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설록의 江湖이야기>무협소설이 대접받긴 ‘영웅문’ 이후

  



시간을 30년쯤 되돌려서 1970년대 후반의 대본소로 가보자. 박정희 군사정권의 시대가 계속되고 학생 데모대들은 무협지 몇 페이지 몇째줄에 암호를 심던 그때, 곰팡내나는 서가와 딱딱한 나무걸상의 대본소를 들어서면 한쪽 벽면을 도배하듯 차지하고 있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와룡생(臥龍生)이다.

60년대의 거국적인 환호와 찬사를 뒤로 하고 무협소설은 동네 후미진 곳, 때론 자전거도 올라갈 수 없는 언덕배기에 자리한 대본소, 속칭 ‘만화가게’란 곳에 정착하고 말았다. 70년대 초 대만작가 와룡생의 옥차맹(玉叉盟)이 군협지(群俠誌)란 이름으로 신문 연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단행본 세트로 발간되면서 시작된 무협소설 시장은 ‘책을 빌려주고 돈을 받는다’라는 대본소의 기본 정책과 맞물려 떨어지면서 일반 서점이나 책방에선 구해볼 수없는 희귀종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독자가 직접 사보지 못하는 대본 유통의 희생자가 된 무협소설로선 불행한 일이었지만, 와룡생이란 이름은 대본소 주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고, 출판사는 재빨리 대본소 주인들의 비위에 영합하여 이후 들여오는 모든 무협소설의 저자를 와룡생으로 바꿔버렸다. 중국 무협소설에 대한 정보가 귀했던 당시로선 와룡생 이름이 붙은 작품은 당연히 와룡생이 쓴 것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고, 와룡생이란 이름은 이후 무협소설의 대명사가 되었다.

일반 독자들이 무협작가에 대한 제대로 된 정보를 갖게 된 것은 아마 1986년 고려원에서 나왔던 영웅문(英雄門) 이후부터일 것이다. 김용(金庸)의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신조협려(神雕俠侶),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의 세 작품을 각기 1, 2, 3부로 하여 나온 이 작품은 300만부라는 경이적인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이후 출판사들은 경쟁적으로 과거 무협소설들을 출간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저자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조환정(趙煥亭), 왕도려(王道廬), 이수민(李壽民) 등의 구파(舊派) 작가와 소일(蕭逸), 제갈청운(諸葛靑雲), 사마령(司馬翎),운중악(雲中岳) 등의 신파(新派) 작가들이 다양하게 소개되었다.하지만 그 어떤 작가도 양우생(梁羽生), 김용, 고룡(古龍)이 이룬 성취를 따를순 없었다.

홍콩 신만보(新晩報)에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란 작품을 발표하면서 화려하게 등장한 양우생과, 소오강호, 천룡팔부, 녹정기 등의 대작 시리즈를 쓴 김용의 깊은 필력, 무협에 추리와 미스터리를 섞어 넣은 고룡을 일컬어 신파 무협소설의 삼대가(三大家)라 일컫는다. 평론가이자 작가인 나립군(羅立群)은 ‘이 세 명이 각기 특징이 있는데 양우생은 무림장자(武林長者), 김용은 무림맹주(武林盟主), 고룡은 무림괴걸(武林怪傑)이다’라고 쓰기까지했다.

작가들이 각기 제 이름을 찾아가는 시대에 무협소설 또한 제 위치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대본소에서 책을 빌려줄 때 저작료를 징수하는 방법을 검토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고사(枯死)중인 무협과 만화계를 위한 고육책의 일환이겠지만 무협소설과 만화책을 비디오나 노래방과 같은 개념으로 파악해선 안된다.

무협과 만화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가치를 꿰뚫어보고, 다양한 문화상품으로의 시장 변혁을 계도해 주어야 한다. 쥐꼬리만한 저작료 몇 푼을 받게 해주고 해마다 가정의날, 어린이날에 ‘복날개패듯’ 두들겨 패는 행태를 계속해서는 무협과 만화의 발전은 아직 요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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