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덕관은 왜 가라테 형을 가르쳤을까?


  

역사속의 태권도역사 "무덕관8편"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가라테의 형의 종류는?

 

황기가 집필한 당수도교본은 1958년 출간 되었다. 이때 우리나라 역사는 어땠을까?

 

국가보안법을 고쳐 지방자치단체장을 선거를 통하지 않고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지방자치법 등을 무리하게 국회에서 통과시켜 1958년 2.4파동을 불러왔다. 이 사건 이후 4.19혁명(1960)의 단초가 되고 만다.(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2019)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경향신문”도 1958년 이때 폐간 시켰다. 이것이 마산 학생들의 시위로 촉발되고1960년 3.15 부정선거로 이어지게 된다.

 

당수도교본(1958)

이에 맞서 강경진압하던 경찰들의 최루탄이 눈에 박힌채 유기되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죽음으로 분노한 시민들이 4.19 혁명으로 결국 이승만 정권은 하야하게 된다.(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2019)

 

사회가 혼란하고 격동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무술계도 1950년대 말 태권도와 공수도등 많은 단체들이 난립한다. 이런 상황에도 무덕관의 황기는 당수도교본을 발간한 것은 의미가 크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58년 당수도교본의 형을 살펴보면 공수도(空手道)형을 그대로 차용 했음을 알수 있다. 당수도교본에 담겨 있는 형의 종류와 이름이 이를 입증해준다.

 

황기는 당수도교본(1958)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사도(斯道)의 수련상의 모체(母體)는 형이니만큼 이것이 가장 중요소가 된다. 형(型)에는 그종류가 허다하다 대체 일반적으로 그 종류가 30종 내외라 할수 있고 그외에 전문적인 입장에서 세밀히 분할하자면 아마 이 수의 배 정도나 될것이다. 그리고 명칭에 대한 사유(事由)에 대하여 현재까지 나의 박약한 견식으로는 전능 전지할 수 없으며 다만 고래에 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온 것을 그대로 칭하기로 한다. 이에 대한 유파 및 기술적 부분이 이론적 논의 기타 어려운 전문적 부문은 후편으로 밀고 우선 책에 편입할 종류는....... 

(당수도교본 황기 1958)

 

이 교본에 수록된 것은 일본의 가라테가 아니라 원류는 중국의 당수(唐手)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기한 것이다.

당수도 교본 형의 목차

 

 

 

위의 사진은  당수도교본의 목차를 살펴본 것이다. 표에서도 알수 있듯이 일본의 가라테 형이 대부분이며 특이한 것은 소림장권과 태극권(太極拳)이 있는데 중국의 대표적인 유파들의 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중국무술을 수련하였거나 연구했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가진다. 

 

당시 서울대학교 나현성 교수의 부탁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변역하게 되고,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무술관이 생기고 중국무술과 가라테의 형식에서 벗어나 차별두기 위해 지금의 수박도 육로1단(두문형), 육로2단(중절형), 육로3단(포월형) 육로4단(양편형), 육로5단(살추형), 육로6단(충로형)가 개발되고 무덕관만의 독특하고 자체적인 수련형식으로 독자적인 행보를 추구했고 한다.

 

이외에도 화선형,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칠성형” (1~7로)가 있다.

필자는 당수(唐手)와 가라(空手-일본 발음으로는 둘다 “가라”이다)의 관계를 좀더 심도있게 추적해 공수도(空手道)의 원류는 오키나와에서 왔음을 주장할 것이다.

관번 1번 김은창, 2번 김용덕, 3번 유화영, 4번 남상현 등이 있고 중국무술을 더 배우겠다고 오원영, 함재성, 이상 초등이 그만두었고 홍성균, 신대영, 윤재철, 김욱, 김동한 등을 도중에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무덕관은 통합하여야 한다!, 서상렬 2020)

 

1958년 11월 대한민국 최초 당수도 국제 친선 연무대회가 개최되었다. 1960년 6월 30일 사단법인 대한수박도회를 문교부에 등록 인가를 받았다. 이때가 4.19혁명이 있은지 2개월이 지났을 때다.


1962년 한국 당수도국제대회를 서울에서 개최 일본, 중국, 필리핀, 한국등이 아세아당수도연맹을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황기관장이 선출되었고 같은 해(1962년)미국, 오하이오주, 펜실바니아주, 조지아주, 캘리포니아주, 멕시코, 등지에 무덕관지관이 설치되었다.(서상렬 2020)

 

1961년 5월 6일 전일본공수도연맹을 초청, 광화문 시공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당수도 경연대회 개최했다. 이때 일본측 단장으로 방안한 “곤도고이찌”씨는 일본공수도계의 유명한 인물로 한무관을 창설한 윤쾌병 관장의 일본 대학 선후배사이 였다.(서상렬 2020)

 

국제당수도대회최초(1958)

현재 무덕관은 1965년 3월16일 무덕관의 제자 홍종수를 비롯한 통합파가 이끌었던 태권도계의 무덕관과 당시 황기관장이 이끄는 본관인 “수박도 무덕관”(1950년 당시 당수도무덕관)으로 양분되어 있다.


현재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있는 “수박도무덕관”은 태권도와는 전혀 다른 기술체계로 발전되었고 1998년 5월 서울 용산구 남영동 중앙도장을 이전하고 개관하여 지금까지 수련을 이어 가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수박도무덕관”의 영향력이 미약한 편에 있다.

 

세계적으로는 많은 지부들이 아직까지 건제하고 2002년 황기 관장 사후 아들인 황현철(황진문은 집에서 부르던 이름)이 관장직을 승계해서 독특한 유파로 남을 만큼 활발하게 활동중이다.

 

통합과정에서 통합에 반대한 황기파와 통합에 찬성한 홍종수 및 일부 제자들의 통합파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나의 “한국 현대사”에서 유시민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일본정부와 다수의 일본국민은 독도를 조선의 영토로 표기된 러,일전쟁 이전의 고지도(古地圖)를 애써 외면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거짓이며 사실을 인정한다해도 민간업자들이 운영한 것이지 정부가 개입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본국민들에게 수치시러운 악행을 애써 부정하고 감추려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 국민들은 어떠한가? 독도를 대한민국 영토라 국건히 여기고 일본위안부와 강제노둥착취에 대해 분노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우리와 아무상관도 없는 배트남전쟁 파명이 도덕적으로 정당한지 토론하지 않으려하고 국군이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 대해서는 반성하라고 하지만 우리들의 잘못된 역사를 반성은 완강히 거부한다.(나의 한국현대사 유시민 2018)

 

우리는 어떠한가?

무덕관 통합파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기 전 황기 관장은 왜 통합에 반대했는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어야 한다. 또 무덕관 창시자인 황기 관장을 해임했던 제자들의 집단 행동이 과연 정당했는지에 대한 논의도 심도있게 이루어져야 한다.

 

통합을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노력으로 태권도는 지금 전세계에 무도스포츠로 우뚝 서 있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할 위대한 업적이었다.

 

하지만, 한 유파(流派)의 창시자인 스승에 대한 집단행동은 태권도가 성공했다고 정당화 될수 있는 것인지 전세계 태권도인들에게 묻고 싶다.

 

지난 날의 역사를 통해 오늘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우리 미래도 알지 못한다. 이것이 역사를 배우는 우리의 자세이다.

 

- "창설자 황기의 무덕관 끝" -

 

다음호에 계속.....

1. 송무관의 창설

2. 조선 최고의 무도인 윤병인을 알고 계십니까?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장 관장 &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엄재영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가르친다.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현)2020년 대한민국 품새 국가대표
현)국기원 강사 / KTA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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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술

    劍道 / Kendo

    검술을 수련하기 위한 연습 방법인 격검(撃剣)을 경기 스포츠화시킨 일본 무술.
    19세기 일본은 한참 무술교육을 장려하여서 1895년 검술, 궁도 등의 일본 전통 무술을 통괄하는 단체로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德會)가 창립되고, 학교에서 격검이 정식 교과로 채용되었다. 1906년 대일본무덕회에서 무덕회류검술형(武德會流劍術形)을 제정하고, 1912년에는 경시청류의 영향을 받아 대도(大刀) 7본과 소도(小刀) 3본인 대일본제국검도형(大日本帝國劍道形)을 만들었다. 이는 2차 대전후 전검련이 발족하면서 일본검도형(日本剣道形), 간략히 검도형으로 칭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검도의 본'이라고 부른다. 이 본은 몇몇 유파의 검호들이 모여서 중등학교 교육용으로 새로운 형을 만든 것이고, 훈련과 대결 등은 직심영류, 나카니시파 일도류 등에 있던 죽도 훈련법과 당시 유행하던 격검이 도입된 것이다.[2]사람에 따라서는 치바 슈사쿠의 북진일도류 등을 직접적인 모태로 보는 경우도 있다.

    대일본무덕회는 1920년 여태까지 검술이라고 불리던 것을 검도(剣道)로 이름을 고친다. 유술(柔術)을 유도(柔道)로 변화시킨 강도관(講道館)을 따라한 것인데, 이전에도 검술을 종종 검도라고 부르긴 했으나, 이토록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대일본무덕회 때문이다.

    메이지 정부도 그전까지 사민평등을 내세우며 폐도령을 내리고 사족을 때려잡았지만, 전쟁대비를 위해 서민 학생이 쉽게 익히면서 동시에 무사도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검도 보급을 장려했다. 때문에 1945년 패전 후 미군 점령기간 동안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 : General Headquarters)는 대일본무덕회를 해체하고 검도를 포함한 무도 금지령을 내린다.

    전후 미군 점령 기간 동안, 검도 애호가들은 어떻게든 검도를 부활시키고 싶어서 여러가지 수를 내어본다. 1950년에는 무도로서의 검도가 아닌 스포츠로서의 성격을 강조해서 전일본요경기연맹을 창립하는데, 요경기(撓競技)라는 것은 펜싱마스크 비슷하게 만든 방어구와 죽도를 사용하는 검도 비슷한 스포츠였다. 즉 검도가 아니라 펜싱 비슷한 스포츠라고 변명하기 위해서 검도의 경기적 측면만 강조한 변형이다.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미군의 점령이 끝나고 검도 금지령도 무효화된다. 1952년 검도연맹이 설립되면서 검도가 부활했고, 1954년에는 요경기연맹과 검도연맹이 합쳐져 전일본검도연맹(全日本剣道連盟, 줄여 전검련)이 된다. 전검련은 전쟁후 민주화의 흐름에 따라 과거 전쟁수행을 위한 무사도 정신을 강조하던 잔재를 없애면서 검도를 민주적인 대중 스포츠로 만들고자 하였다. 다만 이후 무도적 성격도 강조되면서 검도는 스포츠인가 무도인가 하는 논쟁이 생기게 되었다.

    1970년에는 국제검도연맹(FIK : International Kendo Federation 또는 IKF)이 세워지는데, 각 국가별 검도 기구를 통괄하는 세계기구로서 3년마다 세계 검도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IOC(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 국제올림픽위원회) 공인 단체인 GAISF(국제경기연맹연합)에 가맹해있으며, 검도, 거합, 장도를 세계에 보급하고 IOC 승인 국제 경기단체가 되어 검도의 올림픽 경기화를 꾀하고 있다. 다만 전검련은 검도의 정식종목화에는 반대하고 있어서 이 부분의 노선은 서로 다르다. 일본 전검련과 대한검도회 모두 국제검도연맹 소속이다.

    참고로 일본에 '검도'라는 명칭을 쓰는 단체가 전검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검도협회(日本剣道協会-도장 5개의 작은 단체이다. 단 나카야마 하쿠도는 천재 검객으로 유명하다.)는 스포츠화된 전검련과 다른의견을 가진 협회인데, 죽도 공격뿐만 아니라 몸싸움 격투와 다리걸기도 인정한다. 나카야마 하쿠도를 계보로 신도무념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스타일이 상당히 과격하다. 그 밖에도 신켄도 등이 있다.
    2.1. 어원[편집]

    대한검도회에서는 "검술을 가리키는 다른 단어. 검도(劍道)라는 단어는 중국한서예문지(中國漢書藝文志)에 '검도삼십팔편(劍道三十八篇)', '수박육편(手搏六篇)'이란 최초의 표현이 있다. 즉, 일본에서 기원한 단어가 아니며, 한자 문화권의 공통된 표현이다." 라고 주장 하지만, 잘못되었다.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 한중일의 고서나 문학작품, 사기 등을 통틀어도 검도라는 표현을 쓴 예는 저 한 번 뿐이고,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의 무술 명칭 끝에 도(道)를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이러한 용례를 최초로 사용하고 정립한 것은 일본에서 가노 지고로의 유도가 시초이고, 검도 역시 일본무술이기 때문에 이 흐름에 따랐다.

    한국에서는 검도를 대한검도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다른 검도 단체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쓰이는 표현으로서, 무술 명칭은 그냥 '검도'이고 단체 명칭은 '대한검도회'이다.

    2020-09-12 03:54:32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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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손무예

    현재 한국에서 역사적 근거가 명확한 검술은 정조 때 편찬한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검법 뿐이다. 전쟁에서는 화포술과 궁술이 발전한데 비해 검술은 관심이 적었다. 물론 총이 나오고서도 동서막론하고 백병전이 아직 중요했고, 임진왜란 때 백병전에서 많은 피해를 보았던 조선은 중국군이나 항왜들을 통해 검술을 받아들이려 굉장히 노력했고 전후에는 선조에서 정조때까지 무예제보, 무예제보 번역속집, 무예신보 그리고 무예도보통지등의 무술서들을 편찬하면서 왕이나 신료들이 직접 무예를 장려하였다. 하지만 구한말 구식 군인 제도가 폐지되면서 이러한 무예들의 공식적인 전승이 끊기고 일제강점기 등 근현대를 거치며 검술은 커녕 마상재로 이름높던 말타기부터 시작해 왠만한 무예들은 대부분 기록 및 관련 유물로나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실정이다.[3]

    즉, 한반도에서도 자생적인 검술이 당연히 있었지만, 현대에 대한검도회를 통해 보급되는 '검도'는 일본 무술이다.

    1896년 경무청에서 경찰훈련용으로 격검 도구를 구입하고 훈련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이때부터를 한국 검도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1908년 경무청 주관으로 한일 양국 순사격검시합을 개최하기도 했다. 학교 검도의 시초는 1916년 사립오성학교에서 격검 시설을 갖추어 일반청년층에 지도한 것이 최초이고, 사설 도장은 1921년 조선무도관에서 가르친 것이 최초다. 일제강점기 동안에 중학교 체육 종목으로 검도가 채택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5년 광복 후 검도는 일재의 잔재로 인식되어 상당히 쇠퇴했다. 이에 검도계의 높으신 분들의 모임 재경유단자회를 1948년 서울에서 개최, 이때 대한검사회(大韓劍士會)를 설립한다. 대한검사회를 바탕으로 1953년 대한검도회(大韓劍道會)를 창립하고 대한체육회에 가입한 것이 대한검도회의 시작이다.

    대한검도회는 1970년 국제검도연맹(I.K.F)의 창립과 동시에 회원국이 되고 일본에서 열린 제1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도 참가했다. 1994년에는 대한체육회 산하단체 중 제일 먼저 사단법인으로 전환하였다.

    즉 한국에서 검도의 시작은 구한말과 일본 식민지기에 일본에서 검도를 배운 사람들[4]로 부터고, 일본 검도를 따르고 있다. 일본 관서대학 출신, 오사카 부 검도부에서 활약하다가 경기도 경찰국 도조교로 임명된 서정학 선생, 도쿄농대에서 보성전문학교를 거쳐 경기고보 교사였던 이종구 선생, 1941년까지 연희전문학교에서 교수로 있었던 다카노 사사부로의 수도학원을 필한 조선무도관의 장인 강낙원 선생, 일본 후쿠오카 현에서 검도수업을 하다가 귀국 후 검도를 위하여 경찰계에 몸담고 있던 김영달 선생, 일제부터 경찰 검도계에서 활약하던 호익룡 선생. 상당수가 일본에서 검도를 배운 사람이거나 일제강점기 경찰 출신이다.

    한국의 반일 정서 때문에 이전까지는 일본을 입에 담지 않고 조용히 묻어가며 지냈었다. 그러나 90년대 초 해동검도와의 분쟁을 겪고, 또 대한검도회의 창립 세대가 교체되었으며, 일본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쫓겨나면서 한국형 검도파가 대세를 잡았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일본 검도와 다른 독자성을 띄려고 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국내 룰에서 여러가지 규정의 변화를 주고[5], 요판 도복을 금지하고 호구도 개량해보며[6], 조선의 고유 검술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한국 검도에 대한 고유 역사를 만들고[7] 조선세법과 본국검법 같은 커리큘럼을 도입하고 있다. 문제는 조선세법이나 본국검법은 일본검도와는 별개의 검술이다. 이 때문인지 이미 해외에서는 한국 출신 검도인들이 차린 검도 도장은 kumdo dojang이라고 하고, 한국계가 아니면 kendo dojo라고 하여 둘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을 지경이다. [8]

    하지만 어쨌던 다 같은 검도다. 대한검도회는 전검련과 나란히 국제검도연맹에 최초로 가입한 꽤나 원로 단체이다. 다만 국제 무대에서는 룰을 준수하면서 한국에서는 독자행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검도같이 내셔널리티가 강한 무도에서 이런 행동은 좀 미묘하다. 이러한 kumdo 명칭, 요판 도복 금지, 청백기 사용 같은 독자 행보로 대한검도회와 국제검도연맹과의 분쟁이 있었으나 산하 단체 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한검도회의 행보를 묵인하는 상태다. 과거 한국 내 가라테 단체를 대거 흡수하고 올림픽 종목 후 입지를 굳힌 태권도의 경우를 들며 독자 명칭 고수와 올림픽 종목화에 적극적인 한국 검도(kumdo) 측이 일본 켄도(kendo)를 장악할 지 모른다는 음모론스러운 우려도 종종 일본 내에 있는 모양이다. 실제로 대한검도회의 회장이자 국제검도연맹의 부회장인 이종림은 '검도의 기원은 한국이다'라고 명확히 하고 있는 상황

    2020-09-12 03:50:17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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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

    해동검도→일본 켄도형.기천문.심검도.혼합
    무예도보통지전통성 세탁

    2020-09-12 03:46:58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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