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영의 태권도 이야기] 쇼토칸 가라테의 탄생 배경은?


  

역사속의 태권도역사 "3편"

● 일본의 류큐왕국(현재 오키나와) 침략!

일본이 1895년 류큐왕국을 침략했다. 오키나와를 일본 제국의 47번 유구로 일본에 합병시켰다. 오키나와섬이 일본 행정 구역으로 편입됨으로서 가라테(空手道)는 새로운 발전을 모색할 수 있는 근대화를 맞이한다(송남정, 2011, 양진방, 2015).

 

“명치시대(明治時代1868∼1957) 오키나와 무사 집안 태생의 후나고시 기친(富名腰義珍)에 의해 처음으로 일본 본토에 가라테(空手道)가 소개되었다.

근대 가라테 아버지로 추앙받는 후나고시기친

일본은 통치수단으로 무사들을 제외하고 평민들이나 승들은 무기를 만들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일명 ”카타나가리(刀狩)“를 정책을 오끼나와에 전면 시행한다.

이때 발전한 것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맨손권법 당수(唐手)이고 이 당수가 발전되어 가라테가 되는 밑거름이 된다.(엄재영 2015 )

 

메이지시대에는 각 분파에서 각자 독특한 가라테(空手道)의 카타(型)를 익히고 배웠는데 마츠무라 쇼곤이 처음으로 몇 개의 카타(型)에 변화를 시도했다.(문화체육광관부, 2012)

 

# 평안형 개발과 학교체육

 

본격적인 평안형 개발은 1905년 이토스 야스츠네(絲州安恒, 18301~1915)가 오키나와 현 제1중학교 및 오키나와 사범학교 체육과에 채용되면서 부터이다. 

 

류큐왕국의 왕족무술 교관이었던 그는 당수(唐手)의 비급과 기술을 존속, 전파하고 싶어 했는데 고류(古流)의 형을 바탕으로 어려운 무술동작에서 학생체육으로 배우기 쉽도록 기존의 급소 공격, 관절꺾기 등과 같은 위험한 기술들을 제외시키면서(김태양, 2011; 이항택, 2008; 정현도, 2002) 평안(平安) 1~5단 형을 청소년들의 체육활동 일환으로 창안해 낸다.

 

그리고 그의 학교 정식 체육과목으로 지정되어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배울 수 있게 정책을 펼쳐 나갔기 때문에 평안형(平安型)을 오키나와에 정착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어째든 이토스 야스츠네가 창안해 낸 카타 평안형은 무술에서 체육적 성격으로 변화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엄재영 2015 )

 

# 평안형을 배우기 전.... 초보자가 배우는 태극형

 

평안(平安) 형(型)의 구성은 가라테(空手道)에서 먼저 공격하는 선수는 없다! 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처음 동작이 꼭 막기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먼저 공격하지 않는 정도(正道)의 정신표방하고 있다.

 

기본적인 동작이 좌, 우가 대칭되고 총 동작수가 모두 20~22동작으로 이루어져 있어 초보자들이 외우기가 쉽고 단계적인 실행으로 본인이 혼자서도 수련을 하여 수련의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한다(盧初雄, 2006)

 

그리고 평안(平安)을 배우기전에 가라테를 시작하는 초보자는 태극(太極)이라는 입문 형 태극 1~3형(型)을 먼저 배우게 된다.

 

국기원 태권도연구 제5권 제2호 최초 태권도교본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평안은 “이토스 야스츠네가 당시 청소년 학교 체육의 일환으로 공상군(公相君) 형을 기초로 창작한 초보자용 형이다. 라고 되어 있다.

 

육군사관학교 교본의 1959년 판본과 1962년 판본(서민학, 2007)에 실린 목차 내용을 비교해볼 때 전체적으로 개정된 부분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문헌과 논문의 인용으로 볼 때 평안형(平安)을 배우기 전 태극(太極) 1~3형 을 기초 형(型)으로 배웠으며 어느 정도 숙련이 되면 카타(型) 평안(平安)1~5단을 습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모두를 합치면 8개 태권도 유급자 태극1~8장과 똑같다. 기간도장 창시자들은 가라테의 기술 체계를 배운 것이 온전히 일본의 고유한 형이 아니라 오끼나와 형에서 왔음을 짐작해 한다.

1944년 당시 쉽게 도장을 낼 수 있었다....?

 

어찌됐건, 막강한 권력을 갖은 당시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노부유끼는 일본 거주시절부터 아보회라는 권력계통의 모임의 회원이었던 이원국씨와 각별한 사이였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전근하게 된 이원국씨가 “일한친선”을 내세워 가라테를 가르친다고 했다.

 

아베노부유끼는 싸움을 가르친다는 근거를 들어 반대했다. 그렇지만 조선에는 일-조친선협회도 있고, 한국 젊은이들도 일본을 위해 군대를 가는데 무술교육에 차별이 있어야 된다고 설득했다. 모든 사고와 책임을 진다는 서약아래 1944년 9월 서대문구 옥천동 영신학교 강당을 빌려 우리나라 최초로 당수도 청도관이라는 명칭으로 개관하게 되었다.(안근아, 이재봉, 안용규 2004, 대한민국 태권도 오천년사 2008, 서성원2003, 강원식 남은숙 1996)

 

하지만, 1944년에는 수련생 배출하지 못했고 임의적인 가르침에 머물러 실질적인 개관으로 보기엔 힘들다는 새로운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나왔다.(김영선 2019) 명칭을 당수도라고 했지만 쇼토칸가라테의 기술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여 사실상 가라테의 기술을 가르쳤다. 1968년 집필된 이원국의 “태권도교범” 목차를 보면 모두 가라테의 카타임을 정확히 알수 있다.  

태권도교법(1969)

1945, 1946년 시천교당 창립설이 있는데 이 개관설이 설득력이 있고 송무관 창시자 노병직과 지도관 이종우의 증언이 일치하며 역사사료로 적합한 사진에도 이 시기와 연관되어 있다.

 

역사속의 “시천교당”은 어떤 곳인가?

 

여기서 “사천교당”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사천교은 어떤 단체고 무엇을 하는 곳이었을까?

 

현재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인 천도교 중앙대교당이다. 현대의 조선총독부와 더불어 서울의 3대 건축물로 유명한 건물이기도 하다.

 

시천교는 1906년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서 이용구가 창립된 동학계 종교이다. 이용구는 일찍부터 동학에 가입, 일제강점기 3,1만세운동의 주역인 천도교인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최시형(崔時亨)의 제자가 되어 천도교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진보회, 일진회(一進會)를 조직, 친일적노선을 걷게 되자 천도교로부터 출교를 당했고 1906년 시천교를 창시한다.(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따지고 보면 시천교는 친일파 쪽에 가까운 단체고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이원국씨에게는 시천교당을 빌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원국씨는 일본에서 쇼토칸가라테를 배워와 청도관 관원들과 6.25 동란 때 붉은 완장을 차고 청도관으로 쓰고 다니던 시천교당 건물옥상에 북한 인민기를 걸어 자신은 물론 당시 청도관이었던 여러 제자들을 끌어드려 북한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밀항했다는 주장도 있고, 그 이후 1963년 사실을 은페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했다는 설은 일본에서 함께 수련했던 송무관 노병직씨의 주장도 있다.(무카스, 2015)

 

그의 친일파적 행각은 최홍희(1997)의 자서전에서도 기술되어 있는데 이원국은(일제시절) 고등계형사(독립운동을 하는 인물들을 잡아들이는 종로경찰서의 부서)를 했기 때문에 해방직후 “반민특위(반민족특별위원회)에 잡혀 들어갔다가 풀려 나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그의 주장일뿐이다.

 

이처럼 그의 이력과 해방이후의 활동 그리고 그의 학력 등을 종합해 볼때 이원국씨는 일반 노동자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청도관 개관은 일제강점기에 우리 태권도계의 암울했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청도관은 태권도가 세계에 우뚝 설수 있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태권도계의 걸출한 인물들을 다수 배출해 냈고 그 역사적 업적의 시초는 이원국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그의 제자인 엄운규는 청도관을 오늘날까지 위상을 높이는데 일등공신으로 수많은 청도관 제자들이 현재 태권도계에서 많은 역할들을 하고 있다.

 

지난 날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고민하면서 오늘날의 현상 설명해야 한다. 청도관 개관은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기에 일어났다고 봤을 때 주권을 잃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태권도 종주국으로써 태권도에 대한 위상을 잃게 되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지 대비해 볼만하다.

 

다음 목차는........

1. 무덕관 개관의 비밀?

2. 무덕관과 일제 강점기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운 철도부설권의 비밀!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 

 

 

[무카스미디어 =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장 관장 &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엄재영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대한태권도협회 이사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11)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20)
아시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금메달(2022)
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태권도역사 #역사이야기 #태권도사 #엄재영 #청도관 #당수도 #오키나와 #가라테 #류큐왕국 #명치시대 #후나코시 기니치 #쇼우토칸 #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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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예사랑

    오피니언 리더로 본인의 지식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으시다면 정말로 다시 한번 깊이 있는 고민을 부탁드립니다.

    2020-07-17 11:56:00 수정 삭제 신고

    답글 0
    • 무술.무도역사

      오피니언 리더?쉬운말로 한글쓰자 여론지도자
      좋은정보다 더 이상 고민? 사실적가치 이것이
      무술.무도사랑이다
      진정한 공부입니다 정직한 역사 지식입니다

      2020-07-20 02:38:20 수정 삭제 신고

      0
  • 기록하여 기억하다

    경제침략의 주범·전범, 아베 가문

    아베의 가문은 한마디로 ‘침략의 가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친손자가 현재의 일본 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하면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때리기도했다.
    이자는,일본이항복하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한국을 떠나는데, 그때 남긴 가증스러운 말이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일제강점기)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2020-07-15 11:05: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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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썩어가고있는 전통무예현주소 태권소년

    역사는 멀고 돈은 가까운 전통무예

    자작나무숲
    댓글수5 공감수5

    쌀딩크 박항서 축구대표팀 감독이 맹활약하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전통의상인 아오자이다. 하지만 사실 아아자이는 만주족 전통의상인 치파오 에서 유래했고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갖춘 건 프랑스 식민지 시절이다. 이런 얘길 들으면 어떤 분들은 대뜸 ‘아오자이가 알고보니 전통의상이 아니고 수입품이구나’이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수백년 역사를 갖지 못했다고 아오자이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강조하는 한국에서 전통은 힘이 세다. 전통무예는 뭔가 심오한 한민족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 같은 느낌까지 준다. 그러다 보니 전통무예 계승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최소 수백년 심지어 고구려 신라 백제까지 줄을 대는 과시 경쟁을 벌인다. 하지만 한국을 대표하는 무예인 태권도가 해방 이후 창시된 현대무술이라거나 가라테 등 기존에 존재하던 여러 무예의 영향을 다양하게 받았다고 해서 덜 위대해지는 건 전혀 없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전통무예 기준은 3대 이상의 계승체계와 명백한 전통 내용’이다. 결국 한국에서 전통무예는 국궁 씨름 택견 셋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전통무예 지원을 한다면 이 기준에 따라 전통무예 여부를 가리고 집행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국회가 2008년 전통무예진흥법을 제정하고 정부가 전통무예를 진흥한다고 하면서 전통은 간 데 없고 이권만 난립하고 있다.

    조선 정조 때 발간한 무예도보통지 에 기반한 무예24기 수련자이자 국내 유일한 무예사 박사인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은 전통무예 단체를 같이 만들어서 문화체육관광부에 신청하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받았다 고 증언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무예 쪽이 가뜩이나 복잡한 곳이었는데 전통무예진흥법 제정 후 단체 난립과 이전투구가 더 악화됐다. 전통무예 분야의 다른 관계자는 국내에서 많을 때는 한 달에 한두 개씩 새로운 무예단체들이 생겨나고 협회 이름만 바꿔 승단 심사비만 챙기는 곳도 허다하다 고 전했다.

    국궁 시범을 보이는 최형국 전통무예연구소장. 그는 무예24기를 수십년째 연구하고 수련해온 무예사 전문가이지만 전통무예 가 남발되는 세대를 우려한다.

    이는 문체부가 14일 발표한 전통무예진흥 기본계획에 포함된 실태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각종 연맹 협회만 현재 231개나 된다. 합기도는 관련 단체가 15개 해동검도도 9개다. 소속 도장 하나 없이 지부만 있는 무늬만 연맹·협회도 적잖이 눈에 띈다. 대구에 도장 하나만 있는데도 명칭은 국제 연맹 인 무예 단체부터 배출 지도자 18명에 회원 60명인 단체가 세계 연합 과 같은 간판을 내건다. 이렇다 보니 전국에 1만 6312개나 된다는 도장이 제 구실을 하는 곳인지 의심이 들지 않을수가 없다.

    전통무예 지원을 담당하는 문체부도 골치가 아프다. 문체부 관계자는 “명확한 지원 기준도, 지원 대상을 선정하기도 힘들다 며 털어놨다. 문체부 책임도 적지 않다. 전통무예 지원 기준을 창시된 지 최소 10년 이상’으로 하다 보니 15년전 황학정에서 국궁을 배웠다며 2009년 설립한 국궁 관련 단체까지 전통무예라고 주장할 지경이다. 전통무예 단체 간 분란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정부가 나서서 전통 무예를 지원한다면 국민이 찬성할지 의문이다.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지 않을까.

    서울신문 2019년 8월16일자 27면에 실린 기사를 일부 수정했습니다

    #전통무예#최형국

    *역사는 멀고 돈은 가까운,전통무예 댓글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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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예해동검도
    무예24기속해동검도시범단의무예시범의왜곡된 무예오류 심각 한 예로 낙악읍성해동검도시범
    전통무예설명왜곡 해동검도쌍수검법이 무예24기로왜곡설명 수원24기공연표절 아마도 해동검도단체와 개인적 인연으로 공연물이 같을수도
    그래도 올바른 무예시범을 해야하고 감시하고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것같다 해동검도의 특이한단체습성때문이다. 항상그래서 해동검도는 무예계의 사이비단체라고하는것이다

    댓글
    자작나무숲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댓글
    전통무예인
    아마도.최사범도 아시는 단체이지요 수원야조때같이시범한 단체아닌가요! 전통성을 중시하는 행사에 해동검도기예무단 이라니 개인뜻이 있겠지만 좀 그래도 같은 전통무예선.후배단체도 있을것같은데 이또한 안타깠습니다 요즘 해동검도 단체들이 전통무예진흥법때문에 전통무예단체에 관심을 보이기도 합니다 조심하셔야죠
    아무리 개인인연 이라도 전통무예연구하시면...... 잘못된 제자한명이 전통성에 문제을 요함
    미꾸라지 한마리가 그단체 전문성과전통성을...... 심히걱정됩니다 무예24기단원의 오래된 노력이 한순간에..... 부디 조심하시길

    (기예무단)단체 해동검도협회활동 내용
    한국해동검도연합회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청주 세계 무예마스터 대회 단체연무 우승 영암수련원(기예무단). 전통무예 홍보와 협회명예를 걸고 최선을 다한 기예무단 축하 드립니다.

    댓글
    해동검도무예24기
    해동검도란 정조14년 (1790)에 완성된 무예도보통지(조선 후기 무술 교본)를 토대로 복원, 재 창조한 무예이며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검도 입니다.

    또한 해동검도는 평생운동 으로 할 수 있으며 아버지 어머니 등
    온가족이 할 수 있는 가족무예이기도 합니다.
    출처:네이버지식.해동검도광고문구

    무예계 전통성세탁.무예역사왜곡
    일제시민지자재.칠일파.일본회
    역사학회 자본지원 및 포섭

    2020-07-15 04:18:07 수정 삭제 신고

    답글 0
    • 창시.전통통합작업

      해동검도란 정조14년 (1790)에 완성된 무예도보통지(조선 후기 무술 교본)를

      토대로 복원, 재 창조한 무예이며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검도 입니다.

      또한 해동검도는 평생운동 으로 할 수 있으며 아버지 어머니 등
      온가족이 할 수 있는 가족무예이기도 합니다.
      출처:네이버지식.해동검도광고문구

      전통무예속일본무도회잠식
      일본검도회 해동검도 해동검무시범단 각지역전통무예단체시범단
      일본검도류시범베기 해동검도류시범베기 무예24기단체베기시연
      전통무예단체들 해동검도류 베기시연 뿌리거합도.일본검도회
      해동검도무예24기시연단체
      해동검도지무단.해동검도기예무단.각지역해동검도검무단체
      해동검도전통무예전통성작업
      전통무예진흥법영향

      전통성세탁.무예계역사왜곡.무예단체전통성왜곡
      일제시민지자재.일본무도회.일본검도회.전통무예 전통성역사 희석
      칠일파 일본회 역사학회.자본지원 및 포섭

      해동검도검무시범단들 활동기사

      무예24기시립공연단 무예24기시범단 무예연출은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이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순국선열들의 호국의지와 희생정신을 전통무예를 통해 풀어내고 한국의 미(美)를 알릴 수 있는 검무(劍舞) 프로그램을 추가하여 아름답고 절도 있는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며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번 공연에는 무예24기 시범단과 [기예무단]해동검도검무시범단과의 협업을 통해 실제 교전을 방불케 하는 박진감 넘치는 교전 퍼포먼스와 검무, 특수 격파 시범까지선 보여 전통무예의 강인함과 호쾌함을 엿볼 수 있다.

      네이버 기사
      해동 검도
      본국검과 예도, 쌍수도를 중점적으로 배우나, 이들의 무예도보통지 무예는 일본식 검도 특유의 '타돌' 개념이 잔존하고 있다. 게다가 아래 포스팅에 올린 '위작 증언' 문제로 거의 매장되기 일보직전. 그러나 해동검도 자체는 장사가 잘 되는 중.특히 본국검의 경우, 독자적인 형을 만들어서 수련하고 있는데, 이에대해선 뭐라 말할 수 없음

      무예24기푸르깨비 댓글

      푸르깨비 관장님! 해동검도에서 수련하고 있는 장백검법이 무예도보통지의 본국검법처럼 신라를 뿌리로한 우리나라의 고유검법인 것처럼 장백검법도 고구려를 뿌리로한 우리나라의 고유 검법이라던데 그럼 왜 무예도보통지에는 편찬할때 장백검법을 왜? 안 실은거죠? 그리고 무예도보통지에 안 실려있다면 해동검도에서 수련하는 장백검법은 어디서 어떻게 전수되서 지금에 이르게 된건가요?

      답글:^^, 네 지난 해동검도 법정싸움(한국/대한해동)에서도 밝혀졌듯이 현재 해동검도에서 수련하고 있는 대부분의 검법은 70-80년대 새로 만든 검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


      ※참고:해동검도기예무단 24기단체소속 개인이전수 수련활동함
      해동검도기예무단는 신창조무술이다 전통은 아니다.
      출처:중부일보


      전주검무 지무단의 김단장
      해동검도를 시작으로 ‘누구도 해 보지 않은 장르’를 개척하고 싶어 검무를 시작하셨다는 단장님은 무대에서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과는 달리 너무도 아름다우셨습니다.

      ‘지무단’은 춤의 참 뜻을 알아간다는 의미로 검법을 바탕으로 우리 무예의 강인함과 전통무용의 화려함을 검무로 표현하는 검무예술단입니다. 검뿐만이 아닌 [월도, 장창,기창, 깃발] 등 다양한 소품을 이용하여 춤을 추는데, 그 바탕이 해동검도에 있다 보니 일반적인 춤보다는 힘이 있는 게 특징이라고 하네요.

      지무단은 김단장님과 제자 분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나이가 어린 분들로 구성된 청소년 팀이 따로 있어 다양한 공연에서 매우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참고:경당무예24반단체기반 무사기획사단체소속교류
      월도.기창.장창.병장기전수수련 활동함
      출처네이버기사

      ※해동검도시범단 인스타활동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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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무예 #검무 #진검무 #쌍검무 #기예무단 #우리무예 #역사적가치 #영암 ... 문화협동조합 #무예춤 #무예도보통지 #전남무예단 #월도 #등패 #기창 #장창 #쌍검 ... 이번 정기공연엔 어디서도 볼수 없는 스티커와 여러 지무단 굿즈들이 준비되어.

      해동검도 천류관 무예2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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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동검도 국궁 검무 무예24기

      항상 이렇게시작했다.
      대한검도.기천문.심검도.경당무예24반.무예24기
      해동검도화편입시작

      사이비단체의전형적습성이다.해동검도의유행따라하기.자본주의병폐을보여주고있다.

      ※참고:해동검도와의기천문.심검도전통성대립※
      해동검도는 한국의 현대 창작무술로, 1980년대에 배우 겸 무술인 나한일과 김정호가 만들었다.

      아주 근본이 없진 않고 토대가 되는 여러 무술, 무서를 통합, 변형하였으나, 광고하듯이 고구려 무술은 결코 아니다. 해동검도 측에서는 고구려의 사무랑(士武郞)이란 무사단체에서 만들었다,장백산의 스승에게서 배웠다 운운하며 기원을 주장하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창작무술이 분명하다.

      서라벌고등학교 동창생인 나한일과 김정호는 고등학생 시절인 1970년 무렵에 서울 신당동에 있던 심검도 호법총관에 입관하여 심검도 창시자 김창식 관장에게 심검도를 배웠다. 심검도는 김창식 관장이 창안한 유파이고, 김창식 관장은 당시 화계사 주지 숭산 스님의 제자였다.

      김창식 관장이 미국으로 이민 가고 나한일도 김정호와 떨어지자 심검도 도장을 인수하였지만 경영부진으로 1977년에 폐관하였다. 김정호는 먼저 기천문에 입문하였는데, 나한일은 김정호에게 소개받아 기천문 1대 문주 박대양으로부터 기천문을 배웠다. 나한일은 1980년대 초 현진영화사 김두원 회장의 후원으로 서울 서초동에 도장을 개관했는데, 박대양이 건물 임대 계약자로 자기 이름을 올리고 기천문 간판을 달겠다고 주장해서 갈등을 빚었다.

      결국 박대양이 떠나고 도장은 심검도 체육관 으로 개칭했다. 김정호는 안양에서 도장을 운영하다가 1982년에 서초동 도장에서 다시 나한일과 합류, 도장 운영에 참여하고 나한일은 방송국 일에 전념하였다. 1983년에 최태민 이 심검도 도장에 참여했는데, 이 사람이 나중에 해동검도라는 도장 이름을 지어준 인물이라고 한다. 심검도 체육관은 현진영화사에게 후원받아 운영되었으나, 영화사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문을 닫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 김정호는 나종균에게 도움받아 1986년 서울 삼성동에 해동검도도장을 세우고, 나한일은 해동검도연구소장이라는 직함으로 나한일과 함께 해동검도 보급에 나섰다.

      해동검도라는 명칭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각자가 말이 다르다. 1982년에 경기도 안양시에서 김정호가 운영하던 도장이 "해동검도체육관"이었다는 주장, 1984년 서초동 심검도 도장에서 배우던 최태민이 제안하여 그때부터 해동검도를 상호로 사용했다는 주장, 86년 삼성동 해동검도도장 때부터 사용했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김정호는 1961년에 소위 장백산 스승으로부터 우리 전래의 검법을 전수받았으며, 이 검법을 해동검도라고 칭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정호가 1954년생, 혹은 55년생임을 감안하면 당연히 믿을 수가 없다.

      ※각단체협회와의전통성대립현황※
      ※피해단체협회들→(대한검도회.기천문.심검도.
      경당무예24반.무예24기)
      출처:나무위키

      2020-07-15 04:40:27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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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통왜곡단체

      해동검도 고구려사무랑?
      해동검도가 고구려 사무랑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창건자인 나한일과 김정호의 법정 공방을 통해 기술의 상당수가 심검도와 기천문에 영향받아 만들어낸 현대 창작 무술임은 만천하에 드러나있다. 해동 검도에서 가르치는 검술 상당수는 심검도와 기천에서 따온 것이고, 일부는 둘을 혼합해서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것이며, 또 다른 일부는 아예 일본의 군도술인 토야마류와 나카무라류의 검리와 기술을 받아온 것도 있다. 그리고 본국검법과 쌍수검법은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나름 재현해낸 것이다. 해동검도 검술 중에 예도 검법이라는게 있어서 이것이 무예도보통지의 예도(조선 세법)이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는데, 해동의 예도 검법 1번 ~ 9번은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검술이다. 해동검도는 사범급 연수를 짧고 빠르게 해줘서 도장을 쉽게 세울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빠른 시간 내에 세력을 끌어모았는데, 해동검도 브랜드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에 다른 무술 도장을 하던 사람들이 짧은 연수를 받고 간판만 갈아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던 사람들도 해동검도에도 흘러들어간 듯 최근에는 무예도보통지의 조선 세법도 하고 있다)#. 날조한 전통이 법정 공방으로 드러나버렸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진짜 전통 검술인 무예도보통지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셈. 하지만 도장이 세워진 시기나 해동검도 협회마다 커리큘럼이 제각각이기에, 모든 해동검도 단체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지는 않는 듯 하다.
      ※참고:무예24기와경당24반에
      흘러들어간 해동검도단체
      1.무예청박물관 해동검도진검동호회
      90년대 해동검도진검베기 동호회 회원들
      전통무예경당24반협회활동

      2.무사협회단체 해동검도관장시절
      경당24반쌍검수련생

      3.한국해동검도 윤자경1세대 검무수련자들
      *지무단 해동검도 검무단체 세계해동소속
      *기예무단 해동검도 검무단체 한국해동소속

      4.현재 전통무예 검무시연자들
      해동검도단체소속 수련자들
      이들 단체은 지금 전통문화 행사등 에서 활동하고있다. 돈에 흐름에 따라 활동한다.역사는 멀고 돈은 가까운 해동검도단체들

      2020-07-15 05:18:14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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