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도인, 이제황은 누구인가?
발행일자 : 2006-03-05 00:00:00
소마연구소(www.somakorea.com)


중앙대 손환교수팀, 한국유도의 거성 이제황10단의 유도사상 밝혀
유도는 신체단련으로만 끝나는 것인가?
현대유도가 스포츠화되면서 교육적 요소가 상실되고 있는 시점에 일제시대와 해방직후 유도계의 헌신적인 노력을 해 온 인물을 통해 유도교육의 새로운 시사점을 밝힌 연구가 발표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유도를 수련해 해방이후 한국유도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다져온 이제황 10단에 대한 연구가 중앙대 체육교육과 손 환교수팀(체육사)에 의해 발표돼 화제다. 손교수님은 2006년도 한국체육학회 제45권 제1호에 발표된 이 연구는 이제황의 성장배경과 경기실적, 그리고 그가 저술한 저서 등의 활동 등을 통해 이제황의 유도사상을 밝혔다. 그의 활동에는 해방직후 우리 무도계가 해 왔던 한국화의 노력이 다분히 담겨져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본다.(편집자 주)
유도경기인출신-유도행정가-학술연구가로서 두각 나타내 유도계 초기 다져

한국유도 10단 고 이제황선생
1910년 음력 1월 4일 서울 후암동에서 태어난 이제황은 1981년 12월 16일 고혈압으로 사망하기까지 한국유도계의 10단이라는 거성답게 다양한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그가 유도를 입문한 것은 소년시절 당시 유도의 본산이라 일컫는 ‘중앙기독청년회’에 입문하여 장권선생으로 부터 사사를 받고 1932년 초단, 1938년 4단, 1939년 5단, 그리고 해방후 1948년에 6단에 승단하였다.
해방이전 성년을 맞은 이제황은 당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주권상실에 비통함을 느끼고 몽양 여운형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 중국에 유학 북경의 중국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수료하기도 하였다. 유학시절 중국에서 암약하고 있는 반일단체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해방이후 여운형을 따라 잠시 정치계에 투신하여 수행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의 기록에 대해 연구자들은 2005년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의 남소연기자와의 인터뷰를 인용해 확인했다. 그 내용을 보면 “몽양의 경호원 박성복이 범인을 추격했지만 경찰이 제지하면서 범인의 도주를 도왔고 오히랴 박씨를 검거한 뒤 성북경찰서 운전사 홍순태를 서대문경찰서에 또 다른 경호원 이제활을 동대문 경찰서로 연행했다”라고 밝히고 있다.
여운형의 수행비서로 활동을 하며 정치가로의 길을 모색하던 이제황은 후일 여운형이 좌익에 동조한 것을 이유로 열혈 청년들에게 제거되자 이것을 계기로 정치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1932년 창립된 조선유도연맹의 운영에만 전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계를 떠난 이제황은 유도활동에만 전념하고 1948년 대한유도회 이사와 유도연구원장을 지내면서 1953년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학교) 창학기에 학감을 역임하면서 실질적인 학교의 운영을 담당하며 학교의 기틀을 잡는데 정성을 쏟았다. 또, 1956년에는 대한유도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유도회의 발전에 기여했을뿐만 아니라 1964년 동경올림픽때에는 아시아 유도연맹 정기총회에 회의 대표로 참가하는 등 한국 유도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업적을 계기로 1957년에 서울신문사는 한국체육상 중 지도부분에 관하여 이제황을 표창하게 되고, 정부는 1971년 4월 석류훈장을 수여하였다.
이제황은 경기인출신이지만, 현역은퇴후 후진양성 분야에 종사하면서 행정, 학술연구 등 폭넓은 분야에 관여함으로써 폭넓은 성과를 이룬 것으로 유명하다. 주목할만한 선수생활과 유도행정가는 물론, 학술연구에 많은 노력을 했다는 증거는 1950년 ‘신유도’를 발간했고, 이 책은 1955년 영어로 번역돼 ‘유도의 정신’으로 완성되기도 했다. 또 영문판에 이어 스위에서 독어와 불어로 번역되어 출판한 ‘유도정신과 화랑도’를 1959년에 탈고하였고, 1961년에는 ‘유도의 원리’. 1969년에는 ‘유도심판지침’을 발간하기도 하는 등 해방후 한국유도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컸다.
해방직후 화랑정신을 적용한 유도사상은?
그는 이러한 저서에서 고려시대의 유술을 언급했고, 유도의 원리, 그리고 유도선수가 갖추어야 할 도덕적 중요성에 대해 크게 강조했다. 또 화랑정신을 강조한 유도인으로서의 성장을 강조하면서 화랑정신을 잘 축약해 놓은 문구로 신라 원광법사가 창안한 ‘화랑5계 ‘를 강조하기도했다.
특히 유도학교의 교훈을’道義相磨 欲而爲人‘(도의를 갈고 닦아 사회에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자)라고 정해 지금도 용인대 교훈으로 정하고 있다. 이 교훈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자 도의상마는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진흥왕조에 나오는 내용이고, 후자인 욕이위인은 논어의 옹야편에 나오는 내용을 선별취합하여 만든 글이다. 이런 내용을 보더라도 신라화랑들의 수련철학이라 일컫는 ’도의(道義)‘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이제황의 업적에 대해 연구자들은 유도의 실기측면의 발전에만 관여하지 않고 많은 유도사상에 관한 저술을 남기어 한국유도가 신체만으로 발달된 기형적 모습이 아닌 정신까지 성숙한 모습을 보일 수 있게 하여 오늘날 근대유도의 종주국인 일본과 국제무대에서 기술적 발달이외에 정신적인 측면에서도 전혀 굴함이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는 공로가 크다고 정리하고 있다.
* 손환, 임석원(2006). 이제황의 생애와 유도사상에 관한 고찰, 한국체육학회지 45(1), pp.25-33
유도의 정신 서문
노자·공자를 비롯하여 동양의 선현들이 유와 강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유는 득(得)이요 도(道)요 화(和)하고 기(氣)로운 것으로 통하고 강(强)은 적개심으로 통하여 언제나 유는 강을 승복하고 제압할 수 있는 것으로 논술하였고 또 유(柔)의 뜻을 물에다가 비기어 순리로울때에는 둥글고 모진데 어디에나 따르지만 물이 합하여 물결을 이루고 성낼때에는 그 힘이 거칠고 세어서 막을 길이 없다고 하였다.
고대 중국 문무왕의 군사 태공망의 병서세략에도 유의 원리를 버들가지에 비기었고 돋아나는 나무의 싹과 같다고 하였으니 나무의 싹은 비록 부드럽고 약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잇는 굳센힘을 말함이다. 이러한 명설은 기술과 비교하면 과도한 추상적이라고 할지 모르나 실제의 기술로서의 유강의 비교도 정신적인 면과 별로 다를것이 없으니 부드럽고 강력성이 있으면 몸이 자유자재하게 움질일 수 있으므로 굳고 딱딱한 힘이나 기운이 견디고 당해내기 어려움을 실전을 통하여 증명되는 바이나 이러한 의미에서 유의 정신을 취행하면 유의 득은 곧 서양의 휴머니즘에 통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사랑 자비의 정신과도 합치는 되는 것이니 오늘 유도는 이렇듯 동양문화를 배경으로하고 인간형성의 진정한 영역에 위치하여 신체를 보다 건강하고 정신을 보다 건전하게라는 평화하고도 문화적목적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몽양 여운형은 누구인가?
몽양(夢陽)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견학하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발기했으며 1920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했다.
1929년 제령(制令) 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했다.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으로 일했고,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뒤 1944년 비밀결사체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했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安在鴻)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45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했다. 몽양은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던 중 극우파 청년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됐다. 그는 덴마크체조를 보급하기도 했으며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제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오마이뉴스, 2005년 1월 25일자 기사 참조)


댓글 작성하기
-
이제황이란 분이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군요 대단합니다.
2006-03-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0 -
세상이 어지러울때 무도인이 일어섰다. 그러나 지금 우리 세상에 무도인들은 무엇을 하는가? 단증장사, 권력다툼, 승부조작 불쌍한 무도인들. 이것이 쓰레기 무도를 만드는 싹이 아닐른지.
2006-03-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0 -
생을 마감하면서 10단을 받은 이제황선생의 깊은 뜻은 지금 무도인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10은 곧 0. 무소유에 현존하지 않는 수가 될것이다. 지금 살아 있는데도 10단을 받은 위대한(?)사람들은 자신이 神이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무도인으로서 부끄러운 처사가 아닐까. 이제황선생의 당시의 노력을 보니 지금 내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2006-03-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0 -
근대이후 일제를 거쳐 해방직후 화랑도를 논한 이유를 알겠군요. 유도의 경우 상당히 고민한 흔적이 나타나는군요. 아쉽지만 이것이 지속되었으면 좋았을텐데요. 태권도도 좀 심도있는 고민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2006-03-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0 -
유도인이여 공부좀 합시다. 정말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2006-03-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0 -
좋은글입니다.
2006-03-0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