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12술 보유자, 검객 아무개 이야기

  

유한준 기록에 임진왜란 1592~1598년 사이의 실존 인물


유한준 초상화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은 조선 후기 학자로 자는 만천(曼倩) 또는 여성(汝成)이고, 호는 저암(著庵) 또는 창애(蒼厓)이다. 남유용(南有容)의 문인으로 영조 44년(1768) 진사시에 합격하고 김포군수․형조참의 등을 지냈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송시열(宋時烈)을 추앙하여 송자대전(宋子大全)을 늘 곁에 두고 지냈다고 한다. 그림에도 능했으나 전하는 작품은 없다. 유한준의 글을 모은 자저(自著)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 잡저(雜著)조에는 「검객기문(劒客記聞)」 또는 「검객모사(劍客某事)」라는 제목으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조선시대 검객에 관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유한준은 이 검객 이야기를 병자년에 기록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살았을 시기의 병자년은 영조 32년(1756)이다.

그 내용을 보자.

검객 아무개는 호서와 영남 사이에 사는 사람이다. 그 선조가 그 무슨 성인지 자세하지 않다. 사람들이 성과 이름을 물었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뒷날 검술로 명성이 있었기 때문에 ‘검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찍이 재물(모으는 것)을 추구하였는데, 호서와 영남 사이를 들고나고 하다가 어떤 사람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하지만 그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몰랐다. 때마침 현령이 그 일의 죄과를 살피다가 검객의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잡아죽였다. 검객이 비록 하늘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는 있었으나, 그 집안은 이미 몰락하고 말았다.

(검객은) 사방으로 떠돌아 다녔는데, 사람됨이 격검을 좋아했다. 검술 배우기를 3년 동안 하자 능통하게 되었는데, 밤에 달이 밝으면 홀로 검을 휴대하고 깊은 산 외진 계곡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 검을 익히고 돌아오는 것을 변함없이 하였다. (깊은 산골짜기에 들어가 수련을 한 까닭에)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平秀吉]가 병사를 크게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선에서는 군막에 검사를 불러, 정예하고 용감한 검사 9인을 뽑아 전쟁터에 나가게 했다. 검객 또한 뽑힌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옷차림을 하고 (전쟁터에) 9인이 보내졌다. 9인은 검술로써 모두 한 사람으로 백을 당해낼 정도여서 천하에 적이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이 검사들로 전투를 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검사를 출전하게 하여 서로 대응하게 했다. 왜 검사는 그 검술에 초립(草笠)을 사용하였다. 초립을 사용하는 법은 검법이지만 별법(別法)이기도 하다. (9인의 검사가 왜검사와) 더불어 싸움을 벌였는데 (왜검사는) 번번이 초립을 움직여서 8검사의 머리를 순서대로 잘랐다. 다음은 검객에게 미쳤는데, 검객은 왜검사가 천하의 이인(異人)으로 당적할 수 없음을 생각하였지만, 이미 싸움은 벌어졌다. (검객은) 몸을 떨쳐 곧바로 뛰어올라 공중으로부터 (검을) 내려 베었다. 왜검사가 이제 응대하려고 할 때 문득 (왜검사의 초립) 끈이 끊어지면서, 왜검사의 눈은 (가려져서) 볼 수 없게 되었고 손에서 칼을 꺼내지도 못했다.

(검객의) 검이 이미 (왜검사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검객은 “그 (끈이) 해져 끊어진 틈을 타지 않았다면 저 왜검사는 내 검에 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검객은) 매번 전투하는 날 저녁이면 제단을 설치하고 검사에게 제사지냈다. 술 9잔을 늘어놓았는데, 좌우에 8잔, 중앙에 1잔이었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물어보니, (검객은) “여덟 검사는 내 친구이고 왜검사는 나의 스승이다”라고 말하였다. 후에 몸을 재상에게 의탁하였는데, 항상 총애를 받았다. 하루는 재상이 부(府) 중에 앉아서 사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늙은 승려가 곧바로 들어오더니 계단을 올라와서 재상을 찔러 죽이려고 하였다. 좌우가 크게 소란스러웠는데, 검객이 서서 보다가 크게 소리를 지르고 가슴에 품고 있던 검을 꺼내 쳐죽였다. (늙은 승려는) 옛날 원수 집안의 아들이었다.


검객모전

(검객이) 재상에게 “10일 뒤에 또 한 승려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뒤에 과연 왔는데, 검객을 불러 말하기를, “죽은 승려는 내 제자다. 나와 더불어 검으로 싸울 수 있는가”라고 했다. 검객이 “할 수 있다”고 말을 하자, 곧 검으로 싸움을 하였다. 검이 서로 마찰하는데 서리와 눈에 빛이 일었다. 공중에 두 개의 푸른 독이 있어 서로 아래로 갔다 위로 갔다 하는 것같이 보였다. 얼마 동안사이를 두고 피 3,4 방울이 땅에 떨어졌다. 서서히 내려오며 (검객이) 크게 읊조리기를, “승려가 쓰려졌습니다. 검에는 12술이 있는데 그 한 가지를 승려가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검에 매우 능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사직하며 “신이 오래 동안 머물고 가지 않은 것은 한번은 공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은혜를 이미 갚았으니, 사직하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했다. 재상이 “내가 너에게 무슨 은혜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검객이) 대답하기를, “저는 다름이 아니라 공이 호서와 영남 사이에서 현령으로 재임할 때 원한을 갚아 준 자의 아들입니다. 재상이 바로 깨닫고 크게 놀랐으나,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람을 시켜 쫓아가게 했으나 이미 떠나가서 (어디로 갔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유한준의 기록에 의하면, 이름을 알 수 없는 검객은 임진왜란(1592~1598)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던 인물로, 임진왜란 전에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 유랑하다가 12술의 검술을 익혔고, 왜적을 막는데 사용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준 재상에게 은혜를 갚은 후 그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이름을 모르는 검객이 익혔다는 12술의 검법이 어떤 기법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검객이 유한준보다 대략 150여 년 전의 인물이므로 그가 직접 목격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임진왜란 전에 조선에도 검술에 능한 이들이 존재했으며, 이들이 왜적을 막아내기 위해 힘을 다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조선에 독자적인 검술이 있었을까?

재미있는 점은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이 검사들을 모아 왜적에게 대응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있었던 것처럼 서술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조선 검객들의 실력이 왜검사의 상대가 안되었다는 점이다. 9인의 조선 검사가 간신히 초립을 이용한 변칙적인 검술을 구사하는 1인의 왜검사에게 쩔쩔매고 그 중에 8인은 죽고, 1인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살아남은 1인도 실력이 아닌 운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당시 왜인의 검술이 뛰어났음은 분명해 보인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이여송이 거느린 명군(明軍)이 벽제역(碧蹄驛) 남쪽의 여석령(礪石嶺)에서 왜병과 대적을 할 때, 명군은 북방의 기병으로 짤막하고 무딘 칼을 휴대했는데, 왜병의 칼은 모두 서나 자나 되고 예리하기가 비길 데가 없을 정도여서, 이들이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 치자 사람과 말이 모두 쓰러져서 감히 그들의 날카로운 기세들 대적할 수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예제보(武藝諸譜)의 무예교전법 국가편처(國家偏處)조를 보면, 왜적과 대진할 때, 왜적이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오면 조선 군사들이 비록 창을 잡고 있고 칼을 차고 있어도 칼은 칼집에서 빼지 못하고 창은 겨뤄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내에 칼쓰는 법이나 창쓰는 법이 전승되어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원인 설명이 이어진다. 이 서술은 무예도보통지, 기예질의(技藝質疑)조에 그대로 실려 있다.


'선조실록'에도 선조 27년(1594) 7월 정해조를 보면, 이번에 귀순한 왜인 중에는 검을 잘 쓰는 자도 있고 창을 잘 쓰는 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검술이 전해 오지 않았는데, 근일에 약간 전습하니 이는 만세에 유익한 일이다라는 언급이 있다. 조선의 임금인 선조조차도 조선에 검술이 전해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서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말로 조선에는 검술이나 창술 등의 기법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았던 듯 하다. '선조실록'을 보자.

(선조 31년 4월 경신) 임금이 ‘우리나라 칼 쓰는 법(我國用劍技)’을 보여주니, 유격(遊擊)이 말하기를,“기법은 좋으나 다만 죽기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가르친 뒤에야 쓸 수 있습니다”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말달리는 법(我國馳馬技)’을 보이면서 말 위에서 서기도 하고 안장 위에 거꾸로 서기도 하니, 유격이 보고는 잘한다고 하였다.

선조 31년(1598) 선조가 우리나라 칼쓰는 법을 보여주었다고 하니, 명의 유격장군 진인(陳寅)이 기법은 좋으나 담력이 필요하다는 대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기록에서 주목해 볼 것은 ‘우리나라 칼쓰는 법’을 보여주었다고 하는 서술이다. 이 점은 우선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인에게 배운 것을 보여줬다는 의미로, 둘째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검법을 보여줬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중국인 교사에게 배운 것을 진인에게 보여줬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에는 검술이 남아 있지 않다는 서술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선조가 ‘우리나라 칼쓰는 법’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는 걸 고려해야 한다. 만약 중국군에게 배운 것이었다면, ‘아국용검기(我國用劍技)’보다는 우리 군대의 칼쓰는 기법이라는 뜻의 ‘아군용검기(我軍用劍技)’라고 표현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말타는 법(我國馳馬技)’이라 하여, 조선만의 독특한 기예인 마상재를 뒤이어 보여주게 했다는 점도 검법이 명나라 군에게 배운 것이 아닌, 우리나라 만의 독특한 것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게 한다.

무비지조선세법중거정세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검법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에 도달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조선 전체를 범위로 보는 것이 아닌 조선군 내에 훈련을 해 오던 검법이 인멸된 것으로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상식적으로 조선군 내에서 군사를 훈련시킬 검법이나 창법이 전래되는 것이 없는 것이었지, 민간에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선조가 우리 검법이 전해지지 않는다고 한 말은 조선의 군대 내에 기본적으로 훈련되어 오던 검법이 인멸되어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게 훨씬 타당해 보인다. 임진왜란 이전 내에 조선 내에도 나름대로 검술을 훈련시킨 기록들이 보이는 것으로도 그러한 견해에 힘이 실린다.

(세종 18년 6월 계미) 백성에게 싸움을 가르치지 않음은 맹씨(孟氏 : 맹자)의 훈계이오나, 하물며 싸워서 이기고 적을 공격하는 데 있어 훈련의 공이 없이 갑자기 싸우게 된다면, 어찌 백전백승의 공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연변의 백성과 구자(口子)의 군사들에게 모두 말달리고, 칼 쓰는 재주를 연습하게 하고(馳馬試劍之藝), 또 중대한 때를 당하여 적에게 대응하는 계략을 가르치게 하여, 장수가 된 자는 상과 벌을 엄히 보여 항상 권장과 징계를 가하여 사람마다 일당백의 재목을 이루면, 적이 두려워하여 변방을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종실록'의 세종 18년(1436) 기록을 보면, 검술을 연습시키자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조선의 군대 내에 검술이 전수되었기에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렵게 증거를 들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칼이 존재하면 그 쓰는 법이 존재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다시 말하면, 임진왜란을 당하고 난 후 조선 정부 내에서 검법이 없다고 오가는 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당시 조선 정부군 내에 군사 훈련을 위해 전습되던 검법이 거의 인멸되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으로 한정해서 봐야 됨을 말해준다. 이러한 점은 '무비지(武備志)' 조선세법(朝鮮勢法)조를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모원의(茅元儀)가 말하기를, “……지금은 그 법이 전하지 않는다. ……근래에 호사자(好事者)가 있어서 조선이 그 세법을 구비하고 있음을 얻어 진실로 중국(中國)이 잃은 것을 사예(四裔)에서 구하니, 서방의 등운(等韻)과 일본(日本)의 상서(尙書)가 유일한 것이다.”

'무비지'의 저자인 모원의가 중국의 검술이 전해오지 않은 것을 조선에서 구했다고 말하고 있다. '무비지'는 1621년에 편찬되어진 책으로 모원의가 15년의 세월을 소비하고서 고금의 병서 2천여 종을 검토 정리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1598년에 종결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비지' 편찬 시기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무비지'의 조선세법은 임진왜란기에 조선에서 명으로 흘러 들어간 검술 중의 하나로 봐도 큰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에 조선 독자적인 검법이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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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놈들이조총으로 디밀이니까 비기나 무술등기록된것을 모두 훔쳐간것이지

    2009-12-2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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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aa

    일본놈들이조총으로 디밀이니까 비기나 무술등기록된것을 모두 훔쳐간것이지

    2009-12-2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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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법이 존재했다구요?

    예전엔 존재했는데 왜 지금은 없지요? 왜 종이나 나무나 가죽이나 천이나 기록해 놓을 생각을 안했을 까요? 몸으로만 익혀서? 전쟁통에 잃어버려서? 불에 타버려서?..하하..생각하고 삽시다..

    2009-12-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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