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무도인 YMCA 권법부 '윤병인'


  

역사속의 태권도근현대사 11편 - YMCA 권법부 윤병인 3부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조선 최고의 무도인!

윤병인은 어린시절 만주 지역에서 패망한 청나라 팔기군 무술 교관이었던 몽골인 사범으로부터 배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팔기군(八旗軍)을 자쿤 구사(jakūn gūsa)라고 칭하는데 청나라의 군사편제로, 유목민이었던 만주족의 최정예 부대이기도 하지만 신분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높은 문인들도 팔기제(八旗制)라 하여 팔기군을 통털어 가르키는 말이다.

 

윤병인이 익힌 권법은 팔기권 태극권, 장권과 봉술, 도술(刀術-검술)등이 있다.(이호성1 995, 서성원 2016) 이러한 윤병인의 기법은 손목과 팔목을 서로 부딛쳐 단련하는 기법이 많아 신체단련으로 적합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즐겨 수련했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팔기군은 청나라의 최정예부대 였으며 청나라의 내노라하는 무술고수들은 이 팔기군 소속이었고, 그곳의 교관이라면 윤병인을 지도해던 몽골사범은 상당한 고수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윤병인은 신념과 집념이 강하고 정통 무도인으로 생각된다. 당시 중국말도 잘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몽골 사범이 윤병인의 무술지도를 몇번이나 거절했지만 윤병인이 마당도 쓸고 잡일도 해주고 교습료도 두배로 냈기 때문에 결국 몽골사범이 본인의 무술을 사사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교습료를 두배로 낼 수 있을 만큼 윤병인 금수저 가문이 분명해 보인다. 윤병인은 수련함에 있어 상대와 시비가 붙어도 남을 다치지 않게 했다는 기록(무카스, kimsookarate)이 남아 있어 그의 무예실력과 겸손함이 얼마나 한결 같았는지를 말해준다.  

YMCA권법부"윤병인"

윤병인은 193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니혼(日本)대학에 입학하여 척식농학을 전공했고 이때 일본 근대가라테에 큰 영향을 미친 토야마 간켄 (遠山寛賢, 1888~1966)에게 수리테 카라테를 배웠다.(서성원 2016)

 

어려서 부터 무술을 익힌 윤병인은 당시 당수(唐手)의 고수였던 도야마 간켄에게 단번에 눈길을 끈다.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있다.

 

당수를 배우다 여자 친구와 데이트 때문에 하루는 수련을 빼먹었다. 이 일 때문에 당수부 수련생들에게 체벌을 당하고 도장에서 쫒겨났는데 그를 괴롭히는 수련생들에게 보호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그는 어릴때도 무인으로써 남다른 정의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도와 주기로 마음 먹고 당수부 수련생들을 제압했고 부원들은 패배를 인정했다고 한다.

 

이사실은 니혼대학에 삽시간에 퍼졌고 이를 알게 된 도야마칸겐은 그를 불러 그의 무술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제자로 받아주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당시의 상황이 일제 강점기였고 특히 일본 본토였다는 점에서 우리 태권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태권도인이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야하는지 역사가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도야마 간켄에게 윤병인과 함께 수리테(修理手)를 사사받은 조선인들은 김기황 (1921~1993), 윤쾌병(1923~2005 )등이 있다.

 

특히 윤쾌병 도야마 간켄의 수제자가 바로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한무관을 창설(이후 전일본공수도연맹 연무회)한 윤쾌병(尹快炳)으로 당시 가라테 7단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했고 전 (주)한국야쿠르트회장을 엮임했으며 현대 태권도에 많은 영향을 준 지(知),덕(德), 체(體)를 갖춘 인물로 병가받는다.

 

윤병인은 여기에서 무술 실력을 인정받아 가라테 4단을 받았다. 그리고 대학 가라테부에서 주장을 맡아 활약했다.(허인욱 2008, 김병수, 2011, 최점현 2008)

 

하지만 그들의 제자들인 박철희, 이교윤, 등은 니혼대학 당수부에서 수련을 했을 당시 주장의 실력을 뛰어 넘은 사범정도의 수준이었으므로 주장(主將)이 아닌 사범으로 격상을 하여 기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박성진 인사이드 편집장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도야마 간켄은 젊은 윤병인의 무술가로서의 재능을 인정하고 제자로 삼아 가라테를 가르치면서도 윤병인의 권법에서 배우고 느끼는 점도 있었을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이 배움의 연장이고, 제자에게도 배우는 점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관계를 사제지간이 아니라 마치 동급의 무술가가 서로 교류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박성진 무카스 2012)

 

당시 도야마 간켄을 50대였고 윤병인은 20대 초반이었으므로 둘을 동급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무도계에서는 있을 수 없었을 수없는 일이다. 하지만 윤병인의 무술실력이 상당했음을 보여주었고 도야마 간켄은 일본인이지만 무술을 지도함에 있어 차별하지 않는 진정한 무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YMCA권법부"윤병인"

윤병인이 중앙기독교청년회 YMCA권법부를 창설할 당시 그의 1기 제자인 박철희는 지세한 설명보다 몸으로 직접보여주며 엄격하게 가르쳤다.(최점현 2008)

 

또 창무관 3대 관장인 김순배는 한마디로 정통무도인이었다. 체구는 작고 왜소하고 신발도 끔지막한 미군군화를 신고 다녀 자신을 꾸미거나 멋부리지 않고 수수하게 다녔다. 왼손가락이 여러개 잘려 나갔는데 더운 여름철에도 힌장갑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강원식, 이경명 1999, 허인욱 2008, 서성원 2007)

손가락이 잘려 나간것은 만주에서 마적단의 장도를 막다 절단되었다는 설, 겨울철 동상이 걸려 빙초산이나 다른 화학약품에 담겼다가 잘려 나갔다는 일설도 있다.(서성원 2007)

 

그는 집체 수업을 하는 것보다 수련생 개개인에 신체조건에 맞게 특성을 살려 무술슬 지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 퍼스널트래이닝(personal training)개인지도와 같은 앞서가는 교육을 지도했음을 시사한다.(허인욱 2008, 강원식 이경명 1999 서성원 2007)

 

관원의 증가에 따라 1947년 3월3일 체신국 경동 중⦁고등학교, 성균관대학, 정치대학 등에서 권법부를 개설하여세력을 확대해 나갔다.(경경원 2012)

 

1949년 임승덕과 결혼해 딸 윤영숙을 낳았고 6,25가 일어나기 하루전 1950년 6월 24일 연무대회를 개최하는 것이 남한에서 그의 마지막 무술시범이었다.

 

1950년 8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왜 수용되었는지 알수는 없지만 당시 이동주(강무관창설자)등 제자들과 함께 수용되었고 제자들은 윤병인을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그는 남측에서 가족들과 살기를 원했지만 1951년 7월 휴전협상때 맏형인 윤병두가 북한인민군 대위로 나타나 북으로 함께 가자고 하고 그를 북으로 대리고 갔다.(허인욱 2011, 서성원 2016)

 

그의 무술실력을 북에서도 인정받았다. 1966. 01~1967. 08까지 북한정부 체육위원회에서 격술 지도원으로 북한군 모란봉 특수부대원들에게 교육했다고 한다.

 

격술이란 북한의 군 무술로 우리나라 군무술 특공무술처럼 특수전 대원들을 훈련시키는 무술로 이스라엘에 크라브마처럼 손기술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이 기간중 북한 체육위원회는 그를 결혼 시킨다. 그리고 딸과 아들 윤태원의 두자녀를 얻는다. 이는 남측에 가족이 있어 혹시 변절될까 두려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격술을 국제 스포츠로 키우고 싶었던 북한은 그에게 격술을 스포츠로 만들어줄 것을 요구하지만 격술은 스포츠가 될 수 없는 무도임을 끝까지 고집했고 격술이 잠시 북한군에서 취소되었다.

 

윤병인이 무도에 대한 신념과 정신이 얼마나 깊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를 거부한 것을 계기로 1969년 혹은 1970년 함경남도의 시멘트공장으로 보내진후 이곳에서 일했다. 안탁깝게도 그는1983년 4월3일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허인욱2008)

 

그의 무도에 대한 신념과 올바른 자세, 정신, 여정은 참으로 본받고 귀감이 될 만한 내용들을 사료들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현 무도계에 경종을 울 릴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격술은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데 연합뉴스 2013.12.28.자에 보면 북한 김정은이 국방위원회 인민군 제3168부대 제695군부대 군인들의 격술훈련장을 참관해 격술시범을 관전해다고 한다(연합뉴스 2013. 12. 28)

북한의 격술

 

(다음편에 계속.....)

윤병인의 스승 “토야마 간켄”은 일본 최고의 이토스계통의 무도인이다!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장 관장 &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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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영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가르친다.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현)2020년 대한민국 품새 국가대표
현)국기원 강사 / KTA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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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하고 기록하다

    일제,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선 피눈물이…

    반만년이면 긴 세월이다. 반만년 빛나는 역사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륙의 끝자락에 붙어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하면 지나친 자기비하인가.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래도 6·25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시련을 겪고도 세계가 부러워하는 번영을 이룬 것에 대견하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내 나이쯤 되는 사람은 피난 보따리 등에 지고 포성이 울리는 피난길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배는 고파 쪼르륵 소리가 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먹는 것으로 보였다.

    요즘 밥투정, 반찬투정하는 애들을 보면 이만큼 살게 된 조국 대한민국이 고맙다. 우리 국민은 외국에 나가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산다. 전에는 쪼그리고 살았다.

    우리는 이제 경제대국이다. 그러자 일본이란 이웃이 심술을 부린다. 사촌이 땅을 사서인가. 겁이 나서인가.

    ■이웃사촌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웃도 이웃 나름이다. 내 기억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이웃이 있다. 돈푼깨나 있어서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도 자가용 굴리고 애들도 좋은 옷 입고 목에 힘주고 다녔다. 동네서 웬만한 애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다.

    잘 살면 어려운 이웃도 배려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좋은가.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지 않던가. 결국, 그 집은 사업이 잘못돼서 폭삭 망했다. 빚쟁이가 모여들고 차압당해 빈손으로 쫓겨나는데 보기에 참 그랬다. 평소에 이웃에게 잘했으면 따뜻한 위로라도 받지 않았을까.

    요즘 나라가 시끄럽다. 이웃 나라인 일본 때문이다. 아니 ‘아베’라는 인물 때문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흐르는 물도 발원은 찾으면 산속 옹달샘인 경우가 많다.

    작금의 발생한 일본의 경제침략을 보면 그 뿌리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섬나라 일본은 무척이나 우리를 괴롭혔다. 해안을 무단으로 침범해 약탈했다. 왜구라 했다.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은 간이 부었다. 그가 저지른 것이 바로 임진왜란. 끔찍한 재앙이었다.

    ■경제침략의 주범·전범, 아베 가문

    아베의 가문은 한마디로 ‘침략의 가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친손자가 현재의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다. 또한,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1879년 일본 이시카와현(石川縣)에서 태어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1944년 7월 24일 일본의 제9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시기 조선 총독을 지냈다.

    그는 1944년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취임하여 전쟁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착취해 갔다. 조선 총독으로 부임 후 전쟁 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하면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때리기도 했다.

    이 자는, 일본이 항복하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한국을 떠나는데, 그때 남긴 가증스러운 말이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일제강점기)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어떤가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또한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만주국을 건설하며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투쟁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무력화시켰다.

    그는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에서 고위 관료로 일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전쟁 물자를 관장하는 군수차관과 상공장관을 지냈다. 일본 패망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수감되었으나, 냉전이 격화됐던 시기인 1948년 성탄전야에 공직 진출 제한을 조건으로 석방된다.

    1952년 공직 진출 제한이 풀리자 '자주헌법 제정' 등을 슬로건으로 내건 일본재건연맹을 설립해 정치를 재개했다. 일본 재무장 신호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1955년 11월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초대 간사장이 됨으로써 이른바 자민당 55년 체제를 열었다.

    이후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 시절에 줄기차게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군국주의 부활이다. ‘아베 신조’가 이번 선거로 노렸던 것은 선제공격이 가능하도록 평화헌법을 바꿀 수 있는 개헌의석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전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한의 실패를 했다. 아베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이번 경제침략이다.

    아베의 의식 속에 한국은 일본의 노예로 각인되어 있다. 노예가 상전과 동격이 되려고 한다는 생각이다. 견딜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과의 동격은 안 된다. 그게 바로 아베가 일으킨 경제침략의 가장 확실한 동기다.

    ■온 국민이 하나로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아베의 경제침략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한반도 지배야욕의 한 축이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 국가 중 한국을 꼭 집어서 배제했다. 한국의 목을 졸라서 죽이겠다는 결의다. 전쟁은 시작됐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비장한 결심으로 싸워야 한다.

    맹수가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하물며 일본이란 거대한 적과 전쟁을 하는데 온 몸을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국회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술 취해 비틀거리며 횡설수설 예산을 심의할 수는 없다. 추경 통과에 100일이 걸려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온 국민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한다.

    아베야. 너는 네 조상들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을 듣지도 못했느냐. 우리 속담에 ‘간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다’는 속담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잇따른 조치는 한·일 양국, 나아가 세계의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적 경제협력체제를 위협하고, 한미일 안보 공조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처사다.

    비록 예결위원장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어도 추경은 통과됐다. 정부는 일본의 조치에 대응해 소재와 부품 기술개발과, 관련 기업 자급지원 등에 쓸 2,732억원의 예산을 신속하게 집행해야 할 것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도 당연히 파기해야 한다. 내 눈에 피눈물 나게 했는데 너는 웃게 해 주겠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은 무엇인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의 발전이다. 한국이 발전하고 계속해서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 성장하는 것은 아베에게 있어서 담마진(두드러기)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해야 한다.

    더구나 남북한의 평화는 일본에 공포다. 고속으로 추월해 오는 한국의 발전이 너무 무섭다. 만약 남북한이 손을 잡으면 어찌 될 것인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베에게 묻는다. 우리가 일본을 침략한 적이 있느냐.

    한국이 북한에 전략물자 최신 소재를 보낸다는 개가 웃을 소리로 아베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재를 일일이 일본 정부가 허가하겠다는 것이다. 목을 죄겠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제외 국가로 묶어 놓은 일본의 폭거를 정상적인 머리라면 누가 인정하는가. 아베가 착각했다. 한국이 무릎을 꿇을 줄 알았는가. 아베는 지 할배가 총독으로 군림하던 때를 생각했는가.

    도대체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세상이 다 아는 일본의 억지를 쳐다만 보고 있을 것인가. 누가 편들어 달라더냐. 할 말을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미국이 방관해도 우리는 싸울 것이고 반드시 승리한다. 배 12척으로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을 우리 국민은 지금 가슴에서 불태우고 있다.

    다시 임진왜란이 떠오른다. 수백 명의 일본 낭인 패들이 궁궐을 넘어 일본도로 명성황후를 살해한 끔찍한 만행이 생각난다.

    우리는 철통같이 뭉쳤다. 일본의 경제침략 야욕은 노량 앞바다에 수장된 왜선의 비참한 몰골로 사라질 것이다. 아베는 사람으로 돌아오라. 그것만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야 한다.

    2020-11-08 09:29:43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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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도

    요즘 사이비단체들이
    무예계를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다.
    불과 2~30년 사이에 동일한 무예종목이 수십 개의 단체로 분파되면서 제자가 스승을 배신하고, 선배와 후배 간의 질서가 무너져 버렸다. 이 때문에 무예계에서는 상호 비방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다.심지어 자신의 무예 경력을 속여 가며 수련생들을 모집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가짜들은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무예단체장을 맡아 해당 단체를 수렁에 빠트리기도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수련한 무예와는 전혀 다른 무예종목의 단체를 설립하고 무력(武歷)을 속여 무예계를 어지럽히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단체만을 해롭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무예계 전체에 해악을 끼친다.
    이쪽저쪽을 기웃거리면서 남이 일군 업적을 자신이 만든 것으로 포장해 사기행각을 벌이는가 하면 전통무예라고 고집하고 있지만 뚜렷한 자료조차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가면을 쓴 가짜 무예인들은 전통무예를 전수한다면서 스승조차 밝히지를 못하는 실정이다. 외래무예를 전통무예나 창시무예라고 주장하는 가짜들의 언행이 무예계 전체를 욕 먹이고 있다.전통무예진흥법이 시행 된지도 10년이다. 전통무예 종목지정 역시 목전에 다가왔다. 이제는 무예인 스스로가 계보와 무력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무예계가 올바로 설 수 있다.

    2020-10-08 13:50:54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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