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MCA권법부 윤병인의 스승 도야마간켄은 일본 최고의 무도인?


  

역사속의 태권도근현대사 12편 - YMCA 권법부 윤병인 4부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윤병인의 스승!“토야마 간켄”은 일본 최고의 이토스계 무도인!

 

윤병인을 통해 참다운 스승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인물! 도야마 간켄은 누구인가?

 

윤병인은 토야마 간켄(遠山寛賢, 1888~1966)에게 배우는 기간동안 4단을 획득할 수 없음에도  그에게 4단을 준것은 그만큼 윤병인의 탁월한 무술실력을 인정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는 1931년(43세) 도쿄의 아사쿠사 이시하마 초등학교 앞에 도장 「수도관」을 설립했다,

특히 1945년 제2차 세계대전후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무술금지령 속에 수도관의 토야마간켄 수제자인 윤쾌병(曦炳)선생, 금성유 선생등에 의해 한무관(韓武舘)설립했다.

 

이 때, 무술금지령으로 남아 있던 검도 보호대를 대련 보호대로 사용했다. “토야마 간켄(遠山寛賢, 1888~1966)”의 지도를 받은 한국인 제자들이 있는데 윤병인, 전상섭, 윤쾌병, 김기황 등 당시 한국의 걸출한 무도인들이다.

 

이것이 공수도가 "보호대를 부착"하는 효시가 되었다.(전일본공수도연맹 한무관 홈페이지(全日本空手道聯盟 韓武舘)

 

원문

1945年(昭和20年) 第二次世界大戦後のGHQによる武道禁止令の中、韓武舘が修道舘の遠山寛賢先生の高弟である尹曦炳先生、金城裕先生らによって設立。このとき、武道禁止令で余っていた剣道の防具を使用した「防具付空手」を開始する。

 

일본공수도박친회본부 청수도장 홈페이지에(日本空手道泊親会 本部 清水道場)에서 토야마 간켄(遠山寛賢, 1888~1966)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오끼나와 현출신으로 쇼와시대 1888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이토스 아스츠네 에게 사사받은 대표적인 가라테 명인중에 한명이다.

 

일본 근대가라테의 보급에 힘쓴 오키나와테가문의 한 사람인 토야마 간켄은 1888년 현 오키나와현 슈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이토스 야스쓰네, 히가시온나 간료 등에게 오키나와테와 무술을 배웠다.

 

공수도연구(1934)

토야마 간켄은 우리가 알고있는 공산군(公相君)의 전수자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토야마 간켄은 본인의 저서( "공수 연구」(1934)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치바가(知花家)의 가문에서 전해지는 것이 공산군(Kusanku)"라고 말했다. 즉, 이 형태는 치바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전의 형태였다고 한다. 슈리시 내의 초등학교에서 일자리를 찾던 토야마는 교장인 안촌良公 (Yasumura Ryoko)씨의 추천으로 작은 청년회관에서 주사로 임명되었다. 이곳은 청년독서, 오락, 수양, 운동등을 주로 했는데 이곳에서 치바가문을 만나 비전인 공상군을 전수받았다고 한다.("공수연구」공수(空手硏究) 30, 31p)

 

           원문

공산군은 옛날 류큐왕국(沖縄王國) 왕족이나 귀족의 집안의 고유 공수의 형태가 전승되고 있었다. 귀족들이 자식들에게 가르쳤다“나이한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형태는 일반적 비전이며, 가족외에는 가르치지 않았다. 불행히도, 이러한 형태는 류큐왕국의 멸망 후 대부분이 손실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이 치바公相군(Chibana Kusanku)은 기적적으로 오늘날까지 전승 된 귀중한 형태 인 것이다.

 


(원문요약)

知花公相君(Chibana Kusanku)の由来について、遠山先生(Toyama sensei)は上の引用文の中で「知花(Chibana)家に伝わるその派(Chibana-ha)の公相君(Kusanku)」と述べている。つまり、この型は知花家(知花殿内)に代々伝わる「その派(Chibana-ha)」の型であった。

昔、琉球では御殿殿内(Udun and Tunchi)のような王族や貴族の家には、それぞれ独自の空手の型が伝承されていた。本部朝勇(Motobu Choyu)が息子に教えた「ナイハンチ」も同様である。こうした型は通常秘伝であり、家族の者以外には教えなかった。残念ながら、こうした型は、琉球王国の滅亡後、ほとんどが失われたと思われる。その意味で、この知花公相君(Chibana Kusanku)は奇跡的に今日まで伝承された貴重な型なのである。



1924~1931년 대만에 건너가, 타이베이의 진불제, 타이중의 린헌당으로부터 중국 남권을 배우고 돌아와 1931 동경에 수도관(일본발음으로 슈토칸(修道館)을 설립한다.(공수도광도수도관 (空手道広島修道管 http://www.shudokan.jp/newpage4.html, 토야마寛賢-Weblio)


토아마 간켄은 1906년 18살의 나이로 오키나와현 사범학교에 입학할 당시 사범학교 사범은 이토스 야스츠네였고 재학 중에(1908~1910년)까지 그는 3년간, 이토스 야스츠네의 조교로 활동했고 1911년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 당시 이토스 아스츠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당수(唐手)의 기술을 익혔다.

 

1931년 동경으로 돌아와 동경에 수도관(일본발음으로 슈토칸(修道館) 을 설립한다.

 

1948년 “가라테 본가”라는 책을 집필한 후나고시는 이토스 야스츠네의 직계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후나고시) 오끼나와 사범학교 속성과정(1년)이었고 도야마간켄은 본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후나고시는 정통으로 이토스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특히 후나고시 1870년에 태어났는데 21살에 사범학교를 졸업했는데 졸업시기는 1891~1892년 쯤 되는데 이토스 야스츠네는 1905년부터 사범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했기 때문에 둘은 직접 사사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1905년이면 후나고시가 30대 증반쯤으로 한창 왕성한 무도욕심이 있는 나이고 많은 무도 수련을 해왔던 그가 이토스 아스스네에게 전혀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1930 년대 공수대가모임(왼쪽토야마간켄)

 각자 무술의 연관성이 있으므로 외부에서 만나 사사받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째든 이토스의 제자들 사이에 직계와 방계의 차별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 추정된다. 그는 “무류(無流)파주의”였기 때문에 본인의 유파명을 붙이지 않았고 유파 자체를 부정했다. 그 이론은, 「가장 엄숙해야 할 무술에, 자기류로 변행되어 바뀐 초식의 지기기법이 있어야 할 이치는 없다」라는 가장 근본적이고 지켜야할 말을 남겼다.

 

(다음편에 계속.....)

모든 역사의 동일한 흐름! YMCA 권법부의 분파!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장 관장 &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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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영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대한태권도협회 이사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11)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20)
아시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금메달(2022)
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윤병인 #YMCA #지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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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영

    내용수정부탁드립니다.. 내용의 사진은 저희 조부님인 윤쾌병박사님이 아닌 윤덕병회장입니다.. 수정부탁드립니다…

    2021-05-24 13:28:42 수정 삭제 신고

    답글 0
    • 엄재영

      아 그랬군요! 제가 실수했군요
      죄송합니다.
      교체해드리겠습니다.

      2021-05-24 14:18:34 수정 삭제 신고

      0
  • 사이비무예문화

    사이비무예문화는 갈수록 사회문제로 대두

    윤리가 실종되고 경쟁만능주의가 빚어놓은 사이비무예문화는 갈수록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윤리가 실종되고 경쟁만능주의가 빚어놓은 사이비무예문화는 갈수록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소통보다는 허위과장 생떼 천박한 문화가 우리무예계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사색과 인내심 진지한 토론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같은 현상으로인해 무예계의 자정력은 한계에 와 있고 더이상 스스로 해결할수 있는 치유능력이 상실한 상태다 이제부터라고 사이비무인들이 활개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올해 있을 전통무예종목지정시 무예에 대한 기원과 역사들을 철저히 검증하여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예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지켜주고 이어주는 정신이다 또한 이를 후대에 전해줘야하는것이 우리무예인들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업주의가 스며들면서 무예본질은사라지고 각종 사회병리현상만이 커지고 있다. 특히 상업주의에 편승한 사이비무인들에 의하여 갈수록 참 무인들이 설곳이 없어져 사라지고 있다. 물질적 발전에 걸맞은 가치관정립이 절실한 상황에서 남을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무인으로서의 소양이 없으니 동일종목간 타무술종목간 공감대가 없고 존중심도 없다 보니 그 틈새에 사이비무인들이 활개한다. 무인들이 갈망했던 이상 또한 사라지고 없다. 어쩌면 지리산이나 설악산과 같은 깊은 산중에나 가야만 참 무인들을 만날수 있을지 모른다.
    개인든 단체든 국가든 상식이 통해야만 한다 최소한의 윤리 와 도덕 그리고 규칙과 법률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한다. 윤리의식도 없고 법 상식도 무시되는 사회는 분명 병들어 있다고 할수 있다.
    우리무인들은 이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첨병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우리무인들이 그 같은 첨병역할능력이 아쉽게도 갈수록 많이 부족해 지는것 같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이비는 외모는 그럴듯 하지만 본질은 전혀다른,즉 겉과 속이 전혀다른 것을 의미하며, 선량해 보이지만 실은 질이 좋지 못하다."그래서 공자는 사이비를 미워한다 하였다.
    공자는 인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겉만 번지지르르하고 처세술이 능한 사이비를"덕을 해치는 사람"이라 하였다.원리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사이비가 활개를 치는 법이다.
    그들은 대부분 올바른 길을 걷지 않고 시류에 일시적으로 영합하며,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거나 말로 사람을 혼란시키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 이다
    지금 부터라도 무인의 한사람으로서 각각의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여 범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 변화된 무인들의 모습을 사회는 기다리고 있다 또한 변화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무인들이 참 무인으로 변화될때 무인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존경받는 무인으로서 우리사회에 다시금 그 중심에 있을수 있을것이다.
    유투브
    참고영상
    https://youtu.be/M_gP4awjdRE
    역사는 멀고 돈은 가까운, '전통'무예
    무예계 암적인 존재들
    정치무예단체유착

    2020-12-15 03:36:09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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