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술 인물 탐구] 사이고 시로 ⑦편 : 동양일출신문사를 창설하다


  

제국주의 우익활동의 교두보인 동양일출신문사의 창립

동양일출신문사 설립 당시 기념사진 [사진 출처 : 나가사키를 방문한 아이즈 사람들 홈페이지]

메이지 35년(1902년) 1월 1일, "동양일출신문"(東洋日の出新聞)이 10명의 사원들에 의해 창간되었다. ‘스즈키 텐간’(鈴木天眼)이 사장 겸 주필로 활동했지만, 사이고 시로 또한 이 신문사의 창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참여하여, 편집자가 되었다. 스즈키 텐간은 ‘니혼마츠 번사’(二本松藩士)였던 ‘스즈키 슈우’(鈴木習)의 장남으로 게이오 3년(1867년)에 태어났다.

 

그는 일진회를 후원하여 한일병합의 원흉이 되는 코쿠류카이(黑龍會;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과 함께 1894년 갑오농민전쟁 당시 동학당의 전봉준과 접촉하기도 한 텐유쿄(天佑俠; 천우협)에서 활동하기도 했던 만큼, 당시 일본 국수주의 지식인 중 일부였다.

 

스즈키 텐간은 메이지 13년(1880년)에 옛 아이즈 번사였던 ‘쿠사카 요시오’(日下義雄)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친구의 소개로 쿠사카 요시오의 제자가 되고, 메이지 19년(1886년)에 스승 쿠사카 요시오가 나가사키 현령으로 부임하자 스승을 따라서 나가사키로 거주지를 옮겼다. 스즈키 텐간은 고토(五島)의 토미에마치(富江町) 출신인 ‘오코치 타미’(大河内タミ)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니혼마츠 번은 현재 도호쿠 지방에 있었던 31개의 번들에 의한 "오우에츠 렛판 동맹"(奥羽越列藩同盟)에 포함되어 보신전쟁에서는 아이즈 번과 함께 신정부군에 맞서 싸웠다. 니혼마치 번의 "쇼넨타이"(少年隊)는 아이즈 번의 백호대(白虎隊)와 함께 잘 알려져 있다. 니혼마츠 번은 아이즈 번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후쿠시마 현에 있었다. 후쿠시마 현에는 니혼마츠 시(二本松市)가 있다.

 

사이고 시로는 스즈키 텐간과 평생 친구로 절친하게 지냈다. 사이고 시로와 함께 스즈키 텐간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했던 인물이 사이타마 현(埼玉県) 출신의 후쿠시마 쿠마지로였다. 이 인물은 사이고 시로와 함께 강도관에서 유도를 수련했다. 나가사키에 와서는 사이고 시로와 함께 시내에 유도장을 개관했다.

 

후쿠시마 쿠마지로는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에 대만에서 "대만일일신문"(台湾日日新聞)을 창간했었다. 동양일출신문의 창간자 10인 중에는 당시 유명 한학자였던 ‘니와 칸잔’(丹羽翰山)도 있었다.

 

당시 나가사키에는 "나가사키 신보"(長崎新報), "친제이 일보"(鎮西日報), "큐슈 일출 신문"(九州日の出新聞) 등과 같은 신문사가 있었다. 큐슈 일출 신문은 메이지 31년(1898년)에 창간되었는데, 창간 당시 3인의 사장 중 한명이 스즈키 텐간이었다. 하지만 내부 사정으로 스즈키 텐간은 퇴사했고, 메이지 35년(1902년)에 동양일출신문을 창간했다.

 

메이지 44년(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당시에 사이고 시로는 신문 발행인 겸 인쇄인이라고 동양일출신문 1면에 기록되어있다. 10월 10일에 중국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사이고 시로는 "카스가마루"(春日丸)라는 배를 타고 나가사키 항에서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특파원으로 취재하며 16차례나 기사를 보내왔다.

다이쇼 13년(1924년) 8월 11일자 동양일출신문사 신문

최초의 기사는 10월 25일에 작성된 "상하이로부터"(上海より)라는 제목의 기사가 10월 30일자 신문 1면에 실린 것이다.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혁명이 일어나자 상하이 시민들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것으로 묘사되어있다.

 

신해혁명이 성공하면서, 메이지 45년(1912년) 1월 1일에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러나 쑨원은 4월 1일에 임시대총통 직에서 사임하고, 당시 군부 권력자였던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다. 그리고 쑨원은 다이쇼 2년(1913년) 2월 2일, 일본을 방문하였고, 3월 21일에는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여관 "후쿠시마야"(福島屋)에서 머물고, 그 다음날인 3월 22일에 후쿠로마치(袋町)의 청년회관에서 "세계의 평화와 기독교"(世界の平和と基督教)라는 제목의 강연을 진행했다. 이후에는 "훗켄 회관"(福建会館; 현재는 나가사키 시 지정 유형 문화재로 등재되어있다.)에서 중국인 오찬회에 참석하고, 후루카와마치(古川町)에 있었던 스즈키 텐간의 자택을 방문했다.

 

이때 스즈키 텐간 자택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이 남아있는데, 중절모를 쓴 쑨원의 좌우에 텐간 부부내외가 서있었고, 텐간의 옆에 사이고 시로가 위치해있다. 당시 사이고 시로는 47세였다.

쑨원(좌), 스즈키 텐간(중), 사이고 시로(우).

동양일출신문사 옆에는 "타카라야"(寶屋)라는 요정(料亭)이 있었고, 요정의 현관 옆 창고에서는 중국의 혁명을 위한 폭탄제조가 이루어졌다.

 

스즈키 텐간의 남동생, "스즈키 몬이치"(鈴木聞一)는 니혼마츠에서 나가사키로 이동하여 동양일출신문에서 사원으로 재직했다. 쇼와 16년(1941년) 5월 20일자에 출간된 나가사키 일일신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회고를 전했다.

 

“메이지 41년(?); 1908년(?) 여름 쯤에 쑨원 총통이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과 함께 갑자기 나가사키에 방문하여 텐간의 저택을 방문했는데, 그 당시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몰래 운영하던 폭탄제조공장은 아부라야마치(油屋町)의 타카라야 요정의 창고였다. (현재 타츠지로 하시모토 귀족원 의원저; 橋本辰二郎貴族院議員邸)

 

쑨원 선생은 은거생활이 너무 따분하여 몰래 비단으로 된 홑옷을 입고 텐간의 자택으로 놀러왔는데, 쑨원 선생은 중국인 고유의 버릇으로 옷을 걸쳐 입고 와서 몇 번이나 소매치기 위협의 주의를 받았다. 일본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그의 변명을 듣는 것도 아주 재밌었다. 그 위대한 영웅도 움막집에서 지냈으니, 중국인들을 한번쯤 두고봐야할 필요가 있다.”

 

그 창고 움막집은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이었는데, 신문에는 ‘쑨원 총리 은신처는 당시의 타카라야 창고.’라고 소개되어있다.

 

[무카스미디어 = 권석무 객원기자 ㅣ sukmoo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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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무 기자
무카스미디어 MMA, 주짓수, 무예 분야 전문기자.
브라질리언 주짓수, MMA, 극진공수도, 킥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무예 수련.
사람 몸을 공부하기 위해 물리치료학을 전공. 
무예 고문헌 수집 및 번역 복간본 작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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