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섭이 다녔던 '척식대학'은 어떤 대학이었을까?


  

역사속의 태권도근현대사 19편 - 지도관 전상섭 3편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1. 척식대학은 어떤 대학이었을까?

 

김영선 교수는 “동양척식대학”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일본 동양척식대학이란 존재는 없었다. 단지 동양척식회사가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에서 토요(東洋)대학과 타쿠쇼쿠(拓植)대학은 전혀 별개의 대학이었다(김영선 2018) 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진 않는다. 일본의 척식대학(臺灣大學)은 일본 이름으로 다쿠쇼쿠 대학으로 불리운다. 1900년에 가쓰라 다로가 도쿄에 설립한 타이완 협회학교(臺灣協會學)가 그 전신인데 이 학교의 목적은 1895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타이완 섬의 척식(개척/식민)에 종사할 인재를 양성할 것이었다고 한다.

 

1904년에 전문학교로 승격하여 1907년에 동양협회전문학교(東洋協會專門學校), 1915년에 동양협회식민전문학교(東洋協會植民專門學校)로 개칭되었다. 경성에 분교가 있었다.( 경성고등상업학교, 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926년 다쿠쇼쿠 대학(척식대학 臺灣大學), 1946년 고료대학으로 개칭하여 지금까지 일본의 명문대학으로 자리하고 있다. 식민지 전문요원 양성학교를 양성하는 학교로 출발해서 우리나라와 타이완의 식민지 지배에 필요한 척식학(拓殖學)을 주요과정으로 했고 이때문에 천황이 은사금도 내려준 학교였다.(위키백과)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할 목적으로 설치한 식민지 착취기관으로 “동양척식회사법”을 통과시키고 한국정부에 자금을 강제로 합작투자해 일본 농민을 한국에 이주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출처:네이버

1910~1926년 일본인 이민자들에게 다양한 해택을 주어 이중 조선침략에 도움이 될 만한 담당자를 엄선하여 한국으로 보냈다. 이 동양척시회사법을 계기로 일제는 우리에게 엄청난 수탈을 자행했다.(네이버 두산백과)

 

1921년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와 합작해 동아권업공사(東亞勸業公司)를 설립하여, 만주로 이주하는 조선농민의 정착을 후원한다는 명목하에 계획적인 이민사업을 전개하여 철도와 발전소를 건립해 전쟁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을 그대로 들어낸 산물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동양척식대학의 명칭 오류는 1907년에 동양협회전문학교(東洋協會專門學校)에 의해 바꿔 불렀을 수 있는 합리적 의심과 연구를 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션 임파서블 나석주 의사의 폭탄테러 독립투쟁을 아시나요?

 

수탈의 원흉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은 “독립운동가 의열단출신 나석주 의사(1892.2.4. ~ 1926. 12.28)가 폭탄테러를 감행한 곳이다.

 

이 독립투쟁은 마치 “미션임파서블”을 연상케 한다. “나석주 의사”가 일제식민지에 대항했던 독립투쟁은 영화같은 실화이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아일보 1927년 1월 13일자 호외편”

그는 식산은행(殖産銀行)에 들어가 한 개의 폭탄을 던졌지만, 터지지 않았다. 당시 12월 25일 성탄절과 다이쇼(大正) 일왕의 사망으로 3일간 임시공휴일로 다음날은 바쁜 업무들로 폭탄을 던지는 줄도 모르고 모두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와 바로 옆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士) 경성지점에 도착해 옆구리에 끼고 있던 권총을 꺼내 기자와 직원 등을 쏘고 나머지 폭탄을 또다시 투척했다. 하지만 이 역시 폭파되지 않았다. 폭탄을 구입한 날이 6개월이 넘어 뇌관이 녹슬어 불발탄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밖으로 빠져나와 지금의 을지로1가 쪽으로 도망가다 경찰들과 시가 총격전으로 격렬히 저항하다 스스로 최후가 오고 있음을 직감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라는 유언을 그자리에 운집해 있던 군중들을 향해 외치고 잡히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임시정부의 비밀을 누설할까봐 그자리에서 권총으로 자기가 가슴을 겨누고 장렬이 전사한다.(영화보다 더 처절했던 당시를 동아일보 기사 내용을 재구성한 것임)

 

그의 기념터는 서울시 중구 을지로가2가181(외환은행본점 좌측 화단) 세워져 있고,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으로 추서되었다(국사편찬위훤회)

 

(다음 편에서 계속)

1. 조선연무관 권법부의 모체 “지도관”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 관장,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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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인

    누구든 역사를 서술할 때에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이 결부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글이 필자가 어떤 의도(목적, 역사관)를 갖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대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하는 서두 필자주가 해당되겠습니다.
    둘째, 주제에 대한 것입니다. 논의할만한 가치 있는 주제나 연구 문제를 필자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제는 필자가 선택하여 글 머리에 붙인 제목입니다.
    셋째, 글의 논리성 또는 체계성입니다. 특히 ‘역사 글쓰기’란 주제에 관련한 여러 사실적 근거(사료) 중에서 필자가 선택한 것(사료)을 제시(인용)하면서 고찰하는 것입니다. 이 때 선택되는 사료는 필자의 글 쓰는 목적의식이 반영되기 마련입니다, 또한 역사에서 ‘고찰’이란 ‘특정 사실의 판단 여부’와 ‘해석의 문제’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덧붙여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서론과 전제, 본론, 결론의 논리적 절차에 따라 틀이 갖추어지게 됩니다.

    이 글에서 ‘동양척식대학’이란 ‘동양척식회사’가 존재했을 뿐이고 동양대학과 척식대학은 별개의 대학이란 기존의 주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 했습니다.
    그러면 필자는 동양대학과 척식대학이 별개인지 아니면 통합된 동양척식대학이 있었나 하는 문제를 전상섭씨와 관련해서 논의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동양척식회사를 거론하고 그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문제를 제기하고도 그에 대한 결론을 제대로 내리지 않은 것이지요.
    대신 동양척식회사가 식민지 수탈을 하는 관련 내용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조선연무관 권법부 전상섭 선생이 ‘동양척식대학’이 아닌 ‘척식대학’ 또는 ‘동양대학’ 중 어느 대학과 관련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해서 필자가 집중적으로 고찰해야 하는데 논의하는 내용이 ‘5대관 역사’가 아닌 ‘한국 독립운동사’로 옮겨가버린 것이지요

    2021-01-07 12:39:56 수정 삭제 신고

    답글 0
    • 태권사랑

      적극 동감합니다.

      2021-01-22 07:47:32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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