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사범에서 경당사범 되다
발행일자 : 2003-05-17 00:00:00
송성영/오마이뉴스



그는 번뜩이는 진검을 뽑아들고 대나무를 향해 바람을 갈랐다. 그의 칼바람에 대나무는 창끝처럼 날카롭게 베어졌다.
껑충한 키에 가벼운 몸매, 그가 진검을 휘두를 때는 날렵한 무사가 된다. 하지만 정작 그는 대나무 베기는 고수들의 비범한 칼 솜씨이기보다는 단순히 자신을 다스리는 운동에 불과하다고 말한다.(시민운동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올바른 시민 의식을 갖고 있는 누구든 시민 운동가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나무 베기는 자기 수련을 하는데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대나무 베는 거 별 거 아닙니다. 폼 나 보이지만 낫질 잘하는 사람이 낫 휘두르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낫질하듯 대나무는 누구나 쉽게 벨 수 있습니다. 한번 해보실래요?"
목검에 익숙한 나는 엉겁결에 시퍼렇게 날이 선 진검을 받아들고 대나무를 향해 폼 나게 후려쳤다. 생각보다 쉽게 베어졌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가 벤 것과 사뭇 다르다.
그의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아주 매끈하다. 내가 후려친 대나무는 베다 만 것처럼 어딘가 모르게 엉거주춤하다. 하수와 고수의 차이다.
칼을 내려놓고 있을 때도 그는 고수처럼 빈틈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무술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 등등한 그런 날카로운 모습은 아니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 부드러운 말씨는 유연한 선비를 연상케 한다.
그의 검술은 전통무예 경당(24반 무예로 불리기도 한다). 단단한 것보다도 부드러운 것이 더 강하다고 했던가. 사실 경당에 관해서 그는 아주 순진하리 만큼 단순하고 헐렁한 구석이 더 많은 사람이다.
경당 사범 자격을 갖고 있는 그는 경당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앞에 서면 비좁은 마당이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장소불문에 시도 때도 없다. 아주 어린아이에서부터 밥하다가 나온 아줌마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가 무도인(?)답지 않게 목검을 빼든다.
목검이 없어도 상관없다. 목검처럼 생긴 막대기를 손에 들려주고 들어치기 갈겨치기 날개치기등으로 시작되는 검 기본기를 전수해 준다. 진지하게 민족 정신이 담긴 경당을 얘기해 준다.

칼과 창 쓰는 법, 권법, 말 타고 선보이는 마상 무예 등, 개인 무술을 집대성해 놓은 이 무예도보통지는 조선시대 말까지 관군들을 통해 전수되다가 1907년 구한말 군대 해산이후 그 명맥이 끊겼는데 그것을 1980년대에 들어 다시 복원한 것입니다. 그 당시 고구려 정신을 잇는다는 측면에서 경당(경당은 본래 고구려 때 평민층의 자제들이 글공부와 무술을 익혔던 사립 교육기관이었다)이라고 이름을 지었던 것입니다.
또한 무예도보통지에는 스물 네 가지 무예를 선보이고 있어 24반 무예라고도 하죠. 따라서 경당과 24반 무예는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24반 무예협회 경당라는 명칭을 쓰고 있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후기 때 성황을 이뤘던 민족무예에는 외세에 굴하지 않는 우리 민족의 얼과 정신이 새겨져 있다. 그가 그 맥을 잇고 있는 경당에 매료되어 푹 빠져있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과 연속적으로 맞장을 뜨기도 했던 그가 경당을 접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감옥소에서였다.
공주사대 79학번인 그는 79년 10월 대학 건물 벽에 유신철폐라는 금지된 구호를 페인트로 벽서한 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81년 겨울 금강회 사건(금강회를 이적 단체로...)으로 1년 10개월을 복역하게 된다. 이때 그는 대전교도소에서 경당을 창시한 임동규 선생을 만나게 되고 경당을 맨 처음 접하게 된다.
"제가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시국사범들끼리 낮에 서로 왕래하면서 만날 수 있는 하나의 해방구가 있었습니다. 그 해방구가 잠시동안 있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경당을 배우게 된 것이죠."
통혁당 재건 기도 및 남민전 사건 연루로 2개의 무기징역형 선고를 받고 79년에서 88년까지 10년간 복역했고 2001년에는 방북단 사건으로 또다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던 임동규 선생. 정선원은 86년 전두환 정권의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호헌 철폐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두 번째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거기서 또다시 임동규 선생을 만나게 된다.
교도소에서 사제지간을 맺게 된 정선원은 임동규 선생이 창시한 경당의 첫 번째 제자들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 끝까지 경당 사범이 된 사람은 유일하게 정선원 한 명뿐이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고 21년 만인 2000년 8월에서야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고 지난해 비로소 교사 발령을 받았다. 교사 발령으로 어느 정도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교사 발령을 받던 그해, 아내 최연진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내는 늘 함께 행동했던 가장 든든한 동지였습니다."
공주 집에서 예산중학교를 오가며 교사생활을 해야하고 또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지난 10년 가까이 활동해 왔던 공주사랑시민단체협의회에서 사무처장 일을 맡고 있다.
공주에는 동학농민전쟁의 마지막 싸움터라 할 수 있는 우금티가 있다. 이곳에서 매년 동학농민군 추모제를 열어 오고 있다. 그는 현재 우금티를 중심으로 전쟁을 펼쳤던 동학 농민군들의 흔적을 새롭게 찾아내 성역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반 외세, 자주통일을 말하는 운동가이면서 중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교육자이기도 하다. 민간차원에서 이뤄지고 있는 우금티 성역화 사업 역시 교육적인 차원에서 민족의 바른 정신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민족 정신을 요구하는 요즘 시대에 반 외세를 부르짖었던 동학농민군들의 함성을 되새겨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그에게 있어서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은 우금티 성역화 사업과 더불어 민족 무예 경당을 가르치는 일이다. 그는 동학 농민군에 관련된 곳이나 경당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대덕연구단지에 자리한 원자력연구소에서 경당 동아리를 지도하기도 했던 그는 현재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예산 중학교에 경당 반을 만들어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고 공주대학교에서 매주 금요일 경당모임을 갖고 있다. 이들 경당 모임은 드림위즈 클럽 경당과 함께 하는 공주사람들에서 만나 볼 수 있다.(http://club.dreamwiz.com/kdgoma)
"생활체육 차원에서 학교나 직장에 널리 보급됐으면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딸들에게 전수되는 가전 무예로 발전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그의 자동차에는 늘 100여년 전 동학농민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캠코더와 언제 어디서고 민족무예 경당을 가르칠 수 있는 여러 개의 목검과 진검이 실려 있다.
호신용도 아닌데 그는 무엇 때문에 그 옛날 무사들처럼 꼬박꼬박 진검을 챙기고 다니는 것일까? 사람들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님네들이 화두를 풀기 위해 숨을 고르듯이 그는 먼저 자신을 다 잡아 나가기 위해 칼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미국의 한반도 전쟁론으로 인해 민족의 생존이 위협 당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그는 전통 무예 경당을 통해 나름대로 민족정신이라는 칼날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진검을 움켜쥔 그를 보고 있노라면 일제시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민족을 살리고자 총칼을 들었던 독립운동가들이 떠오른다. 무엇 때문일까?
이 땅에는 여전히 민족 생존에 등 돌리고, 외세에 빌붙어 먹고사는 사람들이 설쳐대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이름의 칼날로 베어져야 할 무리들이 설쳐대고 있다. 그들이 부를 축적하고 있을 때 정선원, 그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또 생활고에 시달려야만 했다.
민주화 운동가로, 혹은 시민운동가로 살면서 그는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한 가정의 남편이며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해왔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생활을 꾸려왔다. 위암으로 사경을 헤매던 아내는 치료비가 없어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세상을 떠났다. 치료비는 고사하고 장례식 비용조차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최근 국가는 민주화 운동으로 두 번씩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던 그에게 명예회복을 해주겠다고 한다. 명예회복은 해주겠지만 그가 민주화 운동의 대가로 얻은 생활고는 해결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경제적인 보상은 단 한푼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