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조선의 마지막 무인 - 귀암노인
발행일자 : 2011-11-28 17:06:13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귀암(龜岩) 노인은 이규태의 <깨어라 코리아>에 등장하는 대한제국 말의 무인이다. 호남 해안 지역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본명은 알 수가 없으나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된 근위 제2연대 1대대의 하사 출신으로, 당일 해산직장에 나가지 않고 저항한 군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해산식 전에 이미 일본 군인들은 한국군의 어깨에 붙은 견장을 떼고 은사금이란 명목으로 80원씩을 나눠주었다. 그는 뜻을 같이 하는 군졸들과 함께 지폐를 찢어버리고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길로 쫓기기 시작하여 2년 동안 삼남 지방에서 의병장으로 싸우다가 1909년 봄 전북 부안의 줄포 싸움을 마지막으로 절름발이가 된 채 패배해 도주했다. 그 과정에서 호남지방 선교를 맡고 있던 군산 연안의 귀암 지역 선교사 숙소로 뛰어들어가 사정을 얘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부탁했다. 다행히 그는 이날부터 여성 선교사들 숙사의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부터 차고 다니던 장도(長刀)와 총검을 늘 보배처럼 간직하고 있었다. 특히 장도는 서소문 군영을 탈출한 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었다.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듯이 하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하고는 했다.
몸에 벤 군영생활의 습속을 유지했는데, 새벽 해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는 수련(水鍊)이라는 것을 하고 발은 절뚝거리기는 하였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맞추어 보조를 높였다 낮추었다, 뒤로 달았다 했으며, 그전부터 몸에 익은 대로 초하루와 보름에는 왕궁이 있는 쪽을 향해 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웃통을 벗어젖히고 수련하는 것이 여선교사들 숙소에서는 문제가 되었다. 아울러 아무리 신앙을 전도하려 해도 들은 체 만 체하고 왕궁을 향해 절을 하는 태도 때문에 선교사들의 눈 에 나게 되었다.
어느 날 귀암노인은 급하게 돈이 필요했는지 선교사에게 돈을 좀 꿔줄 것을 부탁했다. 미국인 선교사는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무골(武骨) 노인의 고집을 아주 꺾어주리라 단단히 마음먹었다.
그래서 귀암노인이 귀중히 여기는 장도를 담보로 내놓기만 한다면,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정도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근 20여 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내맡겼다.
그런데 며칠 지난 후 선교사가 저당 잡아둔 칼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칼을 놓아두었던 자리에는 귀암노인의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편지의 내용인 즉, 무사로서 서양 오랑캐 밑에서 천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만도 치욕적인 일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몰래 가지고 간 자신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귀암노인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인다운 무사정신에 감동한 미국인들은 귀암강 둔덕에 그를 묻어주었다고 한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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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라는 인간이 못됐네.. 성직자이면 성직자 답게 넓은 마음으로 이해를 해줘야지
보통 사람과 다를게 없지 않은가?
어떻게든 꺾어 버릴려고 하니 죽음을 택한거지.
입으로는 주 어쩌고 외쳐도 본성은 안 변한다.개독들2012-09-1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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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수준의 무예를 가지고도, 생활고로 인해 죽어야 했다니...
고달픈 조선 민중의 삶을 보니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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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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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조선 민족의 혼을 지닌 무사 답습니다.
2011-11-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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