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불같은 성격' 이순신

  

이순신의 힘, 활쏘기, 검술은 과연 어느 정도?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옥당(玉堂) 즉, 홍문관(弘文館)의 관리로 있을 때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한강을 건너려고 했다. 강물은 불어나고 건너는 사람이 많아, 서로 배에 앞 다투어 오르느라 나루터가 자못 소란스러웠다. 이 때 무인으로 보이는 길손이 혼자 평복 차림으로 말을 끌고 배에 올랐는데, 어느 술 취한 자가 뒤따라올라 와서는 그가 자기보다 배에 먼저 오른 것을 가지고 화를 내며, 욕을 해 댔다. 심하게 욕을 하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분개했다. 그럼에도 불구, 정작 길손은 머리를 숙이고 채찍을 늘어뜨린 채, 강을 다 건너도록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척 하고 있는 것이다. 유성룡은 그의 그런 태도에 속으로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덧 배가 나루터에 닿자, 길손은 말을 먼저 몰고 내려, 말의 뱃대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다. 술에 취해 길손에게 무례한 말을 한 자도 계속 욕지거리를 하면서 뒤따라 내렸다. 유성룡이 그의 말을 가만히 듣자니 대갓집 하인이었다. 지속되는 욕지거리에 참고 있던 길손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은 채, 오른손으로 술 취한 하인을 움켜잡았다. 마치 맹호가 토끼를 후려치듯 민첩한 행동이었다. 그러더 칼을 뽑아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넣어버리고는 낯빛도 변하지 않고 말에 올라 곧장 떠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루터에서 그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 크게 놀라 넋이 빠져 있는데, 유성룡만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 사람은 대장감이다.”라고 감탄하였다. 유성룡은 항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훗날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모습(출처=이순신 세계화사이트)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전하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성대중은 유성룡이 이순신을 알아본 것은 사실 이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율곡이 천거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유성룡이 옥당 즉 홍문관의 관리로 있을 때라고 한다. 이순신의 나이 26세(1570)에서 31세(1576) 사이에 있었던 일로 보인다. 유성룡의 관력을 살펴보면, 29세(1570) 봄에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 34세(1575)에는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 35세(1576)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인지는 조금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 1566~1619)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行錄)을 보면, 유성룡은 같은 동네에서 살던 옛 친구로, 언제나 이순신이 장수의 재목임을 알아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20대 중․후반에서야 이순신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알았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항복의 백호전서에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은 본디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젊어서부터 서로 친구가 되어 남달리 그를 잘 알았으므로, 매양 순신에게 장수의 재능이 있음을 허여하였다”고 하고 있다.

이순신은 장수로써는 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무인으로서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은 면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충무공) 행록(行錄)을 좀 더 살펴보면, 무과에 급제시까지 이순신의 행적을 알려준다. 이순신은 어려서 놀 때부터 여러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면, 친구들이 반드시 이순신을 장수로 삼았으며, 어려서 두 형을 따라 글공부를 했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항상 붓을 던져버리려야 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몸에 기운이 넘쳐 가만히 앉아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아닌 듯하다. 백호전서에도 “순신은 아이 적에 놀이를 하면서도 항상 전진(戰陣)의 모양을 만들어서 놀았고, 어려서부터 호걸스럽고 얽매이지 않아서 남들의 침범이나 기만을 받지 않았으며, 동리 사이에서 혹 불쾌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그때마다 상대방을 꺾어 굴복시키고야 말았으므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이 무예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22세 때인 1566년 겨울이었다. 21세가 되는 1565년에 보성군수(寶城郡守)였던 방진(方震)의 딸과 결혼을 했는데, 장인 방진은 무변 출신으로 힘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했다. 또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순신의 무예훈련은 대부분이 장인 방진으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쌓여갔다.

행록을 보면, 이순신은 힘이 다른 사람보다 세었고, 말타기와 활쏘기에도 능해 당시에 같이 놀던 사람들 중에 그를 당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순신의 힘이 남들보다 뛰어났음은 무과에 합격한 후 조상의 묘에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넘어져 있는 석인상을 혼자 힘으로 세운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수십 명의 하인을 시켜 일으켜 세우게 하였으나 일으키지 못하자, 그들을 꾸짖은 이순신이 웃옷을 벗지 않은 채로 등으로 밀어서 석인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당시 보는 사람들이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7세 때인 1572년 가을에 무과시험을 봤는데, 달리던 말이 고꾸라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져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가 죽었을 것으로 생각을 했다. 그는 한쪽다리로 일어서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겨 싸맸더니 사람들이 장하다고 하였다고 하였으나, 결국 합격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무과에 합격한 것은 32세 때인 1577년 봄이었다.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고 하고 있어, 그의 무예 실력을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되고 있다. 이순신이 활쏘기에 능했음은 난중일기 등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순신은 공무 중 틈이 나면 활쏘기를 자주 하였다. 한 번 쏠 때 대개 10순 내지 15순을, 많으면 20순을 쏘았다. 1순은 화살 5대를 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보통 50시 내지 75시, 많게는 100시를 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활을 쏠 때, 쇠로 만든 활인 철전(鐵箭)과 애기살이라고 불리는 편전(片箭)을 함께 쏘기도 했는데, 많게는 철전과 편전 각각 5순씩을 쏘았다. 6월 29일자 기록을 보면, 철전과 편전 그리고 사후 모두 18순을 쏘았다고 한다.

이순신의 활쏘기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활을 쏠 때 과녁에 적중한 화살 수가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1592년 3월 28일 기록이 유일한데, 이 날 이순신은 10순을 쏘아, 5순은 다 맞히고, 2순은 4회, 3순은 3회를 맞혔다고 기술하고 있다. 1순은 5시를 쏘는 것을 말하므로, 10순은 총 50번을 쏜 것이다. 그 중 42시를 적중시키고 8시를 놓친 것이다. 물론, 이런 사례만을 가지고서 그의 활쏘기 실력을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이순신의 칼에 대한 자료가 수록된 원융검기

이순신은 1594년 9월 4일에 경상우수사 원균(元均, 1540~1597)과 활쏘기를 했다. 원균은 9푼을 지자 술에 취해 돌아가기도 했으며, 1596년 정월 28일에 경상우도순찰사 서성과 활쏘기 시합을 해서는 7푼을 이기고 군관 3명과도 시합을 해서 이겼다. 29일에는 서성과 다시 시합을 해서 9푼 차이로 이겼다. 28일 시합에서는 7푼 차이로 진 서성은 섭섭한 기색을 보였는데, 이순신은 그러한 태도를 보며 ‘우습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그가 1593년 3월 17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1561~1597)와 활쏘기를 하였는데, 그의 모양이 형편없다고 하면서 ‘우습다’라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억기는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순신이 우습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의 활솜씨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의 활솜씨는 (이충무공) 행록에 실려있는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43세 때인 1587년 당시 조정에서 녹둔도(鹿屯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는데, 조산만호(造山萬戶)였던 이순신이 그 일을 관장하게 되었다. 그 지역이 너무 멀고 병졸이 적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군사를 증가시켜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병사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한 상태에서 그해 8월에 비적이 둔전의 목책을 습격하여 포위하자 이순신이 선두에 있는 붉은 털옷을 입은 자 수 명을 연속해서 활로 싸서 쓰러뜨리자, 적들이 도망을 쳤다. 이운룡과 함께 추격하여 사로잡힌 군사 60여 명을 되찾아왔다. 한창 교전 중에 화살에 왼쪽 다리를 맞았는데, 몰래 스스로 화살을 뽑았는데, 그의 안색이 변하지 않아 군중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1596년 3월 6일 일기를 보면, <함평(咸平)․남해(南海)․다경포만호(多慶浦萬戶) 등이 칼쓰기를 수련하였다[用劍]. 땀이 지금까지 흐른다[咸平․南海․多慶浦萬戶等用劍 汗流至今].>라고 기재되어 있다. 함평현감 손경지와 남해현감 박대남 그리고 다경포만호 윤승남 등이 검술 수련을 하였다고 한 것이다. 이순신이 검술 수련에 동참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땀이 지금까지도 흐른다’라는 서술이 바로 이어져 있다. 일기를 쓰는 순간까지도 땀이 날 정도였다면, 이들과 같이 이순신도 검술 수련을 했던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앞서 칼로 무례한 이를 처벌한 청성잡기의 기록과 같이 볼 때, 검술 수련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순신이 사용한 장검은 아산 현충사에 2자루가 소장되어 있다. 길이가 197.5cm이고 무게는 5.3kg에 달하는데, 그 두 검에는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색을 바꾼다(三尺誓天 山河動色).”와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과 물을 물들인다(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문구가 각각 새겨져 있다. “갑오 4월에 태귀련(太貴連)․이무생(李茂生)이 만들다(甲午四月日 造太貴連․李茂生作)"라는 문구도 있다. 이는 1594년 4월에 만든 것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칼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길고 무게도 상당하기 때문에 의장용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이순신이 1597년에 지은 「한산도가(閒山島歌)」를 통해서도 대도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쌍룡검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올라
큰 칼[大刀] 어루만지며 깊은 시름 할 때에
어디서인가 들리는 오랑캐 피리소리가 시름을 더하네>

이외에 현재는 그 소재를 알 수 없지만, 이순신이 사용하던 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조대에 훈련대장을 지낸 박종경(朴宗慶․1765~1817)은 그의 저서인 돈암유고(敦巖遺稿) 「원융검기(元戎劒記)」조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쌍룡검(雙龍劒)을 병부상서 심상규(沈象奎)가 주어서 소장하고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검에는 “주조해서 쌍룡검을 얻으니 긴 세월의 기운이 아직도 굳세다. 산과 바다에 맹세하니, 충의로 인하여 일어나는 분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鑄得雙龍劍 千秋氣尙雄 盟山誓海意 忠憤古今同).”는 시가 새겨져 있다. 이 때문에 ‘쌍룡검’이라고 불린다. 이 검은 1910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미술대관이라는 책에 사진이 실려 있어, 이 무렵까지는 칼이 전해져 왔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서지학자인 고 이종학에 의해 알려졌다.

난중일기에는 활쏘기 외에도 당시 군사들에게 시킨 신체훈련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용어들이 보인다. ‘각력’과 ‘초월’이 그것이다. 1594년 9월 21일자 기록을 보면, 해질 무렵, 여러 장수들에게 초월(超越)을 시켰다. 또한 군사들에게 각력(角力)을 시켜 서로 겨루게 하였는데, 저녁이 깊어 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1595년 7월 15일에 경상수사가 오자 함께 이야기하고 각력으로 승부를 시켰다고 하는 기록, 1596년 4월 23일에도 군사들 중에 힘센 사람을 뽑아 각력을 시켰더니, 성복(成卜)이란 자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상으로 쌀 한 말을 주었다는 기록, 같은 해 5월 5일에는 여러 장수들과 회의를 하면서 각력을 시켰는데, 낙안군수 임계형(林季亨)이 일등이었다는 기록 등을 좀 더 찾을 수 있다. 이 때의 각력은 지금의 씨름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씨름을 시킨 것은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병들의 노고를 풀어주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초월은 ‘뛰어넘기’로 풀이되는데, 어떤 장애물을 설치하고 그 것을 뛰어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여하튼, 당시 장군 혹은 병사들의 기본 훈련에 씨름과 뛰어넘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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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동

    잘 읽었습니다. 무카스 정말 최고군요.

    2009-11-1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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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태까지 이순신 장군의 무위는 그냥 그 시대 장군 평균 정도고 그 분과 관련된 무술 솜씨 관련 비화는 사실 무의공 이순신 장군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나보군요...

    2009-11-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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