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투기변천사]격투기붐과 프라이드의 몰락
발행일자 : 2009-03-07 00:00:11
<무카스미디어 = 김성량 기자>
한국의 최홍만 효과와 타도 그레이시의 달성
2000년을 전후로 일본과 한국에서는 격투기붐이 일어났다. 그 선봉에는 일본의 격투기 K-1과 프라이드가 있었다. 한국에서 매니아 층에 국한됐던 격투기는 2002년부터 국내에서 K-1 중계를 시작하며 폭발적인 인기상승을 가져온다. 여기에 2년 뒤 K-1 월드그랑프리를 서울에서 개최했고, 또 최홍만의 등장은 국내 격투기 시장의 활력을 가져왔다. 하지만 후발주자로 인기를 끌던 프라이드의 붕괴는 종합격투기의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 <무카스> 기획연재 ‘격투기변천사’ 4화는 일본 격투기의 인기몰이와 프라이드의 몰락이다. -편집자 주-
1. 옛날로 회귀하는 격투기 - 2월13일
2. 격투기의 모체 실전프로레슬링 - 2월20일
3. ‘흑심’으로 시작된 격투기대회 - 2월28일
4. 격투기 붐과 프라이드의 몰락 - 3월7일
5. 일본과 미국의 격투기 시장(가제) - 3월13일 예정
타도 그레이시를 달성한 프라이드
1993년 출범한 K-1은 ‘일본 가라테는 강하다’라는 주장을 증명하지 못했다. 뒤늦은 1997년 개최한 종합격투기대회인 프라이드도 마찬가지였다. 프라이드에 출전한 선수는 대부분 실전 프로레슬링대회 출신 선수들이었다. 당시 일본팬들은 프로레슬링이 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라이드에 출전한 그레이시 일가의 주짓수에 일본 선수들을 추풍낙엽이었다. 일본팬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일본 선수들은 ‘타도 그레이시’를 외쳤다. 이러한 선수들의 굳은 의지는 종합격투기를 진지하게 배우는 계기가 됐다. 대부분 프로레슬러 출신인 이들은 종합격투기 기술을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타도 그레이시'를 향한 이들의 집념은 몇 년후 성과를 이루게 된다.
'그레이시 헌터'는 1999년에 탄생했다. 주인공은 사쿠라바 카즈시였다. 당시 사쿠라바는 프라이드 2회부터 7회까지 출전해 외국선수를 상대로 전승을 기록했다. 자신감에 찬 사쿠라바는 호일러 그레이시에게 도전하기에 이른다. UFC 초대 챔피언인 호이스 그레이시의 형제인 호일러 그레이시는 그레이시 일가에서 가장 왜소했다. 하지만 유도대회에서 상대의 팔을 부러뜨릴 정도로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두 선수의 대결은 박빙이었다. 호일러는 계속되는 그라운드로 사쿠라바를 괴롭혔지만 모든 기술이 실패를 거듭하며 불안모습을 보였다. 결국 호일러는 사쿠라바에게 팔을 잡히며 기무라(암록)를 당했다. 호일러는 팔이 완전히 돌아갔음에도 항복을 선언하지 않았고, 결국 심판이 TKO패를 선언했다.
호일러의 패배는 그레이시 일가의 천적이 사쿠라바임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호일러의 설욕을 다짐한 그레이시 일가는 호이스 그레이시를 앞세웠다. 하지만 호이스는 사쿠라바를 상대로 제대로 된 테이크다운을 얻어내지도 못하고 항복을 선언했다. 또 사촌인 헨조 그레이시도 사쿠라바의 기무라로 인해 팔이 탈구되어 버렸고, 하이언 그레이시까지 판정패를 기록한 것이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쿠라바의 이름 앞에는 그레이시 헌터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타도 그레이시를 달성한 사쿠라바에 의해 당시 프라이드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국의 방송중계와 함께 최홍만을 투입한 K-1
KBS SKY는 2002년 K-1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에서도 많은 격투기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2004년 4월 KBS SKY는 국정감사에 의해 방송권을 MBC ESPN으로 넘겨줬다. MBC ESPN은 중계권을 넘겨받고, K-1 월드그랑프리(이하 K-1 GP)를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을 추진했다. 계획은 빨리 이뤄졌다. 방송을 시작한지 4개월 만인 7월에 K-1 GP를 개최한 것이다. 첫 서울대회인 K-1에는 제롬 르 밴너, 카오클라이 카엔노르싱, 데니스 강, 이면주 등 걸출한 스타선수들이 대거 출전했다.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공식 입장 관객 수만 무려 10,388명이었고, 생중계된 이날의 방송은 인기스포츠 부럽지 않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1년 뒤 열린 2005년 K-1 GP는 최홍만의 출전으로 더욱 성황을 이뤘다. 2004년 대회보다 50%가 많은 15,918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다. 시청률도 증가했다. 최홍만의 개막전은 순간 시청률 15%라는 기록했다. 이어 펼쳐진 결승전에서 무려 22%의 시청률을 달성했다. 현재 K-1이 4%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에 감안하면 당시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K-1이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내놓은 최홍만 카드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박용수, 이태현, 김영현, 최무배 등 한국파이터들의 등장은 국내 격투기의 인기를 이어가는 활력소 역할을 했다.
표도르가 발단이 된 프라이드의 몰락
지난 2007년 프라이드의 몰락을 두고 야쿠자 개입설, 후지TV의 방송중단, 선수들의 연봉과 계약금 횡령 등 많은 소문이 나돌았다. 하지만 프라이드가 몰락하게 된 계기는 표도르의 출전을 두고 프라이드의 기획담당자와 DSE(Dream Stage Entertainment) 사카키바라 노부유키 대표의 ‘힘 겨루기’로부터 시작됐다고 봐야한다. 사카키바라 대표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야쿠자를 동원해 기획담당자를 협박했다. 이 같은 사실은 한 잡지사의 인터뷰에 의해 알려졌고, 기획담당자는 해외로 도피하게 된다. 이후 다른 범죄로 검거된 야쿠자가 기획담당자의 협박에 참가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됐다. 이는 후지TV가 프라이드의 방송을 불허하며 중계료가 없어지는 상황에 이르고, 중계권이 없는 프라이드는 흑자를 바라보기 힘들어 졌다.
결국 사카키바라는 프라이드를 UFC의 주최사인 ZUFFA의 로렌조 페티타 회장에게 넘기게 된다. 프라이드를 인수한 페티타 회장은 프라이드의 브랜드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프라이드 내부에서는 페티타 회장을 배제했다. 기존 직원들이 협의해 또 다른 대회를 계획한 것이다. 선수들 또한 이들과의 신임을 바탕으로 UFC와 새로운 계약을 하지 않았다. 결국 페티타 회장은 프라이드의 전 직원을 같은 날 해고해 버렸다. 결국 프라이드는 그렇게 기억속으로 사라져갔다. 이후 프라이드에서 쫒겨난 직원들은 2007년 12월 '야렌노카'를 개최했다.
[김성량 기자 / sung@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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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재밋게 잘 봤음
2009-03-0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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