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포로로 기록된 새로운 사실 지도관"전상섭 1편"


  

역사속의 태권도근현대사 18편 - 지도관 전상섭 1편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북한 포로로 기록된 새로운 사실 지도관"전상섭!

 

조선연무관 권법부는 194633일 전상섭이 창설했다(국기원, 허인욱 2008, 국기원 2017, 최점연 2008, 서성원 2007)라는 설과 당시 194633일은 일요일이어서 32일 개설했다고 주장하는 설! 두가지의 설이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주장을 통제로 뒤집는 신문기사가 발견되었다.

 

[조선연무관 공수부 신설] 조선 제1의 상무도장인 시내 장각천정 조선연무관에서는 공수부를 신설하고 다가오는 32일부터 전습(傳習, 강습)을 개시하기로 되었다. (광주민보, 1946.03.05. 김영선 2017)

 

이는 지금까지 관련자들의 구술과 심증, 추정으로만 일관된 조선연무관 권법부의 창설을 김영선씨는 사실적 1차 사료를 근거로 위의 두가지 설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어서 주목이 된다. 어째건 조금 더 연구되고 고증이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① 전상섭은 행방불명된 것이 아니라 납북 되었다?

창설자는 전상섭(1921~)인데 한국전쟁 당시 행방불명 되었다. 그에 대한 자료나 수련 경력 등이 정확하지는 않다. 다만 그의 동생 전일섭은 전상섭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형님은 보통체격에 운동 신경이 뛰어났고, 성격은 원만한 편이며 6,25 때 납북되어 행방불명 되었기 때문에 생사를 모른다!"라고 전했다.(최점현 2008)

 

하지만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전상섭은 행방불명된 것이 아니라 국군 포로로 납북되었다는 것. 

 

195224일자 석간 자유신문에 보면 국군포로명부라고 쓰여 있고, 그 명단 속에 전상섭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1952년 2월 4일 자유신문 전상섭의 이름이 국군포로 명단에 담김

왜 포로가 되었는지 언제 납북 되었는지는 알수 없다. 195224(자유신문1952.02.04) 전상섭의 이름이 정확하게 명단에 담겨짐으로써 지금까지 행방불명되었다는 설을 일축할 수 있는 새로운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나온 것이다.

 

전상섭이 본인 스스로 납북했는지 아니면 국군 포로로 압송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수 없다. 북으로 압송된 뒤 그의 소식이 끊어져 어떻게 지냈는지 생사는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수가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1. 전상섭은 어떤 무술들을 섭렵했을까?

2. 척식대학은 어떤 대학일까?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 관장,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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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인

    결론부터 쓰자면, 조선연무관 권법부를 창설한 전상섭 선생은 자유신문에 나온 국군포로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습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일 뿐이지요.
    기고자님이 근거로 제시한 자유신문 기사에서 전상섭은 한글로 나와 있고 또 16연대(?) 이병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전연 무관한 사람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 연세가 30세가 된 전상섭(1921∼?)씨가 어떻게 국군 신참 이병으로 입대하여 포로가 되었겠습니까.
    더욱이 전상섭 님은 방위군 장교 출신에다가 경신고와 경성전기학교(수도공고)에서 교사로 교련 교관으로 재직하셨던 분입니다(이호성, 1995, 스포츠조선).
    또한 그 분의 수제자 이종우 관장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전상섭 선생은 민족청년단에 계셨는데, 6,25가 일어나자 소집을 당해, 민족청년단 옷을 입고 나갔다가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허인욱, 2010.2.14. 무카스).”
    결혼하여 가족까지 있었던 분이 한국전쟁에서 국군 말단 이병으로 입대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실증적 근거는 다음 2건의 조선일보 기사에서 나옵니다.

    “歸還勇士名單(귀환용사명단). 全相燮(전상섭) 軍屬(군속) 四七(사칠) 咸平(함평) 金永寳(김영보) 下士(하사) 二三(이삼) 山淸(산청) 李成鍾(이성종) 一兵(일병) 二七(이칠) ... (조선일보, 1953.08.11).”
    “歸還勇士名單(귀환용사명단). 全商燮(전상섭) 二兵(이병) 三(삼)〇 春川(춘천), 趙三俊(조삼준) " 二五(이오) 昌原(창원) 林明奎(임명규) 一兵(일병) 二六(이육) ... (조선일보, 1953.09.04.).”

    조선연무관 창설자 전상섭은 한자로 ‘田詳燮’입니다. 이 사실적 근거는 그 분의 직계 제자인 이교윤(2007)이 자신의 저서인 글로벌태권도 교본에 명기되어 있습니다.
    2건의 조선일보 기사는 한자명이 다른 귀환용사 이름이 2사람이나 나옵니다. 함평 사람 全相燮(전상섭) 군속과 춘천 출신 全商燮(전상섭) 이병입니다. 출신 지역과 한자명이 각각 다른 2사람의 국군 포로이었지요. 참고로 전상섭 선생의 출신지는 충남 공주입니다.
    만일 전상섭 님이 국군귀환용사 2분 중에 한사람이었으면 다시 가정과 사회로 귀환하여 활동이 재개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 태권도 원류사를 잘 아는 이는 신문기사 1건에 의존한 이러한 주제를 논하지 않을 것입니다. 태권도의 정체성과도 연관되는 예민한 주제는 엄밀한 사료 분석과 함께 합당한 역사관으로 주도면밀하게 서술되어야 합니다.

    2021-01-13 20:57: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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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인

    이번 기고문이 ‘현대 태권도 원류사’에 대해 주요한 사안이라 철두철미한 댓글을 달겠습니다.
    다소 신랄한 비판이라도 기고자님께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기고자님이 거론하고 주장하는 이번 주제는 시종일관 오류가 적지 않습니다.
    이 글이 조선연무관 권법부 창설자인 전상섭 씨가 북한 포로였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제목과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단 1건의 신문기사에 의존한 섣부른 판단은 사실과는 전연 어긋나고 있습니다.
    타당성 높은 역사적 사실을 판별하기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하고 사료 수집과 주도면밀한 대조 분석(사료 비판)이 따라야 합니다.
    특히 현대 태권도의 초기 원류사와 얽힌 주요한 사건일수록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어떤 사건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나 해석(견해)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판단의 객관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021-01-13 20:55:5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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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인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검토해보셨는지요?

    2020-12-28 10:37:17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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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예학교

    정체성없는 한국의 무예

    일본무술의 성격 침투와 서국적 경기방식 내재

    한국 무예의 수련체계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무예가 일본류 무예 내지는 중국이나 서양 격투기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 바탕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전통성을 검증 받은 무예, 즉 택견, 씨름, 활 등은 누구나 한국 무예라는 전통성을 인정 받고 있지만 오늘날 이들 무예 곳곳에는 일본 무술의 성격이 침투해 있으며 서구적 경기 방식이 내재되어 있다. 
    이는 전래의 자연발생적인 수련 배경을 잃은 채 생활권 밖에서 명맥이 이어져 오다가 무예 수련의 일상화라는 대중 문화권에 재편입되면서 기존의 외래 무술체계를 타당성 검증없이 수용해 온 결과이다. 

    둘째, 한국무예 기원설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일본무도에서 기원한 무예인 경우에 해당한다. 일제 강점기의 일본 유학생들에 의하여 수련되던 일본 무도가 광복 이후에 국내에서 활성화 되면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검도나 유도의 경우에는 이미 일제 치하에서 유입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들 무도는 한국 전통 무예로 둔갑 하였다. 수련체계와 복장, 이론적 배경, 사상적 기반 등은 일본의 그것이면서 삼국시대에 한반도에서 전해준 것을 다시 되찾아 왔다는 논리로 일색 하였다. 이러한 논리라면 일본에 대하여 우리것이 아닌게 무엇이며 중국에 대하여 우리의 것은 무엇인가? 무예를 포함한 모든 문화는 그 발생도 중요 하지만 어느나라에서 어떻게 성장하여 살아 남았는가 하는 발달적인 측면이 더 중요하다. 문화는 발달 논리에 입각하여 도태되며 적자 생존한다. 따라서 무예에 있어서도 그것의 기원과 실질적인 성장은 엄연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셋째, 대부분 광복이후 한국에서 신흥무예로 탄생하였으면서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 내지는 심지어 고조선 시대를 운운하는 무예들의 등장이다. 전통성을 검증 받은 씨름, 택견, 활과 일본과 중국류 무예를 제외한 대부분의 무술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중에는 고서에 나오는 무예 지칭 용어를 차용한다든가 무예도보통지를 인용한 무예관련 단체도 있지만 이들 단체 역시 역사적 전통성이 단절되어 있기는 마찬 가지이다. 하지만 떳떳하게 신흥 무예임을 밝히는 한국무예는 극히 드물다. 

    이와같이 전통무예, 외래무예, 신흥무예를 막론하고 문제가 되는 사실은 다름을 기반으로 전통을 형성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같음>을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군국주의의 산실인 일본무도가 표본적인 모델로 설정되어 있다. 이와같이 일본 무도와 같음을 지향함으로써 생긴 한국무예의 허구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한국에서 무예를 수련하는 일정한 공간을 도장(道場) 혹은 체육관(體育館) 또는 무예단체 특유의 색깔이나 세력권에 따라 OO관(OO館) 이라 명칭 하고 있다. 적어도 조선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00정(OO亭)이라고 불리는 활터를 제외하고는 사설 무예 강습 장소는 물론이고 전문 실내 공간이 없었다. 씨름이나 택견 만 하더라도 풀밭이나 노천, 모래사장 등에서 전문적인 지도선생 없이 놀이 문화의 형태로 전습되어 왔다. 그 외에 전문적인 전수 계보가 있었다면 오늘날의 개방된 체육관 형태가 아닌 일정한 공간에서 특정 소수에게만 전수되어 왔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도장(道場)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도장(道場)이라는 말은 원래 스님들이 불법을 수행하는 장소를 일컫는 말에서 기원한 것을 일본에서 무도에 의식적으로 엄격한 윤리와 철학성을 부여하면서 수련장소를 칭할 때 도용한 것이다. 

    한국에서 최초의 현대식 도장은 광복 두 달전에 이원국이 세운 당수도 청도관이다. 이는 태권도의 원조 도장인셈이지만 이후 황기가 세운 철도국 도장이 전신인 무덕관, 지도관의 전신으로 유도 도장인 연무관에 권법부를 개설하여 공수도 연무관을 설립되었고, 이후 창무관, 송도관 등이 설립되었다. 
    그런데 관(館)이라는 것은 일본식 도장의 대표적인 분파 양식에 보이는 명칭법으로 한국에서는 태권도, 유도, 검도, 합기도 등에서 이러한 명칭 제도를 자연스럽게 계승하거나 도입하여 각자의 세력을 형성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에서 헬스클럽이나 무예교습소 등 유독 신체 관련 장소를 가리켜 체육관이라고 칭하는 것도 일본식 관(館)의 개념이 이입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시대 이후 한국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된 활터를 제외하고는 애초부터 무예관련 사설 강습소인 관(館)은 없었던 것이다. 엄격한 유교주의와 강력한 중앙집권 제도하에 그나마 조선 초에 보이던 사병 양성은 꿈도 못 꿀 일이 되어 버린 조선 시대였다. 이러한 조선땅에 무협 영화에 보이는 것처럼 일반인이 칼차고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산중의 승려들이 마치 중국의 소림승들처럼 무술을 연마하여 온 것처럼 영화화 되어왔고 실제로 오늘날엔 불교무술 단체들이 전래적으로 그래왔던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으며 한권의 제식 병서에 불과한 무예도보통지가 조선 무예의 보고인양 과장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조선시대에 왜란을 맞이하여 승려들이 의병으로 참여한 것은 사실이나 무술 집단으로서의 승병은 아니었다. 그것은 농민 신분의 평민들까지 농기구를 들고 왜란에 맞선 호국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인 문화와 무사 집단이 마치 국내에도 현존하여 온 것처럼 신비화되고 과장되어 오늘날 한국은 무술 관련 도장이 산재되어 있다.

    유투브
    참고영상
    싸울아비무사단?
    https://youtu.be/M_gP4awjdRE
    역사는 멀고 돈은 가까운, '전통'무예
    무예계 암적인 존재들
    정치.무예단체유착

    2020-12-17 08:56:04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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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비무예문화

    사이비무예문화는 갈수록 사회문제로 대두

    윤리가 실종되고 경쟁만능주의가 빚어놓은 사이비무예문화는 갈수록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윤리가 실종되고 경쟁만능주의가 빚어놓은 사이비무예문화는 갈수록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소통보다는 허위과장 생떼 천박한 문화가 우리무예계에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사색과 인내심 진지한 토론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이같은 현상으로인해 무예계의 자정력은 한계에 와 있고 더이상 스스로 해결할수 있는 치유능력이 상실한 상태다 이제부터라고 사이비무인들이 활개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메시지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할수 있다. 올해 있을 전통무예종목지정시 무예에 대한 기원과 역사들을 철저히 검증하여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예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남은 자존감을 지켜주고 이어주는 정신이다 또한 이를 후대에 전해줘야하는것이 우리무예인들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상업주의가 스며들면서 무예본질은사라지고 각종 사회병리현상만이 커지고 있다. 특히 상업주의에 편승한 사이비무인들에 의하여 갈수록 참 무인들이 설곳이 없어져 사라지고 있다. 물질적 발전에 걸맞은 가치관정립이 절실한 상황에서 남을배려하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무인으로서의 소양이 없으니 동일종목간 타무술종목간 공감대가 없고 존중심도 없다 보니 그 틈새에 사이비무인들이 활개한다. 무인들이 갈망했던 이상 또한 사라지고 없다. 어쩌면 지리산이나 설악산과 같은 깊은 산중에나 가야만 참 무인들을 만날수 있을지 모른다.
    개인든 단체든 국가든 상식이 통해야만 한다 최소한의 윤리 와 도덕 그리고 규칙과 법률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한다. 윤리의식도 없고 법 상식도 무시되는 사회는 분명 병들어 있다고 할수 있다.
    우리무인들은 이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할수 있는 첨병이라고 할수 있다 그런데 우리무인들이 그 같은 첨병역할능력이 아쉽게도 갈수록 많이 부족해 지는것 같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이비는 외모는 그럴듯 하지만 본질은 전혀다른,즉 겉과 속이 전혀다른 것을 의미하며, 선량해 보이지만 실은 질이 좋지 못하다."그래서 공자는 사이비를 미워한다 하였다.
    공자는 인의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겉만 번지지르르하고 처세술이 능한 사이비를"덕을 해치는 사람"이라 하였다.원리 원칙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사이비가 활개를 치는 법이다.
    그들은 대부분 올바른 길을 걷지 않고 시류에 일시적으로 영합하며,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거나 말로 사람을 혼란시키는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 이다
    지금 부터라도 무인의 한사람으로서 각각의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여 범 사회적 인식을 새롭게 하기를 바란다. 변화된 무인들의 모습을 사회는 기다리고 있다 또한 변화된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무인들이 참 무인으로 변화될때 무인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존경받는 무인으로서 우리사회에 다시금 그 중심에 있을수 있을것이다.
    유투브
    참고영상
    https://youtu.be/M_gP4awjdRE
    역사는 멀고 돈은 가까운, '전통'무예
    무예계 암적인 존재들
    정치무예단체유착

    2020-12-15 03:35:11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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