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가 아닌 '한계선 회피'... 태권도는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가?
발행일자 : 2025-11-27 17:29:39
[한혜진 / press@mookas.com]

[한혜진 칼럼] 앞서면 도망가고, 동점이면 자동승… WT 경기 규칙의 허점이 만든 왜곡된 승부 구조

태권도 경기 현장에서 요즘 자주 목격되는 장면이 있다. 점수에서 앞선 선수가 기술을 겨루는 대신 한계선 밖으로 ‘도망가는’ 장면이다.
스포츠는 정정당당해야 한다. 정면승부가 기본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술을 겨루는 모습에서 팬들은 감동을 받는다. 승부의 품격도 그곳에서 나온다. 그러나 요즘 태권도 경기를 보면 그 본질이 흔들리고 있다.
이기고 있는 선수가 승리를 지키기 위해 ‘한계선 도망’을 선택하는 장면이 승리의 공식으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모습이 버젓이 롤모델처럼 소비되면서 어린 선수들까지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재 세계태권도연맹(WT) 경기 방식은 2분 3라운드, 라운드 2선승제다. 한 라운드당 감점 5개를 받으면 ‘감점패’. 그러다 보니 앞선 선수가 마지막 몇 초를 넘기면 된다는 계산이 작동한다. 그 과정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데 있다. 실점 위험이 있는 공방을 피하고 한계선 밖으로 스스로 나가 실점 대신 감점을 받는 전략을 쓴다.
이번 방콕 그랑프리 챌린지에서도 이런 볼썽사나운 장면이 하루에도 여러 번 등장했다. 태권도가 보여줘야 할 박진감 대신, 의도적인 회피 장면이 메인 화면처럼 반복되는 기형적인 풍경이 이어졌다.
A 선수가 5대2로 앞서는 상황. 라운드 종료 9초 전, 공방을 하는 척하다 한계선 밖으로 살짝 넘어가 감점. 5-3. 속개 후 다시 나간다. 5-4. 시간은 이제 1.2초 남았다. 주심의 “계속” 신호에 또 나간다. 5-5. 동점이지만, A는 자동 승리한다. 이겼는데 기술은 없었고, 승리는 있었고, 관중은 실망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현재 WT 규칙에 따르면 동점일 때 회전득점 우위, 머리-몸통-주먹-감점 우선순위를 기준으로 한다. 이마저도 똑같으면, 전자호구 유효타 순으로 승자를 가린다. 감점은 이 기준에서 가장 마지막이다. 즉, 감점을 세 번 받았어도 기술 우세만 앞서면 승리한다.
하지만 감점은 무엇인가. 경기 중 해서는 안 되는 행동에 대해 부과하는 벌점이다. 라운드에서 감점을 5개 받으면 즉시 패배된다. 그런데 동점에서는 그 감점이 사실상 무시된다. 이 모순이 지금의 기형적인 경기 흐름을 만들고 있다. 정정당당하지 않은 승부. 태권도가 선택해서는 안 될 길이다.

2020 도쿄올림픽 준결승을 떠올려보자. 이다빈은 준결승에서 세계 1위 비안카 워크던을 상대로 경기 막판 22-24로 2점차로 뒤져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경기종료 1초 전 극적인 머리 공격이 성공했다. 25-24 대역전. 관중은 기립해 찬사를 보냈다. 그 장면은 지금도 태권도 팬들 사이 레전드로 남아 있다.
또 다른 경기. 앞선 선수가 마지막 점수를 지키겠다고 경기 종료 10여초를 남기고선 계속 한계선 밖으로 벗어나며 감점 4개를 허용했지만, 동점 판정 우위로 이겼다. 이겼다고 환호했지만, 관중석은 냉랭하다. 한 족에서 야유로 가득 찼다.
둘의 차이는 선명하다. 정정당당한 승부와 그렇지 않은 승부. 태권도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WT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내년 1월 1일 적용될 신규 규칙에서는 경기 종료 5~10초 전 고의적으로 한계선을 벗어나면 현재 감점 1점에서 2점으로 상향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 자체는 분명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핵심은 동점 판정 우선순위다. 감점은 경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기술보다 뒤에 놓여서는 안 된다. 감점이 많은 선수는 동점일 때 자동 패배. 이 원칙을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한계선 도망, 고의적인 회전 동작 넘어짐, 비디오판독 남용 등 각종 반칙성 지연 전술이 사라진다.
룰 개정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더 본질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경기 문화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지도자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지도자가 경기장 밖에 서서 "나가! 나가!"라고 지시하는 순간, 태권도는 더 이상 정정당당한 스포츠가 아니다. 그건 편법을 허용하는 문화이고, 그 문화가 쌓이면 스포츠의 매력은 무너진다.
관중은 멋있는 기술을 보고 싶어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선수를 응원하고 싶어 한다. 누가 한계선 밖으로 가장 잘 도망가는지 보려고 경기장을 찾지 않는다. 가뜩이나 태권도는 앞발로만 싸우는 '발펜싱'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재미없다는 이유로 외면받고 있다. 여기에 한계선 도망까지 일상이 되면 태권도는 무슨 경기인가.
태권도가 팬들의 환호를 받으려면 해답은 단순하다. 정정당당한 승부. 기술의 아름다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 룰도 바뀌어야 하고, 판정 기준도 정비되어야 하며, 경기 문화도 달라져야 한다.
한계선 도망으로 얻는 승리는 태권도를 패배시키는 일이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태권도는 더 나은 스포츠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내년 전면 개정될 경기룰을 계기로 태권도다운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되살아나길 기대한다.
[무카스미디어 = 방콕 - 한혜진 기자 ㅣ haeny@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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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 |
| 태권도 경기인 출신의 태권도·무예 전문기자. 이집트 KOICA 국제협력요원으로 태권도 보급에 앞장 섰으며, 20여 년간 65개국 300개 도시 이상을 누비며 현장 중심의 심층 취재를 이어왔다. 다큐멘터리 기획·제작, 대회 중계방송 캐스터, 팟캐스트 진행 등 태권도 콘텐츠를 다각화해 온 전문가로, 현재 무카스미디어 운영과 콘텐츠 제작 및 홍보 마케팅을 하는 (주)무카스플레이온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국기원 선출직 이사(언론분야)와 대학 겸임교수로도 활동하며 태권도 산업과 문화 발전에 힘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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