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박철희 편] '태권도 나의 길'(6부)

  


박철희 사범 수련 모습

‘파사권법’을 탈고하고 얼마 뒤 조선연무관 창설자이신 이경석(李景錫) 선생이 추천을 해서 경무대에 ‘태권술부(跆拳術部)’ 무도 사범으로 들어갔습니다. 경무대에서도 윤 선생님의 권법을 중심으로 해서 가르쳤죠. 당시 경무대에는 태권도 외에도 유도와 검도 등을 가르쳤는데, 유도는 이원영 선생이, 검도는 김종달 선생님께서 지도했습니다.

당시 경무대 행사 중의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 생일(3월 26일)을 기념해 열리는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全國武術個人選手權大會)’였습니다. 제가 1958년,59년,60년 무도대회를 주관했습니다. 태권도 및 유도,검도,궁도 등을 시연했습니다. 당시 경찰관들이 시연을 많이 하고 경무대 경찰서에서 주관을 해서 경찰무도대회라고 인식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당시 경무대 사범이던 저는 모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시범을 지도했습니다. YMCA권법부 소속의 홍정표, 나종남, 최익진, 김병수, 서영익, 박세혁, 정화, 조기정 등이 참여했는데, 저는 홍정표씨와 장권(長拳)형 및 대련을 시연했습니다.

1959년 시연 때는 오도관(吾道館)의 최홍희 씨와 남태희 씨가 와서 전국무도대회에서 시연을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해 왔고, 그래서 시연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경호실 남태우 서장이 나를 보자고 해서 갔더니 마침 남태희 관장하고 최홍희 소장이 와 있었습니다. 저는 다방에서 시연을 하나만 해달라고 했습니다. 충무형이 좋겠다고 해서 그 형을 시연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최홍희 씨가 당신이 일본에서 현해탄을 건너올 때에 윤병인 선생하고 같이 오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제게 말을 했습니다. 자신과 윤 선생님이 가깝다는 것을 나에게 환기시키려고 하는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일 날 충무형 시연이 끝나고 한 사람이 오더니(최홍희 씨는 내빈석에 앉아 있었다), ‘형을 하나 더 시연할 수 없느냐’고 해서 다시 요구했습니다. 월남(베트남)에 태권도 선수단이 갔다 와서 인사를 여쭙는 거라는 설명을 하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경무대에 있던 1959년 11월 3일에는 광주학생운동 30주년을 기념해 「전국학생태권도특별연무대회(全國學生택권道特別演武大會)」를 사비를 들여 시공관(市公館)에서 개최했습니다. 광주 학생운동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하게 된 것이죠. 당시 주최는 강덕원에서 맡았고, 주관은 「전국학생태권도연합회」에서 했습니다. 경무대에는 1960년 4.19 의거가 일어난 후 경무대가 편제상 없어지면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무도원에서 강덕원으로


광주학생운동 30주년 기념 연무대회 포스터

경무대에 있을 때 최홍희 씨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엄운규,현종명 씨 등도 있었습니다. 최홍희 씨가 2군 부사령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을 때였죠. 제가 최홍희 씨에게 무예 명칭을 무도대회에 사용할 때 ‘택견’으로 하자고 건의를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택견이라고 하시니까, 태권도라는 것을 접어 두자’라고 말을 하면서, 나중에 태권도라는 명칭이 되도록 돕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최홍희 씨는 기차 시간 5분 전까지 생각하더니 ‘안되겠는데, 태권도로 해야지’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대한 후인, 1956년 아마 '파사권법' 책을 탈고하던 즈음에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 씨가 제게 와서 개인적으로 도장을 열고자 하는데 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마침 저의 집 근처에 빈 건물이 있어서 거기서 하시라고 했습니다. ‘명칭은 어떤 걸로 할까요’라고 하니, 한 번 나보고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무도원’과 ‘강덕원’ 두 가지를 추천했더니, 무도원이 좋다고 해서 시작한 것입니다. 무도원은 ‘무도원택견권법도장’을 편의상 줄여 부른 말입니다.

무도원 사범은 홍정표 씨가 맡았습니다. 당시 관장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홍정표 씨가 3개월 내지 4개월 정도 운영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보고 맡아달라고 해서 사범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강덕원(講德院)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게 되었죠.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익힐 강(講)’에 ‘덕 덕(德)’ 자를 선택, 공정하고 포용성 있는 마음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했습니다. 원(院)이란 표현은 일본식의 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마음에 '파사권법' 책을 탈고하던 해인사의 경학원(經學院)에서 따왔습니다.

1956년에는 ‘대한 학생 택견권법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기도 했는데, 클럽활동으로 1주일에 한번인가 두 번 씩 대학에서 가르치던 연세대와 외국어대 학생들을 중심으로 간판까지 만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세계 태권도연맹사무총장 역임)과 그후 대한 태권도 협회 5대 회장을 역임하고 태권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해 정화(세계 태권도연맹 집행위원), 김정후(강원대학 법정대학 학장 역임), 이강희(멤피스 사범-앨비스 프레슬리 지도), 한정일(건국대학교 교수), 김병수(미국 휴스턴 태권도 사범), 지승원(한동대학 법학과 교수), 임복진(전 국회의원) 등이 있었습니다.

강덕원은 그후 창신동, 청진동, 서대문, 서울운동장 등으로 도장을 옮기다가 이금홍 씨가 3대 관장으로 부임하면서 인사동으로 이전 정착했습니다. 현재 ‘강덕원 무도회(강무회)’로 계승되고 있으나 저는 관여하지 않고 있습니다.

[편집 = 정대길 기자 / press02@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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