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카스 美 대륙 개척자를 만나다] 뉴욕 권재화

  


권재화 사범과의 뉴욕 데이트 현장


그는 미국 태권도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태권도 원로이자 중심이다. 혹자는 그를두고 분명 독일 태권도의 개척자라고도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태권도 역사서를 훑어봄에 있어 1937년생 권재화(73)란 이름 세 글자는 미국이나 독일, 그 어디에 넣어보아도 거부감이 없다. 수십 개국 수천 명의 외국인들 앞에서 태권도를 알려야했던 그는 생 벽돌과 차돌을 맨손으로 격파했다. 그래야만했다. 당신의 손을 보며 대단해 마지않아 하던 취재진을 향해 “이제는 닳고 헤어져버렸지, 이런 거, 기본 아닌가”라며 손사래 치며 겸허해하는 그다. 휘어져 버린 오른손 중지, 온통 흉터투성이인 그의 양손 곳곳에서 ‘권재화의 태권도 라이프’는 살아 숨쉬고 있었다. 무카스 미국 특별취재팀이 뉴욕의 한 복판에서 진짜 사나이 권재화를 만나 태권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겨봤다.

- 권재화가 태권도에 빠진 날은?

“11살때 태권도를 시작했습니다. 태권도에만 파묻혀 살아 온 인생이죠. 잘 알다시피 그때는 태권도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당수도 아니면 권법 등의 무술을 배운 것이죠. 저는 현재 부산 연무관의 관장입니다. 수련의 시작도 또 현재도 연무관의 권재화입니다. 워낙에 한번 해야겠다 싶은 것이 있으면 꼭 하는 성격인지라, 하루 두, 세 시간씩 쉬지 않고 수련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권재화가 하도 수련을 많이 해서 부산 구덕운동장 인근의 나무들이 다 죽었다고들 얘기하기도 했죠(웃음).”

- 태권도 역사의 한 가운데에 권재화가 있다.

“항상 어디를 가도 저는 이 태권도라는 단어를 고집했습니다. 처음 독일에서의 도장 개관 당시에도 태권도였죠. 코리언 가라테를 쓰지 않았습니다. 당시 해외 사범들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 가라테라는 용어를 사용하던 시기였죠. 1965년 한국의 친선 사절단으로 독일 뮌헨에서 처음 태권도시범을 보였습니다. 최홍희 총재와 독일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이 난 뒤, 최 총재는 태권도가 민간외교로서 최고의 역할을 했다며 극찬했습니다. 이후 1966년 저는 독일에 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죠. 처음 독일에 갔을 당시만해도 무척이나 힘들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가라테 도장이 있었죠.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가라테는 손 중심의, 태권도는 발 중심의 운동이다, 발은 손보다 강하다면서 태권도를 홍보했습니다. 동양무술에 관심이 많은 독일 현지인들에게 가라테와 차별화된 무술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함이었죠. 1973년에는 처음 미국 뉴욕 땅을 밟았습니다. 원칙이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하죠. 저는 보여주고 확인시켰습니다. 뉴욕 한 복판에서 그들과 직접 부딪히며 저의 모든 것을 던졌습니다.”

권재화 사범은 독일, 미국, 프랑스, 터키, 레바논, 쿠웨이트 등지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단적인 예로 독일 전역에 퍼져있는 80개의 권재화태권도장과 20,000여명의 수련생이라는 수치가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권재화를 가늠케 한다.


거리 인터뷰 중인 권재화 사범

- 당신이 사범으로 있던 독일과 미국에서의 활약상을 재정리한다면?

“저를 두고 유럽 최초의 태권도 사범이라고들 말합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당시 현지 독일인 중에 가라테 4단이 있었습니다. 정착 과정에서 가라테인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태극기에 대한 맹세에서도 심한 국민적 반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제가 아니죠. 그런 불만들에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태권도 탄생지인 대한민국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없다면 배우지 말라는 고집이었죠. 이후부터는 고난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발을 사용하는 것에서 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던 저는 직접 수백 번의 시범을 보였습니다. 미국 뉴욕에서의 일이 기억이 나는군요. 독일에서의 명성을 익히 들은 미국의 유명한 스포츠 기자가 저의 미국 도장 개관 소식을 듣고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다왔다는 사람이 한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못하더군요. 간판도 없었고, 위치도 좋지 않았죠. 태권도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작고 초라한 아메리카드림의 시작이었죠. 이후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와 포트라우더데일에서 800여명의 제자를 키워냈습니다. 한인회장까지 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이쯤에서 권재화 사범이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한 가지를 전해본다. “사람이 크게 되려면 크게 살아야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꿈을 꾸었다면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에 가야하는 것이죠.”

- 권재화의 지도철학은?

“태권도에 단은 필요 없습니다. 숫자놀이가 필요 없는 것이죠. 1973년도부터 38년 동안 저는 계속 7단입니다. 현재 저에게 단을 줄 수 있는 사람도 없구요. 사범은 겸허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외형적인 것에 신경 쓰지 말라는 것이죠. 지도자는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책임이란 간단합니다. 수련생들의 교육을 직접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공한 사범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승이 성공하면 제자도 성공합니다. 독일이 잘되니, 미국이 잘되었고, 미국이 잘되고 나니 한국의 제자들을 초청할 수 있게 되었죠. 바로 이런 스승의 삶이 제자들의 성공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 이 시간 이후의 권재화의 미래는?

“태권도사범으로서 권재화의 업적은 앞으로가 시작입니다. ‘50년 태권도 인생’까지는 5년이나 남았습니다. 제 생애 50년 정도는 태권도를 해야겠죠. 욕심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죽기 전까지 제손으로 직접 가르치다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요. 제가 태권도를 해서 장수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세계인들에 보여줘야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태권도를 할 수 있고, 실제로 시범을 보일수 있을때, 태권도의 가치도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오래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합니다. 병들어 오래사는 삶은 가치가 없습니다. 건강하지 않으면서 태권도를 오래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끝으로 '무도인' 권재화는 태권도인들에게 두 가지 당부의 말을 전하고 뉴욕에서의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태권도 역사는 거짓말 하면 안됩니다”, “당신들의 교육대상은 사회를 움직이는 리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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