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바늘던지기로 적장 물리친 강포

  

최영의의 저서에 등장한 바늘던지기의 명수 강포


극진가라테 창설자인 최영의(1923~1994, 일본명 오야마 마쓰다쯔)의 <백만 인의 가라테>에는 신라인 차력의 명수 강포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옛날 신라시대에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신라군은 적의 기습을 받아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승려모습을 한 사람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갑주와 투구로 몸을 가린 적들 사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훨훨 날아다니며 몇 차례 손을 휘저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손을 휘둘렀더니 마상의 적병이 굴러 떨어졌다. 순식간에 열 몇 명의 병사들이 땅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을 감쌌고, 괴로움으로 몸을 뒤틀었다. 모두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멀리에서 바라본 적장은 불교가 성한 신라에는 도사가 많다는 소문을 들은 터라, 이것이 '마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적장은 크게 두려워하며 후퇴했다. 이틈을 이용해 신라군은 응원군의 도래를 기다려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려가 바로 신라의 기인 강포였다.

그는 어렸을 때 좌골(골반을 이루는 한 쌍의 뼈)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소아마비 환자였던 것이다. 그는 산중의 절에서 기거하며 차력을 동경했다. 원래 아이들은 차력을 동경하지만, 몸이 부자유스런 그의 이런 관심은 보통 아이들에 비해 남달랐다. 그는 누운 자세로 수련을 시작했다. 그 수련은 바늘을 던져서 벽에 달라붙어 있는 파리를 잡는 일이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법에 심심풀이로 열심히 또 끈질기게 바늘을 던졌다.

바늘 던지기가 그에게 알맞은 운동이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년간 수련한 결과 마침내 호흡에 맞춰 바늘을 던질 수 있게됐다. 당연히 백발백중, 과녁을 벗어나는 일은 없게 됐다. 오랜 병도 쾌유되었다. 강포는 이 바늘던지기를 하나의 계기로 삼아 연차력(練借力)을 시작했다. 그 결과 놀랍게 체력이 붙었다. 바늘던지기는 못으로 발전되었고 그 위력은 커져갔다. 어떤 자세나 각도, 또 아무리 작은 점과 같은 표적도 빗나가지 않았다. 이후 그는 용맹을 떨쳤고, 어디를 가더라도 승복 소매 속에 못을 넣고 다녔다. 범이 출몰하는 산길도 태연스럽게 다녔다. 범의 눈을 멀게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포의 바늘던지기 수련을 최영의는 일종의 연차력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차력을 약(藥)차력, 신(神)차력, 연(練)차력의 3종류로 나누고 있다. 이 가운데 약차력은 약을 복용하여 자신의 체력을 바꾸는 방법을, 신차력은 일종의 호흡법을 포함한 일종의 정신수련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약차력은 약 복용을 통해 본래 자신의 힘보다 더 많은 힘을 내는 방법을, 신차력은 주술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힘을 얻는 방법을 말한다. 즉, 꾸준한 노력을 통해 힘을 키우는 일반적인 방법과는 동떨어져 있다. 반면에 연차력은 유연하고 강력하며 민첩한 체력을 만들어내는 방법이라고 한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무예 수련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런 강포의 존재는 역사서에는 찾아볼 수 없다.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백만인을 위한 가라데를 저술한 최영의 총재


(사진출처 : 네이버 블로그)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강포와 비슷한 기록 남아


그런데 강포의 사연과 비슷한 이야기가 성대중(1732~1809)의 <청성잡기(靑城雜記)>에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마귀가 소사(지금의 경기도 평택시)에서 왜적과 싸울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원병 제독으로 파견되었고, 첫 전투에서 양쪽 군대가 서로 포진하게 되는 상황을 맞았다. 이때 한 왜병이 검을 휘두르며 기세등등하게 도전해 왔다. 이에 긴 창을 쥔 절강 출신의 병사가 나가 대적하였으나 얼마 못 가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그의 아들 네 명이 연이어 나가 싸웠으나 모두 죽었다. 검을 잡은 왜병이 더욱 앞으로 다가오자 조명 연합군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마귀가 군중에 상금을 내걸고 왜병에 대적할 자를 모집하였으나 아무도 나서는 자가 없었다.

이때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마귀에게 읍하고는 맨손으로 그 왜병을 잡겠다고 자원했다. 모든 병사들은 미친 짓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마귀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우선 나가서 대적하게 하였다. 왜병도 맨손으로 춤을 추기만 하는 병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검을 멈추고 비웃었다. 얼마 후에 검을 휘두르던 왜병이 갑자기 쓰러졌다. 무명옷을 입은 맨손의 병사는 적장의 검으로 목을 베어 바쳤다. 이 광경을 본 왜군들은 크게 기가 꺾였고, 마침내 연합군이 승리하는 쾌거를 이뤘다.

마귀는 그 무명옷을 입은 조선 병사의 공로를 인정하고 검술을 아는지 물었다. 조선병사가 알지 못한다고 말하자, 마귀는 어떻게 왜병의 목을 벨 수 있는지 물었다. 병사는 “어려서 앉은뱅이가 되어 혼자 방에만 있었고,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서 바늘 한 쌍을 창문에 던지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날마다 동이 틀 무렵 시작해 날이 어두워지면 그치기를 반복하였다. 처음에는 던지는 족족 바늘이 빗나가 떨어졌다. 이후 오랫동안 연습하자 바늘이 구멍에 들어가 8, 9척 안의 거리는 던지는 대로 명중하게 되었다. 3년이 지나자 먼 데 있는 것이 가깝게 보였다. 가는 구멍은 크게 보였고, 던졌다하면 손가락이 마음과 일치되어 백발백중하게 되었다. 기술이 완성되었지만 써먹을 데가 없었다. 때마침 전쟁이 일어났고, 그의 앉은뱅이 다리도 펴져 적장에게 사용할 수 있었다. 왜군은 그가 맨손으로 춤을 추자 이를 비웃고 무시하여 검으로 베지 않았고. 이를 틈타 눈에 바늘을 꽂은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마귀가 왜병을 살펴보니, 정말로 눈에 바늘이 한 치쯤 박혀 있었다고 한다.

최영의와 성대중의 이야기가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최영의의 강포이야기가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나오는 무명인의 이야기를 차용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다. 아마도 성대중의 <청성잡기>의 이야기가 구전되는 과정에서 신라인으로 와전되었고, 이 이야기들은 최영의가 기록한 것이 아닐까라는 짐작일 뿐이다.

차력은 풀이하면, 힘을 빌린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갖고 있는 본래의 힘 이외의 힘을 빌린다는 것인다. 이에 대해 태권도로 통합되는 5대 모체관 중의 하나인 중앙기독청년회(YMCA)권법부 출신이자, 강덕원의 창설자인 박철희(1933~?) 사범은 “차력은 어떤 누군가로부터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허인욱의 무인이야기는 격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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