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타이 집중조명] ② 롭부리 시대의 무에보란


  

태국과 캄보디아의 복잡미묘한 역사를 무에타이를 통해 살펴본다.

태국 방콕국립박물관의 롭부리 시대 '린텔'(Lintel) [사진 : 권석무]

'롭부리'(Lopburi)라는 단어는 일반적으로 태국의 특정 예술 양식을 이야기한다. 중국에서는 '고면속라과'(高棉屬羅渦)라고 불렀다. 현재까지도 태국의 행정구역 중에 롭부리라는 지역이 존재한다. 이 명칭은 '라보', 즉 '라바푸라' 왕국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이들의 이름에서 인도 '라마야나' 서사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기원후 7세기경부터 13세기에 이르는 롭부리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수나라가 고구려를 재침했을 시기부터 고려의 무신정권이 몽골의 침략에 무너져가던 시기까지다.

 

역사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라보 왕국의 크메르 제국 지배 이전 시기를 라보 시대, 지배시기를 롭부리 시대라고 한다. 태국에서 롭부리 예술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후 7세기경이었고, 태국 중부에서 시작하여 동부, 북동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방콕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Bangkok)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자세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라보 왕국의 동쪽에 위치해있었던 크메르 제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롭부리 문화가 태국 중부에서 처음 시작하여 동부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해양 세력이었던 자바를 통해서 인도의 선진문물을 수용했던 크메르 제국이었기에, 태국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중부에서 롭부리 문화가 최초 발생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태국 중부지역에서 롭부리 문화가 시작되어 동부, 즉 크메르 제국 본토로 확산되었다는 태국 방콕국립박불관의 설명은 문화전파의 관점에서 계고가 필요해 보인다.

 

기원후 7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롭부리 양식 건축물과 불상들은 힌두교와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방콕국립박물관에서는 롭부리 시대에 대해서 라보(태국)와 크메르(캄보디아) 사이의 문화적 교류가 융성했으며, 서로가 사상과 종교를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했다고 설명한다.

 

태국 방콕국립박물관의 힌두교 비슈누 신상 [사진 : 권석무]

하지만 이 시기에 라보 왕국은 명백하게 크메르 제국의 영향권 아래서 통치된 식민지였기 때문에, 롭부리 시대에 라보 왕국과 크메르 제국이 대등한 위치에서 문화 교류를 이루었다는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설명과 사료 사이에 온도차가 남아있다. 이 시기의 예술과 문화양식들은 사실상 태국과 캄보디아 양국 모두 대동소이하다. '태국의 크메르 제국풍 양식' 이라는 수식어로 롭부리 시대가 설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선 롭부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크메르 제국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크메르 제국은 기원후 802부터 1431까지 존재한 당시 인도차이나 지역의 패권국이었다. 중국에서는 고면’(高棉)이라고 했다. 이 기간은 우리 역사에서 통일신라 중기, 즉 발해와의 남북국 시대부터 조선의 세종대왕 재위 14년까지 이른다.

 

크메르 제국 이전의 캄보디아 역사에는 크게 '후난' 시대와 '첸라' 시대가 있다. 후난은 기원후 50 또는 68에 건국되어, 기원후 550 또는 627에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후난', '분농', '츄놈' 등으로 불렸고, 현지에서는 '노코르 프놈' 시대라고 불린다.

 

이는 '산'(山) 왕국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 시대는 부족국가의 형태로써 중앙집권적 형태의 국가는 형성되지 않았다. 후난의 건국신화는 마치 우리의 단군신화와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 건국신화에서는 크메르의 고유의, 그리고 현재 태국과 무에타이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뱀 숭배 신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기원후 4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과거 참파 왕국에 건립되어 현재 베트남 중부 '꽝남성'에 위치한 미선 유적에서 발견된 산스크리트어 비문에 후난 건국신화의 내용이 남아있다. 기원후 658, 중국 사신의 전언을 적은 이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있다. 서쪽에서 브라만 계급의 청년이었던 '카운디냐'가 꿈에서 브라만교의 창조신, '브라흐마'로부터 동쪽으로 향하여 새로운 땅을 찾고, 도중에 큰 나무 밑에 활과 화살을 챙기라는 계시를 받는다.

 

카운디냐가 지금의 캄보디아 지역에 도달하자,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나가' 신의 군대가 이끄는 함대와 마주쳤는데, 카운디냐가 신의 계시대로 챙긴 활을 쏘아서 군대를 굴복시켰다. 이 군대를 이끌었던 대장은 '소마'라는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나가의 딸,  공주였다. 카운디냐는 소마 공주와 결혼하고, 공주의 아버지인 나가 신은 물에 잠겨있었던 대지를 들어나게 해서 그 새로운 땅을 카운디냐에게 다스리도록 했다는 이야기다. 훗날 카운디냐가 새운 왕국은 '캄부자'라고 불렸다.

 

이 신화는 마치 우리의 단군신화와 같이 특정 지역의 토착 세력과 이주 세력의 규합이라는 속뜻을 가진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나가 신은 뱀의 형상을 한 인도 힌두교의 반신(半神)이다. 후난 건국신화에서의 나가는 힌두교 이전에 캄보디아 토착민들의 뱀 숭배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인도계통의 이주 세력과 뱀을 숭배하는 토착 세력이 한 차례 갈등을 겪은 이후에 건국을 이루어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뱀 숭배와 인도계통의 이주 세력이다. 후난, 첸라, 크메르, 그리고 캄보디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에서 뱀은 생활 속에 밀접한 동물이다. 그리고 그들은 뱀을 숭배하고, 그 영향을 받은 태국에서도 이러한 토테미즘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태국의 신화뿐만 아니라, 전통 건축물들을 살펴보면 우리 한옥의 용마루와 처마 끝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항상 나가 신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놓고 보았을 때, 동일한 대상으로 용을 떠올렸던 우리 선조들과 나가 신을 떠올린 과거 크메르, 태국인들 모두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 모두가 동일한 문화의 맥을 공유하고 있다고도 조금은 앞서나가는 짐작을 해볼 수도 있다.

 

인도계통의 이주 세력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그들이 가지고 왔을 각종 문화의 총체! 이미 그 속에 무예가 있고, 종교가 있고, 역사가 있었을 것이 자명하다이 지역 사람들이 듣기에는 다소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스의 식민정책의 편의에 의해서 창조된 단어라는 측면을 배제하고서 '인도차이나'라는 단어를 살펴본다면, 그 지역의 문화 전파와 수용의 역학 관계, 그리고 역사를 너무나 잘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후난 왕국은 해상 중계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기원후 5세기부터 중국 세력의 개입으로 무역국가로써의 이익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익의 감소는 작아진 이윤을 차지하기 위한 내란으로 이어지게 되고, 당시 후난의 속국이었던 첸라는 중국에서 부남부속진랍’(扶南附屬真臘)이라고 불렸는데, 혼란의 틈을 타서 오히려 역으로 후난을 정복하고, 캄보디아의 패자가 되었다.

 

첸라는 기원후 550에 건국되어, 802까지 존속했던 왕국이었다. 중국의 수서; 隋書에서는 '진랍'(眞臘)이라고 표기했지만, 현지 발음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한문의 발음을 그대로 차용한 '첸라'라는 발음으로 불리고 있다. 첸라 왕국은 본격적으로 통일된 중앙집권 형태의 국가가 형성되어가는 시기였다. 전성기에는 메콩강 삼각주 지대까지 정복했지만, 이후 왕위 계승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크게는 북부의 '육진랍'과 남부의 '수진랍'으로 분열되었고, 특히 남부의 첸라가 지배했던 메콩 삼각주 지대에는 크고 작은 규모의 도시국가들로 더욱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자바 지역의 세력에게 남부 첸라가 복속되면서, 첸라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로 자바에서 포로생활을 지내던 자야바르만 2세가 캄보디아 지역으로 돌아오면서 자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크메르 제국이 건국되었다.

 

전성기에 크메르 제국은 동남아시아의 반도 지역 대부분을 정복했을 정도로 거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자야바르만 5세 시기에는 중국 송나라의 태조와도 6차례의 이르는 교류를 진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명나라 때의 모원의(茅元儀)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무비지; 武備志에 수록되어있는 송태조(宋太祖) 32세 장권(三十二勢 長拳)과 어떠한 연관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실제로 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에는 당시 중국인 용병들을 묘사한 회랑 부조가 남아있다.

 

문화적으로는 인도와의 교류가 확대되어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까지 수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힌두교 관련 유물들은 대부분 크메르 제국의 지배시기, 즉 롭부리 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인도와의 잦은 교류를 근거로 현재 캄보디아의 전통 무예인 '보카토', '쿤 크메르', 그리고 '프라달 세레이'의 뿌리를 찾아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자바 지역을 통해서 전파된 고대의 인도 권법이라고 캄보디아 현지 관계자들과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실제로 앙코르 와트를 비롯한 캄보디아의 여러 유적지를 살펴보면, 사원과 무덤의 회랑 부조에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된 전투와 결투 장면들이 이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태국을 비롯한 미얀마, 라오스, 베트남과 같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과거 크메르 제국 영토에 전체 혹은 일부라도 속해있었던 것을 고려해본다면, 당시 크메르 제국의 무예가 그들 지역에도 전파되었을 것은 지극히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당시 드바라바티 문화의 영향권이었던 라보 왕국은 크메르 제국의 지배하에 놓여있었다. , 라보 왕국에서 드바라바티 문화와 롭부리 문화는 공존했거나, 문화적 대세가 드바라바티에서 롭부리로 넘어갔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가 몽골(원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것과 같이 지금의 태국 중부지역은 크메르 제국 문화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태국 학계에서는 양 지역의 무예, 즉 태국과 크메르의 무예가 상호간에 교류를 주고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애초에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교류한 것이 아니기에 인도권법과 자바 지역의 무예를 수용하고, 거듭된 정복 전쟁을 통해서 발전했을 크메르 제국의 무예가 일방적으로 태국 지역에 전파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현재 태국 중부의 롭부리 지역은 크메르 제국 무예로부터 일방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이 매우 합리적이다.

<위 내용은 권석무 기자가 집필한 「태국의 혼, 무에타이」(2020)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무카스미디어 = 권석무 객원기자 ㅣ sukmoo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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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무 기자
무카스미디어 MMA, 주짓수, 무예 분야 전문기자.
브라질리언 주짓수, MMA, 극진공수도, 킥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무예 수련.
사람 몸을 공부하기 위해 물리치료학을 전공. 
무예 고문헌 수집 및 번역 복간본 작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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