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이야기] 검술의 맥을 잇는 인물… 탁문한

  


탁문한이 정조 국장을 위해 제작한 죽산마

탁문한(卓文漢)은 나례도감에서 활약하면서 연희에 필요한 조형물을 제작하는 장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776~1821년까지 그는 국가적인 장례가 있을 때 악귀를 쫓는 방상시(方相氏) 탈과 대나무를 사용해 만든 말인 죽산마(竹散馬)의 제작을 담당하는 장인변수(匠人邊首)로 활동했다.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추재기이(秋齋紀異)󰡕에 그에 대한 언급을 보자.

탁반두(卓班頭)의 이름은 문환(文煥)으로 나례국의 편수다. 젊어서부터 황진의 춤과 만석중의 노래 및 우스개 몸짓을 잘하여 반중(班中)의 자제 가운데 그를 따라잡을 자가 없었다. 늙어서 청나라 사신을 영접한 노고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품계를 하사받았다.

이 기록에는 탁문한이 아닌 탁문환으로 기록되어 있다. 탁반두라는 칭한 것은 그가 오랫동안 산대도감의 우두머리인 반두를 지냈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 정조 8년(1784)를 11월 5일(병진) 기록을 보면, 그는 나례도감의 편수 가운데 가장 높은 도편수(都邊首)도 역임했음을 알 수 있다. 심능숙(沈能淑, 1782~1840)의 󰡔후오지가(後吾知可)󰡕에 실린 「탁문한기실(卓文漢紀實)」에는 ‘그의 집안이 대대로 녹봉을 받는 관직을 받았으며, 임금으로부터 은사를 받아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가선대부는 종2품, 자헌대부는 정2품에 해당하는 품계이다. 심능숙의 「탁문한실기」에는 그의 출신과 성격을 알려주는 기록이 보인다.

탁문한은 한양의 양족(良族)이다. 사람됨이 기량과 국량이 뛰어났고 기가 세어 날래고 사나웠다. 마음껏 행동하고 일정하게 하는 일이 없었던 데다가 술을 즐겼다. 술을 한번 마시면 기어코 만취하는 것을 법으로 삼았다. 술에 취하면 성깔을 부리고 뻣뻣하게 행동하였다. 길에서 기분에 맞지 않는 일을 보면 남을 대신하여 화를 내서 가는 곳마다 소란을 피웠다. 그 때문에 거듭하여 법망에 걸렸으나 평소의 행실을 버리지 않았다. 동료들이 그를 미워하였으나 감히 그와 관계를 끊지 못했다.

당시 탈춤꾼으로 활동하는 계층은 천인들이었다. 따라서 탁문한을 양족(良族) 즉, 양민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은 그가 천인출신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앞서 그 집안이 대대로 녹봉을 받았다고 한 점을 고려하면, 양반 출신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탁문한에게는 친형인 탁문주(卓文周)와 탁민수(卓敏秀)가 있었다. 탁문주는 󰡔승정원일기󰡕를 보면, 정조 2년(1778) 금위영에서 죄인을 다루는 일을 맡아보던 뇌자(牢子), 정조 12년(1788)에는 금위영의 삼패순라비장(三牌巡邏牌將)이자 별기위(別騎衛)로 재직한 사실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정조 8년(1784)의 󰡔왕세자책봉경용호방(王世子冊封慶龍虎榜)󰡕를 보면, 정시에서 병과 215위로 합격한 탁문주가 찾아진다. 탁문한의 형인 탁문주와 동일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평이 본관인 탁문주는 1744년 생으로 당시 나이가 41세였다. 동일인이라고 한다면 탁문한은 양반 집안의 인물이었으며, 빨라도 1745년 이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조카인 탁민수(卓敏秀)도 용호영의 기병으로 1796년부터 1818년까지 가후금군(駕後禁軍)으로 재직했으며, 순조 2년(1820)에는 귀산첨사(龜山僉使)를 역임했다.

탁민수가 “소인의 문벌은 대대로 증거가 있습니다. 다만 숙부(탁문한)께서 젊은 시절에 행한 실수가 저 때문에 드러날 듯 하므로 스스로 물러나겠습니다”라고 했다거나 그의 친형인 탁문주(卓文周)가 뜻을 굽혀 탁문한을 아꼈다고 한 점을 고려하면, 양반으로 천인들이나 하는 연희패의 탈춤꾼 등으로 활동하는 그의 행동이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환영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탁문한이제작한방상시탈

탁문한은 앞서 인용문을 보면, 술을 좋아하고 성격 또한 그리 원만하지는 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동료들이 그를 미워하면서도 관계를 끊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여기에는 그가 무서워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는 점도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문한기실」을 좀 더 보자.

(탁문한은) 어릴 적부터 검무에 통달하였다. 회풍낙화지상(廻風洛花之狀: 회오리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모양)을 할 줄 알았는데, 세상에서는 김광택이 죽은 지 백년 만에 탁문한이 그 신기함을 터득했다고 말했다. 드디어 검술에 자신감을 가져 산붕의 연희장에 갔을 때 검무를 추는 자가 기예가 졸렬하여 형세를 타지 못하는 것을 보고 탁문한이 그 자리에서 검술을 혹평했는데 좌우 사람들이 눈을 흘겼다. 탁문한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검을 빼앗아 소매를 치고서 기세가 등등하게 춤을 추었다. 그 사실을 모든 이가 세상에 전하자 집안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겼다. 그 후에 문득 술 마시는 것도 끊고 행동도 바꿨다.

탁문한은 어릴 적부터 검무에 통달했다고 하면서 연희장에서 다른 사람의 검무를 혹평하며 스스로 검무를 추기도 했다고 한다. 그가 검술에 능했음은 󰡔금위영초등록(禁衛營抄謄錄)󰡕에 영조 50년(1774) 10월 초하루에 있었던 장교와 군병의 무예평가와 시상내역에, 그는 검술에서 상하의 평가를 받은 73명 가운데 수석으로 포목 한 필을 부상으로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검무 솜씨는 ‘회풍낙화지상’로 요약된다. 검에서 내뿜는 기운이 회오리바람에 꽃잎이 떨어지는 듯 한 모양을 연상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 ‘회풍낙화지상’이라는 기법은 김광택이 행했다는 모든 땅에 꽃이 떨어지는 형세인 ‘만지낙화지세(滿地落花之勢)’와 유사한 기법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세상사람들이 김광택이 죽은 지 백년 만에 탁문한이 그 신기함을 터득했다고 하는 정황을 고려한다면, 탁문한은 김체건과 김광택으로 이어지는 검술의 맥을 잇는 인물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탁문한의 존재를 통해, 김체건-김광택……탁문한으로 이어지는 조선 검술의 한 맥을 살펴볼 수 있는데, 다른 자료의 발굴을 통해, 빠진 연결고리를 메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탁문한에 대해서는 안대회 선생의 「18․19세기 탈춤꾼․산대조성장인 탁문한 연구」(󰡔정신문화연구󰡕 33권 4호, 2010)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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