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영의 태권도이야기] 일제 강점기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운 철도부설권의 비밀


  

[역사속의 태권도역사 - 5편] "무덕관"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무덕관 하면 철도국(운수부) 도장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철도'와 관계가 깊다. 해방 전.후 철도는 무덕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여기서 잠깐, 격동의 한국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② 일제 강점기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운 철도부설권의 비밀

1899년 한국 철도는 처음으로 경인선 구간이 일본 선진 기술로 개통되었다. 조선 근대화를 위한 일본 정책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중일전쟁(1937) 등으로 제국주의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군수품을 만주로 수송하기 위해 철도가 필요했다.

 

우리 조선의 국토를 종단으로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면 북한을 지나 남만주를 거쳐 시베리아 철도와 연결할 수 있다는 일본의 생각은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베리아 철도 길이는 무려 9천334㎞나 된다. 지구 1/4이나 되는 엄청난 길이다. 이 철도는 당시 청나라 땅 만주를 둘러가게 되어 있었다. 러-일 전쟁이후 힘이 없던 청나라에게 철도가 지나가는 땅을 할양받아 건설었다.

 

국토해양부 자료

 

청.일전쟁(1894년)과 러일전쟁(1904)이 일본 승리로 돌아가고 지정학적으로 조선은 만주를 종단할 수 있는 중심에 있었기에 섬나라인 일본은 조선을 관통하여 만주까지 진출하는 연결통로 역할에 우리 조선이 절실히 필요했다.

 

일본은 대동아 신질서 건설을 국책요강으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앞세운 제국주의 식민지배 야욕은 이 철도를 통해 더욱 가속화 될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선 국토를 종단하는 경의선 철도건설을 통해 전쟁군수물자를 만주로 수송하게 된다.(이상용외 1명 한국철도학회 논문집 18권2호 2015)

 

일본은 130년이 넘는 철도역사를 갖고 있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로 빠르게 진화했던 당시 철도가 교통수단으로 많이 상용되었다.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1895)에서 식민지로 할양되었던 타이완에서의 철도건설모델을 우리 조선에도 비슷하게 적용하여 철도가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등이 건설된다.(이상용외 1명 한국철도학회 논문집 18권 2호 2015)

 

일본, 한국, 만주를 연결하는 철도건설을 통해 대륙의 진출을 꾀했고 특히 남만주 철도는 군수품 수송에 매우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이 과정에서 철도건설 투입되었던 노동자들의 강제노역과 끊임없는 일본의 수탈은 우리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어찌되건 우리의 근대화도 이 철도를 통해 많은 변화가 생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 침략을 노골화하여 “을사늑약”(1905)을 강제체결하고 경인철도와 경부철도, 경의선 건설과정에서도 군사력을 앞세워 자국의 이익을 강제하였던 일본은 이제 더 이상 숨기거나 주저할 것이 없었다.(일제강점기 철도종사원 양성교육과 철도도서관에 관한 연구 배은선 2017)

 

이 당시 우리나라 철도국조직을 보면 총독부소속으로 철도기술자, 관료들이 많았고 일본의 철도지도자들은 제국의 국가로 넓혀야 하기 때문에 정치가나 관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조선의 철도관련 종사자들은 군수품을 운반하는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무나 선발 할 수 는 없었을 것이다. 이 말은 철도국 입사는 철저한 검증과 시험을 통해 시행되고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말하면 일반 노동자 보다는 학력이 더 높은 사람이 철도국에 배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7년 황기가 남만주(南滿洲) 철도국에 근무했다는 것은 황기씨도 결국 서민이나 평범한 흙수저가 아닌 신분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③ 황기가 철도국에 입사할 당시 우리 역사는 어땠을까?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 시켜 서로 싸우게 하는 “만보산사건”을 조작하고(1931) 그로부터 2개월 뒤 만주사변을 이르켜 만주국을 세우고 이때부터 남만주 철도를 대륙에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1930년대에는 그동안 식민지에 저항했던 지식인들이나 사회지도층들이 친일파로 돌아서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제국주의 국가건설과 일본이 일으킨 전쟁들이 그들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했기때문이다.(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2016)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일본인만으로 전쟁을 감당할 수없어 우리나라의 청년이나 노동자들을 징용하거나 징병하는 정책을 추진해야했다. 무기사용법을 알려주면 누구를 공격할 줄 몰라 잘못하면 일본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이 될수도 있어서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민족정신을 없에는 민족말살 정책의 추진배경이다.

 

이때 그 유명한 일본인과 조선인은 한몸이라는 “내선일체”사상,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이다. 우리의 국어를 학교에서 선택과목으로 바뀌고 우리의 성을 개명하는 '창씨 개명'도 하는 등 전쟁으로 끌고 가기 위한 갖은 수단을 다 사용했다.

 

특히 천도교, 기독교, 유교, 불교 등 일부 종교단체들도 일본을 찬양했는데 1937년 일본군을 위문하는 시국행사에 천도교도 청년단이 앞장서 참여했다.(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2016)

 

일본은 점점 전쟁에 미쳐가고 있었다. 전쟁을 한군데를 집중하는것고 승리를 장담할 수없는데 러시아, 미국등 전쟁을 하기위해 준비하는등 걷잡을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런 격량의 역사속에 황기는 철도국을 발판삼아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무덕관(철도국 운수부도장)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수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1. 무덕관 창설 논쟁?.........................

2. 화수도와 당수도의 명칭에 관해서....................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 관장,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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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영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가르친다.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현)2020년 대한민국 품새 국가대표
현)국기원 강사 / KTA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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