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장사 공성배의 모래판] 일제 강점기 종로에서 열린 격투쇼


  

종로 단성사와 유각권(柔角拳)의 실체

1976년 6월 26일 일본 부도칸(武道館)에서는 세기의 관심을 끄는 초특급 경기가 열렸다.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와 미국의 무하마드 알리의 이종(異種)간 격투 경기다.

 

프로 레슬러와 복서가 경기를 펼친다는 것은 경기규칙이 다른 만큼 그 시합의 성립은 모호하다. 당시 이들 경기역시 말도 안 되는 경기규정이 적용됐다. 이노키는 태클이 금지되었고, 알리는 누워 있는 상대에게 펀치를 날릴 수 없다는 시합규칙이 합의됐다.

 

이렇다보니 일어나면 맞을 것을 염려한 안토니오 이노키는 처음부터 누워 일어나지 않았고, 알리는 이노키가 일어나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며, 링을 돌기만 했다. 모두가 기대했던 경기였지만 실제 경기는 1회전부터 15회전까지 누워 있고 링만 도는 두 선수의 모습이 반복되다 끝났다.

 

1만 4천 명의 관중을 끌어 모아 놓고 대전료만 챙기는 쇼가 되어 버린 세계에서 가장 싱거운 종합격투기 대회를 한 선수들이 되어 버렸다.

 

이 대회에서 알리는 비공식적으로 4백만 달러의 대전료를 보장받은 것으로 알려져 그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경기규칙은 경기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 이미 예견된 결과였다.

동아일보 1978.11.07. 알리와 이노키 격투기 한국 개최키로 가계약 출처: 동아일보

이노키와 알리의 대전이 최초는 아니다.

 

이미 일제 강점기에 경성의 조선에서 1912년 유도와 씨름, 권투를 하는 이들이 출전한 유각권(柔角拳)이 있었다.

 

유각권(柔角拳)은 유술(유도), 각력(씨름), 권투의 앞글자만을 따서 당시 단성사 대표였던 박승필이 유각권(柔角拳) 구락부(俱樂部, club)를 만들고 격투경기를 개최한 것이다.

 

당시 국내에 유도와 권투가 유입되었고, 전통적인 씨름이 있었던 상황에서 이들 중 누가 강하고 세냐는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는 이 경기에 매료된 관중들은 매일 성황을 이루었다고 당시 신문들은 보도했다.

 

도대체 유각권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방식의 경기를 하였을까?

 

1978년 <경향신문> 3월 20일자에는 ‘얘기로 풀어본 한국 스포츠 80년, 건달들도 출전한 복싱대회’란 기사에서 “1912년 10월 7일 단성사 주인 박승필은 유각권(柔角拳) 구락부(俱樂部)를 만들고 단성사에서 유술, 씨름과 함께 권투 경기를 열었다.”라면서 당시 권투의 효시를 설명하면서 유각권이 거론되었다.

 

또 1912년 매일신보 10월 9일 보도자료에는 “동구안 단성사에서 흥행하는 유술, 권투, 쓰름(씨름)계가 서로 점수의 다소를 취하여 상품을 분급한다.”라고 해 이 세 종목이 포인트제로 경기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999년 조선일보 7월 2일자의 ‘이규태 역사 에세이’에서 좀 더 알 수 있다.

 

“1920년 6월 20일 밤 경성공회당에서는 미국, 러시아, 인도 등지에서 온 권투선수와 일본의 유도선수, 그리고 한국의 씨름선수가 맞붙은 소위 유각권(柔角拳)에서 한국장사가 서양 권투선수와 싸우다 맞아 쓰러지면 관중 속에서 다른 장사가 뛰어올라 맞붙어도 되는 이상한 경기였고, 어찌나 인기가 있었던지 단성사에서는 정기적으로 이 유각권 경기를 열었다.”

 

매일신보 1921년 6월 24일 출처: 국립중앙도서관고신문

또 이와 유사한 신문기사들도 있다. 1921년 매일신보 6월 24일에는 ‘권투와 유술 대경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2일 오후 7시부터 세계에 유명한 서양인 권투가의 권투와 내지인(조선인) 유도의 경쟁이 경성공회당에서 있었는데…. 권투가로 말하면 한번 주먹으로 어떠한 사람이든지 때리기만 하면 즉사할 지경이며, 내지인들은 권투법은 없고 유술로 대항하는데…. 강낙원 씨는 권투가로 유명한 인도인을 비술로써 용맹히 이겨버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만으로는 경기규칙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유각권(柔角拳)이 유도, 씨름, 권투 경기의 혼합 종합격투기의 성격은 있는 것일까?

 

여기서 ‘장사’는 씨름꾼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내용만으로는 씨름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왜 씨름 포함되었을까? 당시만 해도 덩치 큰 사람이 경기를 하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에게 익숙한 ‘장사’를 ‘씨름’과 연관해 해석한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유각권(柔角拳)은 유도, 씨름, 권투를 혼합한 포인트제 경기가 아닌, 바로 당시 일본에서 흥행하던 격투형태의 경기였다.

 

각국의 레슬링이나 권투 챔피언들이 상금을 놓고 시합하던 시절이다. 현재의 프로레슬링과 유사한 이벤트였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들은 이러한 격투기가 쇼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박승필은 서양의 남녀 복서나 레슬러들을 불러 모아 ‘유각권(柔角拳)’을 만들어 상업적 이익을 꾀한 것이다.

 

이러한 격투 경기가 흥행하자 1920년 단성사에서는 열흘간 경기를 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스포츠관련 협회 관계자에 박승필은 어떠한 역할도 없었다는 점에서 유각권은 기존 체육단체협의체의 개념보다는 이종간 격투경기를 하는 클럽(구락부)이었고, 이 클럽을 중심으로 단성사에서 경기대회를 개최해 수익사업을 한 실체로 이해할 수 있다.

 

※ 공성배 교수는 1990년부터 LG증권씨름단에서 민속 씨름선수로 활약했으며선수시절 3차례 금강장사 정상에 올랐다前 대한씨름협회 상임이사이며現 용인대 무도스포츠학과 교수한국스포츠사회학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글. 공성배 교수 = 용인대학교 ㅣ press@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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