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이야기] 거칠고 질박한 무인 - 야뇌 백동수 2

  


박제가는 「백영숙을 기린협으로 보내며 쓴 글」에서 백동수의 친구 사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백영숙은 당시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데, 나라 안에서 두루 친구를 맺었는데, 위로는 경상(卿相)과 목백(牧伯), 다음으로는 현인명사였다. 왕왕 서로 추천하면 (친구로) 받아들였다. 그 친척과 동네 무리와 결혼의 친함 한 가지만으로 족하지 않았다. 대개 말달리고 활쏘기를 익히며, 격검(擊劍)하거나 주먹으로 용맹한 무리와 같이 했으며, 글과 그림․도장․바둑․거문고와 비파․의술․지리․의약 기술의 무리, 시정의 교두군․농부․어부․백정․장사꾼 같은 천인에 이르기까지 길거리에서 만나서 도타운 정을 나누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로는 재상들인 경상과 지방관인 목백부터 아래로는 천인들까지 수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었음을 알려준다. 성격상 어떤 사람의 명령을 받기보다는 자유스럽게 사는 것을 즐겼던 듯하다. 백동수의 사람됨은 이덕무가 백동수의 나이 19살인 1761년(영조 37) 1월 20일에 지은 「야뇌당기(野餒堂記)」라는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야뇌는 누구의 호인가. 나의 벗 백영숙의 자호(自號)이다. 내가 영숙을 보매 기이하면서도 아름다운 선비인데 무엇 때문에 경시하고 깔보게끔 자처하는가? 나는 이 까닭을 알고 있다.…… 영숙은 예스럽고 질박하고 성실한 사람이어서 세상의 속임수를 쫓아가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여 뻣뻣하고 굳세게 자립해서 마치 저 딴 세상에 노니는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 모두가 비방하고 헐뜯어도 그는 조금도 야(野)한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고 뇌(餒)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 이야말로 진정한 야뇌라고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덕무는 자신의 호를 스스로 ‘야뇌’라고 한 백동수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야(野)는 꾸미지 않는 거친 상태를 말하고 뇌(餒) 또한 굶주려 있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이덕무는 얼굴이 예스럽고 질박하며, 옷을 입는 것도 세상의 풍속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야인’이고, 말이 질박하고 꾸밈이 없으며, 행동은 시속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뇌인’이라고 하고 있다. 얼굴은 미남형이 아니었던 듯한데, 그의 성격은 세상과 타헙하지 않는 성격의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야뇌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그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매형 이덕무가 성대중에게 보낸 편지에가 앞서 인용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성사집 대중(成士執 大中)’에는 “그 사람(백동수)이 워낙 고집이 세어서 쉽게 제어할 수 없음이 한스럽습니다”라는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박지원 증백영숙입기린협서

이러한 성격 때문에 관직생활을 접고 1773년(영조 49) 기린협으로 들어가 생활하는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박지원의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증정한 글」을 보자.

아, 그런데 백영숙이 어째서 식구를 몽땅 이끌고 강원도 두메 산골로 들어가야 하는가.…… 이러던 백영숙이 이제 기린협(麒麟峽)에서 살려고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들어가니, 길러서 밭을 갈겠다는 것이다. 그 고장엔 소금과 메주도 없고 산아가위나 돌배로 장을 담가 먹어야 한다. 그 험하고 궁벽하기가 전날의 연암협에 어찌 비교나 되겠는가. 그런데 나 자신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면서 아직 거취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니 백영숙이 떠나가는 것을 감히 만류하겠는가. 나는 그의 결심을 장하게 여길지언정 그의 곤궁함을 슬퍼하지는 않는다.

그는 기린협으로 들어가 직접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며 생활을 했다. 그가 기린협으로 들어간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백동수는 연암 박지원과 함께 1771년(영조 47) 개성(開城)을 유람하다가 그 근처인 황해도 금천군의 연암협(燕巖峽)을 답사한 뒤 박지원의 집터를 살펴봐 줄 때에, 박지원에게 “인생이 백 년도 못 되는데, 어찌 답답하게 나무와 돌 사이에 거처하면서 조 농사나 짓고 꿩과 토끼를 사냥한단 말인가”라고 말한 적이 있는 것을 보면, 시골로 들어가는 것을 기꺼워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아마도 세상과의 소통 실패가 기린협으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린협에서 백동수의 생활에 대해서는 박제가의 󰡔정유각집󰡕의 ‘백선달(白先達) 동수’라는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창 젊은 장사(壯士)가 몸소 발가는 것을 즐겨하여,
가족을 다 거느리고 기린협 안으로 간다.
들으니 길 앞에 겨울의 잔설이 뒤까지 남아 있다고 하네.
매를 데리고 동쪽으로 가, 지평(砥平)을 지난다.

가족들을 데리고 기린협으로 간 백동수는 농사를 짓고 긴 겨울에는 매 사냥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강태공이 낚시를 하며 세월을 낚듯이, 백동수도 사냥을 하며 세월을 기다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1776년(정조 즉위년) 부사용(副司勇)으로 관직에 복귀하였다. 세상과 타협을 하기로 한 듯하다. 이러한 점은 몇 년 뒤의 일이지만, 성대중이 지은 󰡔청성집󰡕의 「인(韌)에 대한 이야기를 비인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백동수에게 해 줌(韌說贈白永叔之官庇仁)」이라는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백영숙은 무예를 하고, 글을 하는 사람이다. 어려서는 구속되는 바 없이 행동하였다가 중년에는 의지를 꺾고 학문을 배워 그 재능과 뜻을 이루었으니, 영숙의 도량이나 씀씀이가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그의 선천적인 품성이 순하게 섞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였는데, (이에 백동수는) ‘부드럽지만 질김(韌)’으로 자신의 호를 삼았다.

성대중은 그가 남과 잘 타협하지 못한 점을 걱정할 정도였던 것이다. 충고를 받아들인 것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백동수는 자신 스스로 인재(韌齋)를 호로 삼았다. 인(韌)은 ‘부드럽지만 질김’을, 재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혹은 ‘정진하다’의 뜻을 담고 있다. 즉 ‘쉽게 끊기지 않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이 했다’정도로 해석되는데, ‘야뇌’에서 ‘인재’로 호를 바꾼 것은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하여 부드럽게 대하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이 부드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백동수의 근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때가 1792년(정조 16) 비인에서 현령을 할 때였다. 나이가 든 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고 세상과의 소통에 나섰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후 백동수는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백동수의 재주를 알고 초관(哨官)에 임명하고 󰡔무예도보통지󰡕 편찬의 임무를 맡겼다. 편찬 작업에는 백동수와 이덕무, 박제가 등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홍재전서(弘齋全書)󰡕 무예도보서술(武藝圖譜叙述) 편찬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덕무에게는 옛 서고의 비장 서적들을 열람 참고하도록 하고, 박제가에게는 판하본(板下本)을 쓰도록 하고, 백동수에게는 병(兵)을 잘 아는 장용영 안의 장교들과 함께 기예를 살피고 시험하도록 명하였다.

백동수는 장용영 안의 장교들과 함께 기예를 살피고 시험해보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그가 여러 가지 무예에 뛰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이 당시 이들의 노력은 앞서 언급한 󰡔청장관전서󰡕의 성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아우(이덕무)는 어제 영숙, 재선(在先: 박제가)과 함께 탕춘대에 다시 󰡔무예도보통지󰡕를 익히고 악기를 울리며 술을 들고서는 헤어진 뒤에 취해서 돌아왔습니다. 24일의 뱃놀이에 참석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나 책을 바치기 전에는 어찌 감히 자리를 다시 떠날 수 있겠습니까? 참석하지 못할 듯합니다.

이덕무가 성대중에게 보낸 편지에 백동수와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의 기법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음을 언급하며, 책을 끝내기 전에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만큼 󰡔무예도보통지󰡕 완성에 온 정신을 집중했음을 짐작케 한다. 백동수가 특히 신경을 썼던 부분은 마상재를 기반으로 한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기창, 격구 등이었을 것이다. 본국검이나 본국검 그리고 장창 등은 사도세자와 임수웅에 의해 정리가 다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 끝에 󰡔무예도보통지󰡕는 1790년(정조 14) 4월 기묘(29일)에 완성되었다. 당시 󰡔정조실록󰡕에는 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검서관(檢書官) 이덕무․박제가(朴齊家)에게 명하여 장용영에 사무국을 설치하고 자세히 상고하여 편찬하게 하는 동시에, 주해를 붙이고 모든 잘잘못에 대해서도 논단을 붙이게 했다. 이어 장용영 초관 백동수에게 명하여 기예를 살펴 시험해 본 뒤에 간행하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후 백동수는 훈련주부(訓鍊主簿)․훈련판관(訓鍊判官)․비인현감(庇仁縣監)․박천군수(博川郡守) 등을 역임하다가 1816년(순조 16) 74세로 사망하였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그리 편안하지 못했다. 성해응은 그의 말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숙의 집안은 본래 넉넉했지만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기를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재산의 집안은 흩어지고 기울었지만 베풀어주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이웃집의 명관이 몰락했다는 말을 들으면 보살피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 즉 외읍(外邑)에 나갔을 때 받은 봉록은 항상 빚 갚는 데 다 써서 부족하였다.

영숙이 이미 늙고 또한 병이 있으며 처첩도 사망하였다. 어려서 교류한 이들이 적거나 살아 있는 자 또한 적었다. 나(성해응)는 그가 궁하게 살며 심심하게 지루한 것을 슬퍼하여 일찍이 가서 살펴보았다. 손과 발이 모두 못쓰게 되어 일어날 수 없으나 웃음으로 환영하는 것이 편안할 날과 같았다. 나에게 말하기를,
“내(백동수)가 비록 병이 있으나 아직은 아침과 저녁 한 그릇의 밥은 내 놓을 수 있네, 내 목숨이 본디 제한이 되어 있을 것인데, 내가 다시 어찌 걱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나(성해응) 또한 그 기이한 기상이 아직도 존재함에 애석해 했다. 지금 그가 죽었다고 들었다.……영숙의 처음과 끝을 기록하기를 마치니, 애석하구나. 다시 볼 수 없는 기이한 남자이다.

말년에는 처와 첩도 사망하고 친구들도 죽고 없었으며, 몸도 병으로 인해 거의 움직이지 못한 채로 홀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재산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상 주위 여러 사람들에게 베푸느라 다 써버리고 어렵게 살았던 것이다. 그나마 백동수를 알고 있는 성해응이 시간 날 때마다 들러보는 정도였다. 그이 말년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마음의 평정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이 성해응을 더욱 안타깝게 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다시 보기 어려운 사내가 사라져갔다.

덧붙이는 글:

요즘 드라마 「무사 백동수」가 방영되고 있는데, 백동수라는 인물을 되살려 낸 것은 오롯하게 김영호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후 백동수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모두 이 책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영호는 수많은 자료들을 오랜 시간에 걸쳐 살펴보고 시행착오를 거쳐 그 동안 우리가 인지하지도 못한 백동수라는 인물을 되살려, 󰡔조선의 협객 백동수󰡕(푸른역사, 2002)라는 책으로 간행하였다.

물론 이 책이 온전히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상상이 가미된 부분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책이라기보다는 팩션(Faction) 즉, 역사적 사실(Fact)을 근거로 한 소설(Fiction)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옳을 듯하다. 대표적으로 김광택이 백동수의 스승이라고 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검선이라고 불린 김광택이 백동수의 스승이었다고 하는 부분이 좀 더 극적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노력을 폄하할 필요는 없다. 역사적 사실이 부족하다고 되살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의 노력으로 조선 후기를 살았던 백동수나 황진기, 김홍연 등의 무인들을 되살릴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그의 노력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그의 이러한 노력에 이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무인들을 발굴해 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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