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이여송의 후손 이 아무개
발행일자 : 2011-11-07 19:57:45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임진왜란과 이여송 3
이여송은 그의 조상이 조선과 연관을 맺고 있고 자신도 조선에 원군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르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도 다시 조선과 인연을 이어갔다. <청성잡기>에는 이여송의 손자 이응인(李應仁)이 명과 청이 교체되는 시기에 난리를 피해 조선에 망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 정조 5년(1781) 7월 신해 기록을 보면, “임진년에 나라가 다시 구제된 것은 오로지 명 제독 이여송이 평양에서 세운 공훈에 연유된 것입니다. 명이 망하게 되자 제독의 손자가 도망쳐 동쪽으로 왔는데, 이제 그 후손들이 간혹 무예로 거용되고는 있습니다만, 세상에서 대하는 것이 도리어 향곡(鄕曲)에서 급제한 사람만도 못합니다.”라고 하여 이여송의 후손들이 조선에 귀화했음을 말하고 있다.
<무예도보통지> 제독검조에는 이와는 별도로 임진왜란 중에 그를 시종한 통진 금씨(琴氏)의 딸에게 이여송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검을 정표로 주면서 아들을 낳으면 천근(天根)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라고 했으며, 천근의 자손이 거제도에 많이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조실록> 정조 24년91800) 4월 8일 기사를 보면, 이여송의 후손으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장에게 도총부의 경력(經歷)을 제수하라는 기록에 “무과에 급제한 전 선전관(宣傳官) 이희장(李熙章)은 제독 충렬공(忠烈公; 이여송)의 후손이다.
제독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우리나라 사족(士族)의 딸을 맞아들여 사내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우리 나라에 남아 희장의 선조가 되었는데, 해변 땅에 떠돈 지 수백 년만에 이제 처음 급제자가 나왔으니, 어찌 기특하지 않은가.”라고 하여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계서야담>에는 오대산의 승려와 결투를 한 이여송의 후손이 기록되어 있다.
병마절도사 이원(李源)은 이여송 제독의 후손이다. 조정에서 제독이 임진년의 직무에 수고가 있다 하여 그의 후손을 거두어 썼으므로 지위가 병사에 이르렀다. 씩씩한 힘이 있어 능히 두어 길이나 되는 담장을 뛰어 넘을 수 있었고 강궁을 당길 수 있었다.
그의 당숙 이 아무개가 춘천 땅에 살면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는데, 역시 완력과 신이한 용기가 있었으나 사람들이 모두 알지 못했다. 봄에 밭을 갈 때 집이 가난하여 소가 없는지라 손으로 손수 쟁기와 보습을 끌며 밭을 갈았는데도, 도리어 소로 가는 것 보다 나으니, 이 때문에 사람들은 혹 괴이하게 여겼다. 친한 친구가 황해도의 풍천(豊川) 원님이 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몸소 가서 그 원님을 보고 말하였다.
“내게 큰 화가 있는데 모면할 것을 도모코자 하나 힘이 부족하오. 그대는 오랜 벗의 정으로 나를 살릴 수 있겠소?”
원님이 말했다.
“무슨 말이오?”
“나의 기력이 건실해진 연후에야 이 화를 면할 수 있건만, 곤궁하여 뜻대로 할 수 없소. 오늘부터 그대는 나에게 큰 소를 먹일 수 있겠소? 열 마리를 먹으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원님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생(李生)이 매일 소를 끌고 오게 하였는데, 앞에서 잡아 그 피를 마시고, 다시 그 고기를 들어 피를 빨아먹는데 색이 하얗게 된 이후에야 버렸다. 연일 이와 같이 하더니 고을 원님에게 부탁하였다.
“며칠 새로 한 중이 와서 내가 내려왔는지 여부를 물으리니, 잠시동안은 내려오지 않을 것
으로 말하시오. 그가 만약 믿지 않거든, 내가 날을 기약해 둔 글을 써둘 것이니, 이것을 꺼내 보시오.”
원님이 허락하였다. 며칠 후에 문지기가 들어와 고하였다.
“강원도 오대산의 어떤 중이 뵙기를 청합니다.”
그를 들어오게 하니, 바로 용모가 험상궂은 건장한 중인데, 들어와 예를 보이고 물었다.
“춘천 이생이 여기에 왔습니까.?
대답하였다.
“약속이 있어 잠시 동안은 오지 않을 것이네.”
중이 말했다.
“소승과 더불어 정녕 여기서 약속을 했었는데, 기한이 넘어도 오지 않다니 매우 의아합니다.”
원님이 그 글을 보이며 말했다.
“여기에 글이 있으니, 한 번 보거라. 모일에는 마땅히 온다고 했느니라.”
그 중이 글을 보기를 마치자, 하직하며 말했다.
“그날 삼가 마땅히 나오겠습니다.”
이르고 문을 나갔다.
원님이 괴이하게 여겨 이생에게 물으니 말했다.
“이 중은 바로 나를 죽이려는 사람인데 내 기력이 아직 충실하지 않아 그와 대적할 수 없소. 그래서 십여 일 기력을 보충하면 비로소 그와 더불어 힘을 겨룰까 하오.”
그날이 되어 그 중이 또 와서 보기를 청할 때 이생은 자리에 있었다. 그 중이 들어와 또 이생이 왔는지를 물으니, 이생이 지게문을 열고서 말하였다.
“내가 과연 왔도다.”
그 중이 냉소하며 말했다.
“네가 이미 왔다면 나오너라.”
이생이 허리춤에서 철추 하나를 꺼내고 마루에서 내려와 중과 함께 마주 섰다. 그 중도 또 철추 하나를 꺼내어 서로 더불어 치더니, 오래지 않아 함께 한 줄기 흰 무지개로 화하여 하늘 끝까지 뻗쳤는데 공중에서는 다만 몽둥이 치는 소리만이 있었다. 이생이 공중에서 몽둥이를 끼고 내려오더니 얼굴을 쳐들고 시체처럼 눕는지라 곁의 사람들이 다 놀랐다. 이생이 에에 눈을 깜짝이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조금 있더니, 그 중이 구름 가운데서 또 철퇴를 끼고 날아 내리는데, 매가 꿩을 덮치는 것 같았다. 장차 이생의 앞으로 가까이 닥쳐올 즈음, 이생이 홀연 철퇴를 들어서 치니, 그 중의 머리가 부서지며 땅에 죽어 넘어졌다. 이생은 숨을 헐떡거리며 일어나 말했다.
“내가 이 중과 더불어 매번 몽둥이 쓰는 법을 겨루었으나 힘이 약하여 이기기 못하였소. 오늘도 또 거의 그에게 질 뻔한지라, 부득이 와추법(臥椎法)을 썼는데 다행이 그가 모르고 내려왔소. 그가 만일 이 법을 알고 비스듬히 내려왔다면 나는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오. 또한 이것도 운수일 것이오.”
다시 며칠을 머물다 돌아갈 것을 고하자, 풍천 원님이 중의 내력을 물었으나 답하지 않은 채 사라졌는데, 춘천의 산 아래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서 <청구야담>에 ‘검술 이비장이 싸워 승려를 베다’라는 야담이 참고된다. 이 야기는 무인이야기 비장 이 아무개편에서 다뤘는데, <청구야담>에는 이여송의 아닌, 동생 이여매의 후손으로 되어 있으며, 철퇴가 아닌 검을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거의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여송의 후손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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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무예도보통지-제독검,.,.
2011-11-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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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송에 대한 글이 인기가 없는것을 보니 우리 무도인들이 임진왜란과 이여송 장군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2011-11-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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