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이를 변형, 발전시켜 1950년대 창시된 현대무술이다.가라테는 고대 인도에서 발생하여 중국 당(唐)나라 ㅡ 류큐[琉球: 현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 1920년대부터 일본에서 활성화되었다고 말하기도한다.하지만 이미여러유파중에 한곳일뿐다양한 유파 류가 활동하고있었다류큐에서는 중국 당나라에서 전래되었다고 당수(唐手)라고 불렸는데, 일본에서 공수(空手)로 바꾸었다. 일본발음으로 둘다 가라테다.일제 때 일본은 아시아 최고의 선진국이었다. 무술 수련과 교육 체계 역시 일본이 가장 선진적으로 정비되어 있었다.우리 선배 세대가 그걸 배웠고, 해방 이후 수많은 무도인이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태권도라는세계적인 무술로 성장시킨 것이다.2.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탄생1950년대 후반 우리 무도계에는 당수도, 공수도, 권법, 화수도, 수박도, 태권도라는 명칭들이 난립해 있었다.그러나 모두 수박이나 태껸과는 무관했고, 가라테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태권도라는 명칭은 1954년, 당시 29사단 사단장 최홍희와 그의 부하 남태희가 만들었다.그해 9월 강원도 속초에서 1군단 창설 4주년 기념식이 있었다.그때 29사단의 가라테 시범이 있었는데, 행사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최홍희에게 "저게 바로 예로부터 전해오는 태껸이구먼. 앞으로 전 군에 보급시켜봐!"라고 말했다.이에 최홍희와 남태희는 일본의 가라테를 지칭하던 공수도, 당수도를 버리고 옥편을 찾아가며 ‘태껸’과 비슷하게 들리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들어낸 것이다.최홍희가 태권도라는 단어를 만든 후 무도인들은 가라테와 구분되는 고유의 색채를 입히고자 부단히 노력하였다.참고로 최홍희는 일제 때 도쿄 중앙대학에 다니면서 가라테부에 있었고, ‘가라테의 아버지’로 알려진 후나코시 기친(船越義珍)의 쇼토칸(松濤館)에서 정식으로 가라테를 배웠다.그의 부하 남태희는 해방 이후 ‘당수도 청도관(靑濤館)’에서 무술을 수련했다. 당수도, 즉 가라테를 가르치는 도장이었다.3. 태권도 명칭 작명 관련첫번째 글자인 태(跆)와 관련하여 최홍희는 태권도의 '태'자는 발을 의미하며 태껸과 연관짓기 위해 "밟을 태(跆)"를 붙였다고 한다.태권도는 높이 도약하는 자세가 많은데 도약을 하려면 바닥을 강하고 빠르게 밟아야 한다.그리고 두번째 글자는 '권(拳)'자로 가라테를 음독한 공수도 또는 당수도에서 사용되는 손 '수(手)'자를 고려했다가 그와 비슷한 의미인 주먹 '권(拳)'이 채택하였다고 한다.세번째 글자인 도(道)는 태권도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현대 창작 무술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데, 무예에 도(道)를 붙이는 건 일본식 조어로 전통적인 한국식 명명법이 아니다.4.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국기(國技)로 인정1959년, 현역 장성이었던 최홍희가 그 위세를 배경으로 자신이 만들어 낸 태권도라는 명칭을 밀어붙이며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했다.이후 1961년에 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로 명칭이 변경되기도 했다.태수도는 '태'권도와 공'수'도·당'수'도를 절충하여 새로 만든 명칭이었다.1965년 8월에 협회의 이름을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꾸었다.1966년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창립된다. 총재는 최홍희였다.당시 태권도는 국내에서도 겨우 자리를 잡아가던 상황이라 ITF는 창립 당시에는 9개국밖에 안될 정도였다.1971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기(國技)로 인정받았다.1972년 11월 30일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이 설립되었는데, 1973년 2월 6일 '국기원'으로 개명되었다.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훗날 WT)이 출범되고 김운용이 초대 회장이 되었다.5.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1960년대 후반 대한태권도협회는 무술로서 태권도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품새 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이에 품새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태극품새 8개, 유단자품새 9개를 만들었다. 품새는 카라테의 가타가 원류지만 차별화 노력의 결과 독창성을 갖게 되었다.1971년에는 태권도의 이론화, 체계화를 위해 노력했던 이종우의 주도로 "태권도교본(품새편)"이 발간되었다.6. 태권도의 세계화1971년 1월에는 외교관 출신으로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행정인사 김운용을 태권도계로 끌여들여 그를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으로 추대했다.그는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WTF, 훗날 WT) 초대회장도 겸하면서국제감각과 본인의 외교력을 발휘해 태권도를 성장시키는데 많은 공헌을 한다.태권도는 1980년 8월 태권도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이후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정식종목이 되었고,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올림픽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정식종목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자유기고가글-펌 참고ㅎㅏㅅㅏ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