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장보고와 정년 그리고 송징

  

장도를 지키는 신


장도는 전라남도 완도에 있는 섬으로 장보고가 설치한 청해진의 본영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장보고(張保皐, ?~841년 또는 846년)에 대한 기록은 사실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당의 시인 두목(杜牧, 803~852)의 <번천문집(樊川文集)>에 서술된 장보고와 정년(鄭年)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장보고의 원래 이름은 <삼국사기>에는 궁복(弓福), <삼국유사>에는 궁파(弓巴)로 남아있지만,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나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등의 일본 측 기록에는 장보고(張寶高)로 기록되어 있다. 정년 또한 이름의 한자가 련(連)으로도 쓴다는 점과 장보고보다 10살이 어렸다는 점 외에는 정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없다.

안동장씨족보의 일부분


다만, 역사적 자료로 이용하기 어려운 <인동장씨족보(仁同張氏族譜)>(1997)에 의하면, 장보고의 아버지는 장백익(張伯翼)이고, 중국 절강성(浙江省) 소흥부(蘇興府) 사람이라고 한다. <안동장씨세보(安東張氏世譜)>(1999) <절강세계(浙江世系)>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정년 또한 <경주정씨월성위파세보(慶州鄭氏月城尉派世譜)>(2004)를 보면, 이시찬(伊尸湌: 이찬?) 벼슬을 지낸 파동(坡同)과 석(昔)씨의 아들이며, 문성왕 원년(840)에 대각간(大角干)으로 시림군(始林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물론 족보의 이야기는 그 근거가 될 만한 기록을 찾을 수 없으므로 완전히 믿을 바는 되지 못한다.

여러 기록들을 바탕으로 장보고와 정년의 행적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을 바닷가에서 보낸 두 사람은 당의 서주(徐州)에 가서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이 되었다. 이들이 당으로 간 이유는 뛰어난 무예실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섬사람[海島人]이라고 하여 업신여김을 당할 정도로 한미한 집안 출신인 이들은 관직에 등용되기조차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819년에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의 손자 이사도가 독립적으로 관할하던 ‘평로치정’과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후에 장보고와 정년은 어떠한 이유인지 모르지만 사이가 벌어졌다. 홀로 신라에 귀국한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신라인이 노비로 팔려가고 있는 사정을 말하면서 이를 막기 위해 진영 설치를 건의하였다. 이에 흥덕왕은 군사 만 명을 주어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당에서 지위를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방황하던 정년도 청해진으로 장보고를 찾아와 화해를 했다. 836년 12월 신라에서는 흥덕왕 사후에 벌어진 왕위계승쟁탈전에서 김우징(金祐徵)의 부친 균정이 패배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우징은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는데, 민애왕의 찬탈소식을 들은 우징은 만약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이에 장보고는 정년에게 군사 5천명을 주어 민애왕을 축출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옹립하였다. 하지만, 신무왕이 6개 월 만에 죽고 장보고도 문성왕 3년(846)에 염장(閻長)에 의해 암살당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측 기록에서는 841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는데, 당대 기록이라는 점에서 좀 더 신빙성이 높아 보인다.

장보고와 송징은 동일인물이 아닐까?


장보고 초상화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재당신라인들을 규합하여 중국과 일본 등을 아우르는 국제무역을 주도하였다. 중국 산동 지역의 문등과 강회지역의 연수, 강남지구의 명주(지금의 영파) 등지에 장보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입당구법순례기>에 의하면, 산동 지역에 위치한 적산(赤山) 법화원(法花院)은 장보고가 설립한 것으로 1년에 500석의 곡식을 수확할 정도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해외여행을 할 때 장보고 등의 신라인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은 승려들과 관계가 있는 절들, 예를 들면 적산선원(赤山禪院)이나 온죠지[園城寺] 등에는 ‘적산대명신(혹은 신라대명신)’이나 ‘신라명신’ 등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데, 대부분 장보고를 형상화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원래 청해진이 설치된 장도의 배후 마을인 장좌리에서 마을을 지켜 주는 신에게 공동으로 지내는 당제에서 장보고는 빠져있었다는 점이다. 옛 당제에서 주신은 송징(宋徵)이었고, 부신으로는 정년(우측)과 고려시대 승려 혜일(慧日)대사(좌측)가 모셔져 있는 반면, 장보고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호국신사(護國神祠) : 현의 남쪽 칠장리(七長里)에 있다. 세상에서 ‘모시는 신은 송징이다’라고 한다”고 하여 조선 전기에도 송징이 주신이었음을 알려준다.

1885년에 편찬된 <호남진지(湖南鎭志)>에는 송징을 ‘고려말’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장도단(將島壇)과 관련하여, ‘고려장사’ 송징이 청해 장도에서 무술을 닦았는데, 지략과 무용을 겸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장도의 토성도 고려 장사 송징이 쌓은 성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기도 하다. 고려 사람이라는 점을 바탕으로 몽골과 항전을 벌인 삼별초의 장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씨족원류>를 살펴보면, <진천 송씨> 조에서 고려 말 사람으로 송징을 찾을 수 있기는 한데, 동일인인지는 명확치 않다.

하지만 장보고와 많은 관련을 맺고 있는 정년이 부신으로 모셔져 있는데, 장보고가 아닌 송징이 주신으로 모셔져 있다는 점과 장도의 토착 해양 세력인 송징이 결국 부하였던 엄 장군과 딸에게 배신당해 까투리 섬으로 퇴각했다가 엄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패망했다는 점이 장보고의 몰락 과정과 비슷하다. 이런 점에서 장보고와 동일인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장보고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으므로 그를 드러낼 수가 없었고, 송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제사를 지내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어느 견해가 좀 더 설득력을 가졌는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는다. 하여튼 현재 장도에서는 장보고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던 1982년부터 그를 신격에 포함시켜 4위의 당제를 지내고 있다.

장보고와 정년이 당에서 무령군 군중소장의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점은 그들의 뛰어난 무예솜씨가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를 보자.

(장보고와 정년은) 모두 신라 사람인데, …두 사람 모두 싸움을 잘하였다[善鬪戰]. 년은 특히 바다 속에서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았다. 그 용맹과 씩씩함을 비교하면, 보고가 (정년에게) 조금 뒤졌으나, 년이 보고를 형으로 불렀다. 보고는 연령으로, 년은 기예로 항상 서로 맞서 아래에 들지 않으려 하였다. 두 사람이 당에 가서 무령군 소장이 되어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데[騎而用槍 無能敵者], 대적할 자가 없었다.

두 사람 다 싸움을 잘하였는데, 바다를 건넌 당에서조차 대적할 만 한 자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말타기와 창술에 능했다고 한다. 정년은 50리를 헤엄쳐도 숨이 차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수영실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에는 당시 무령군의 사졸들은 교만하다거나, <구당서>에서는 서주의 땅이 중요하며 병사들이 매우 강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이 높은 관직은 아니지만, 소장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무예실력이 출중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장보고의 무예에 대해서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은 <간옹선생문집(艮翁先生文集)>에서 “무령군 장군 장씨가 철창(鐵槍)으로 말을 날듯이 타고 만인 가운데로 들어가니 당의 무사가 모두 수치스러워 죽었다”라고 표현을 하였다. 한편, 장보고의 이름과 무예를 연결 지어 보는 견해도 있다. 장보고의 원이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궁복’ 혹은 ‘궁파’였는데, 이 이름이 활쏘기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파(巴)의 소릿값은 ‘보’였는데, 신라 말 ‘복’이나 ‘보’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므로, ‘궁복’이나 ‘궁파’는 ‘활보’로 읽을 수 있다. 이는 ‘활 잘 쏘는 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朱蒙)이 활을 잘 쏘아서 그 이름이 붙은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적산선원에는 있는 ‘신라명신’과 관련한 그림을 보면, 왼손에는 활을 오른손에는 화살을 들고 있어 활쏘기와 어떠한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

고려 장사로 언급되고 있는 송징의 무예솜씨는 <동국여지승람>에 기록을 통해 살필 수 있다.

사현(射峴) : 완도에 있다. 전설에 이르기를, “옛날에 섬사람으로 이름을 송징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용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활을 쏘면 60리 밖에까지 미쳤다. 활시위가에서 피가 나왔는데, 지금도 반석에 활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사현이라 부른다.”고 한다.

완도에 있는 사현이라는 곳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송징이 60리 밖에까지 활을 쏠 수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60리는 현재의 거리로 따지면 24km 정도가 된다. 따라서 현실에서는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가 활쏘기에 능했음을 말해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 고로(故老)들에게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지은 석천집의 <송대장군가>에서도 볼 수 있다. 일부를 보면, “허리에 찬 화살 크기는 나무둥치만 하고, 칼집에 든 칼은 북두칠성 찌르겠네. 활을 힘껏 당기면 그 화살 육십 리를 백보 거리처럼 날고, 활촉이 높다란 벼랑에 헌 짚신 꿰듯 박히더라네”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1859년에 간행된 동환록(東寰錄)의 <호계석(虎溪石)>조에는 “돌 (한쪽)면에 화살촉 자국이 있는데 송징이 활을 쏜 곳이라고 전한다”는 언급이 있다. 구전에도 계속되는 흉년과 관리들의 착취로 인해 주민들이 힘들어하자, 송징이 세금으로 낸 곡식을 운반하는 배인 세미선이 완동(阮洞)쪽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남선리 앞바다를 지나가야 하므로 장도에서 활을 쏘아 막고, 개머리를 지나 서해안으로 가려하면 정도리(正道里) 송댓여[宋大將軍嶼]에서 활을 쏘아 세미를 빼앗았다고 한다. 하나같이 송징이 활쏘기의 명수였음을 말해준다.

장보고가 활에 능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는 창술에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송징은 대개 활쏘기와 관련해서 이야기들이 집중되어 있다. 만일 송징이 장보고와 동일 인물이었다면, 창술에 능했다는 얘기가 더욱 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같은 인물로 보기에 어려운 점도 있다.

합기도의 원류는 신라의 무예


지난 6월 열린 공수도대회 경기 장면(본 글과 관련없음)


덧붙이자면, 일본 중세인인 ‘신라사부로 미나모토 요시미쯔[新羅三郞 源義光, 1045~1127]’가 전쟁에 출전할 때마다 장보고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적산명신(신라명신)상 앞에서 승리의 의식을 치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손 중에 한 사람이 ‘다이또오류 아이키쥬쯔[大東流 合氣柔術]’(이하 다이또오류)로 유명한 다께다 소오가쿠[武田惣角, 1859~1943]다. 이는 한국 합기도 발전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께다의 제자라고 하는 최용술(崔龍述, 1899~1986)은 국내에 야와라[和]를 전했으며, 그것이 발전하여 수많은 한국 합기도가 나타나게 된 단초를 제공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최용술이 진짜 다께다 소오가꾸의 제자인가에 대해서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최용술이 일본에 있으면서 어떤 종류의 유술을 배워 국내에 전파하였지만, 다이또오류인지는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이또오류를 배운 것이 확실한 한국사람으로는 장인목(張寅穆)을 들 수 있다. 그는 다께다의 제자인 마쯔다 토시미[松田豊作]로부터 대동류를 배웠으며, 면허개전까지 받아왔기 때문이다. 장인목의 기술들은 허일웅-송일훈으로 이어지며, 그 맥을 잇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합기도의 원류가 되는 다이또오류가 신라의 무예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다. 최용술은 1985년 KBS-2TV의 <비밀의 거튼>이라는 프로그램에 출현해 스승인 다께다가 “이 무술은 너희 나라 무술이니, 너의 나라에 가서 보급시켜라”라고 말했으며, 장인목도 그의 스승인 마쯔다 토시미로부터 “이 무술은 원래 신라무술이었는데, 일본으로 건너 온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김이수, <합기탐구>, 홍경, 2000, 10쪽, 21쪽)고 한 것이다. 이후 합기도 수련자들 및 관심 있는 이들이 다이또오류의 유래에 대해 살펴보면서 ‘원래 우리무술’이었음을 강조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무예사도 역사의 일부분이므로 역사적인 유래나 관련성 등 사실을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이런 연구는 반드시 행해져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열정이 과열되어 자칫하면, 국수주의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살짝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다이또오류가 우리나라 특히, 신라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은 우리나라 사람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원래 우리나라에서 갔으니 ‘우리 것’이라는 식의 주장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혹 그런 견해를 십분 받아들여, 원래 신라에서 넘어갔다는 점은 사실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 무예는 그 순간 우리 무예가 되는 것인가? 1000여 년 전에 일본에 전파되어 그 나라 사람의 몸짓에 맞게 동작이나 박자가 변화가 이루어진 무예가, 사람들이 우리문화와 거리가 있다고 이질감을 계속 느끼는 무예가 과연 우리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떤 무예의 원류가 우리나라임이 확정되면 없던 실력이 생길까?

원류 논쟁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류가 누구냐’가 아니라 ‘누가 더 잘하느냐’이다. 축구 종가는 영국이라고 말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축구라는 단어를 보면 브라질을 떠올리고 브라질 축구를 배우려고 한다. 왜냐하면, 브라질이 영국보다 축구를 더 잘하기 때문이다.

어느 무예를 수련하던지 원류 논쟁에 시간을 쏟기보다, 1초라도 아껴서 한 번이라도 더 수련해, 보다 나은 실력의 무예인이 되는 게 훨씬 가치 있지 않을까.

* 허인욱의 무인이야기는 격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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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참한역사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요 비통한 우리나라 역사의식이요, 일제시대때 얼마나 많은 역사유물이
    사라졌을까 문화,무예의 자료가 그대로 남았다면!!!! 말이 필요있을까 그저 안타까울뿐!!!

    2009-11-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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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기

    일본가라데가 태권도가 되서 우리 민족의 무술이 됫듯이 합기도도 그리 하면 되지.

    2009-11-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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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론

    합기도(합기도라는 고유명사는 일본에서 만들어 진 것이다.)가 신라에서 넘어 갔으므로 한국무술이라는 것은 추정뿐이다. 합기도의 종주국은 일본이며 일본의 무술이다. 아무리 한국에서 합기도를 이리 저리 짜 맞추어도 합기도의 종주는 일본일 뿐이다. 태권도가 가라데의 영향을 받았다고 일본의 무도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2009-11-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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