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도적을 제거하다 - 전일상 1
발행일자 : 2011-12-12 12:07:56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전일상(田日祥, 1700~1753)은 본관은 담양(潭陽)으로 자는 희중(羲中), 호는 석천(石泉)이다. 형 전운상(田雲祥, 1694~1760), 동생 전천상(田天祥, 1705~1751)도 이름을 남겼는데, 이종휘(李種徽, 1731~1797)의 문집인 '수산집(修山集)'에는 “형 운상(雲祥)과 동생 천상(天祥) 모두 무예로 현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일상의 출생과 관련해서는 다음의 이야기가 전한다. 홍주영장 전시원(田始元)의 부인은 토정 이지함의 6세손이라고 한다. 전일상의 어머니 한산 이씨는 시집 와서 여러 해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해 친정으로 쫓겨 갈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아기를 낳지 못하니 친정으로 돌려보내겠다는 의사를 한산 이씨의 친정에 전한 것이었다. 그러자 친정어머니는 “내 딸아이를 친정으로 돌려보내기 전에, 시집갈 때 보낸 혼수품을 한번 살펴보시지요.”라는 말을 했다.
시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그녀가 가져 온 혼수품을 살펴보았다. 그 가운데에는 장롱 속에 꼭꼭 숨겨놓은 밥그릇이 하나 있었다. 밥그릇은 보통사람들의 밥그릇보다 몇 배는 더 들어가는 큰 것이었다.
깜짝 놀란 시어머니가 “이게 웬 밥그릇이냐?”며 묻자, 한산 이씨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하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몇 번이나 다그쳐 물은 후에야 간신히 대답했는데, 여자 몸이지만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던 그녀는 우람한 체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섭취해야 할 음식의 양이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에 시집 온 그녀는 집안 어른들을 봉양하고 난 후 남은 음식을 먹었는데, 겨우 허기를 면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시집올 때 친정어머니가 보내준 큰 밥그릇에 찰 정도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한산 이씨가 임신을 못하는 이유는 영양실조인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된 시어머니는 그날부터 며느리가 배를 곯지 않도록 배려를 했다. 그 후 한산 이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큰아들인 운상을 낳았다.
한산 이씨가 큰아들을 낳고 나서 나라에 큰 흉년과 기근이 들어,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살기 어려운 시절이 닥쳐왔다. 자연히 한산 이씨도 배를 곯으며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하지만 임신이 되지 않았다. 지난 경험으로 보아 영양 섭취만 된다면 임신이 가능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산 이씨는 다시 임신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밤에 몰래 집 뒤로 나갔다. 집 뒤에 있는 넓은 밭에서는 푸릇푸릇한 호밀이 이삭을 내밀고 있었다. 호밀이 통통하게 익으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지만 둘째 아이를 갖겠다는 그녀는 익지 않은 풋밀의 이삭을 따서 양손바닥으로 비벼, 알곡을 골라내어 먹었다. 잘 영근 밀알에 비할 수 없지만 그런 대로 배를 채울 수는 있었다.
이렇게 허기를 면하는 데는 밀 한 고랑이 모두 없어졌다. 한산이씨는 그 뒤로도 밤마다 밀 한 고랑씩을 먹었다. 그 효험으로 둘째 아들 일상을 낳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홍성의 지역신문인 내포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했다). 숙종대 자연재해가 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전일상의 관력은 <승정원일기> 영조 4년(1728) 8월 기축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전일상이 말하기를, “소신은 신축년 정시 출신으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습니다. 계묘년 시사(試射)에서 상으로 가자(加資)되어 고령첨사(高嶺僉使)가 되었고, 그 후에 단천부사(端川府使)․나주영장(羅州營將), 지금 우림장(羽林將)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전일상이 스스로의 이력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신축년은 경종 원년(1721)으로, 이해 무과에서 합격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계묘년 즉 경종 3년(1723)에 활쏘기 시험에서 상으로 가자, 즉 품계를 올려받았다고 한다.
이 사실은 경종실록에 서총대(瑞葱臺)에서 실시된 내시사(內試射)에서 애기살인 편전(片箭)에 응시해, 다 맞히는 몰기를 하여, 경종이 그의 자급을 올려 주라고 했다는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기록에는 편전에서 변(邊) 3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지니는데, 임금이 품계를 올려주라고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어도 그가 뛰어난 활 솜씨를 지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수산집>에는 그의 체구가 크고 힘이 매우 셌으며, 먹는 음식의 양이 10명분이었으며, 성격은 용단을 내리고 결정짓는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등에서도 얼굴의 각 부분과 몸이 비교적 큼직큼직하게 묘사하게 되어 있어 기록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주영장(羅州營將)으로 재직 중에는 영조 3년(1727)에는 단천부사(端川府使) 시절 형벌을 혹독하게 해 백성으로부터 원망을 샀다는 이유로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을 받았으며,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재직 중인 영조 11년(1735)에는 인품이 어리석고 포악하다는 내용으로 지평(持平) 이성효(李性孝)에게 탄핵을 당하여 관직삭탈이 건의되었다.
또 삼화부사(三和府使)로 재직 중이었던 영조 17년(1741)에는 흉악하고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는 내용으로 재차 탄핵을 당해, 벼슬아치의 명단인 사판(仕版)에서 삭제 당할 뻔하기도 했다.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의 성격이 포악하여 형벌을 함부로 적용했다는 기록들이 찾아지는 것을 봐서는 그의 성격이 온화하거나, 원만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 듯하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