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에서 잠을 깬 모구(毛毬)
발행일자 : 2005-10-11 00:00:00
박춘식 기자
모구란 싸리나무로 구를 만들어 가죽으로 싼 공을 1인이 말을 타고 끌고가면, 1인 이상이 말을 타고 따라가면서 활을 쏘아 구(毬)를 맞추는 것이다.
모구는 요나라(947)에서 발생 하였으며, 조선에서는 1424년(세종6년)경희루에서 처음으로 모구를 시작 하였다. 조선 중기, 중종 이후로 실전 되었다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1606년(선조39)에 다시 복원되었으며, 1631년(인조9년)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사) 한민족 전통 마상무예격구협회에서 복원하여 1998년과 2003년에 시연을 하였고 이후 많은 문화제를 통하여 알려왔다.
모구와 관련된 자료는 너무도 빈약 하지만 「무예도보통지」와 「조선왕조실록」에서 모구와 관련된 기록을 발견 할 수 있어 귀중한 우리문화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마상무예의 하나인 모구는 「무예도보통지」와「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이 되었다. 모구는 기구(氣毬)라고도 한다. 모구는 가죽으로 싸리나무로 된 구를 싼 것으로 큰 것은 수박과 같다. 소위 기구 라는 것과도 같다. 기구라는 것은 위에 고리 하나가 더 달리고 실로 끌어 매여져 있는데, 말 타고 끌고 가면 촉이 없는 화살로 뒤따르면서 쏜다.
금사예지(金史禮志)에 이르기를,
“사류격구(射柳擊毬)의 놀이는 요나라 풍속이다. 단오날에 배천례를 마치고 삽류구장은 박으로 그 가지에 표시하고 땅에서 두어 치까지 그 껍질을 벗겨 희게 한다.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달리며 끌면 뒤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서 깃도 없고 촉이 가로 질러져 있는 화살을 쏜다.” 하였다.
모구는 1인이 말을 탄채로 구를 끌고 달려나가면 또 다른 1인이 구를 쫓아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는 것이지만, 구를 지상에 놓아두고 서서 활을 쏘아 맞히기도 하였다.
「중종실록」 중종28년 5월13일 정원에 전교 하였다.
모화관에서의 관무재에 관한 초기(초기)는 이미 계하 하였다. ‘기사는 2차로 하는데, 활을 세 번 쏘고 창으로 세 번 던진다. 모구로 작은 과녁을 만들어 1백보 거리에서 화살 5섯 개로 다섯 번 쏜다. 다른 재예가 많기 때문에 작은 과녁은 다섯 번 쏘기로 하였다. 이제 무신 가운데 당상관과 당하관 10인이 좌우편으로 나누어 한편이 각각 5인씩 되게하라. 단, 이들은무재가 있는자가 있으니, 병조에서는 모름지기 궁품(弓品)을 고르게 나누어 주고 작은 과녁을 쏘게 하여 승부를 결정하게 하라. 이긴 편에게는 아마(兒馬)를 사급 할 것이니 , 아마10필을 근처 소나무 아래 매어 여러 사람이 보게 하라. 당상관과 당하관을 통틀어 으뜸인 자에게 양마(良馬)를 사급 하겠다’ 하였다.
모구는 무예 수련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만큼 군을 사열 할 때도 모구를 시험하였으며,이 때는 제장을 비롯해 사복시, 내금위 등 무신과 무사에게 모구를 하게 하였고, 우등한 사람에게는 칼과 활 등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모구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꾸준히 시행 되었으나, 조선 중기 1533(중종28)의 기록 이후 사라 졌다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 하면서 1603년(선조36)에 다시 시행되지만 1631년(인조9)이후 사라졌다.
모구는 기마병들의 필수 훈련 과목이었으며 서있는 적보다는 움직이는 적을 쫓아 살상을 하던 기마병들의 매우 뛰어난 훈련 과정을 알 수있다. 이렇듯이 우리 선조들은 당시 화력이 가장 강한 기마부대를 운용하였다.
모구는 21세기 긴 잠을 깨고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미래 새로운 기마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될 모구는 청소년들에게 보급을 하고 있으며 이들은 바로 우리의 내일이다.
참고 - <모구제원>
1. 재질 : 지지대-싸리나무, 겉면-양털
2. 크기(지름) : 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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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구 화이팅/
2007-06-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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