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재영의 태권도이야기] 무덕관 창시자 황기의 무예경력은?
발행일자 : 2020-07-22 17:49:21
수정일자 : 2020-07-23 15:18:20
[엄재영 / kaikans@hanmail.net]
역사속의 태권도역사 4편"무덕관"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무덕관
무덕관의 창설자 황기(1914~2002)의 출생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경기도 장단군(長湍郡)에서 태어나 경기상고를 졸업하고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남만주(南滿洲) 철도국에 근무하면서 양국진(楊麴震) 선생에게 직장동료인 박효필과 함께 조양천시의 변두리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주계열의 태극권과 십팔기, 국술(國術)등을 배웠다고 한다(김영선 2019, 최점현 2008, 국기원 2013, 이호성 1994 , 정근표 2020)
황기가 무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7~8세정도로 추정된다. 단옷날 씨름구경을 하다 한사람이 7~8명과 언쟁하다 시비가 붙었고 한사람은 7~8명을 상대로 순식간에 족기(足技)로 제압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사람 집까지 따라가 무예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허인욱 2008, 황기, 무덕관 1993)
이것이 무예를 배우기 시작한 동기가 된 셈이다. 황기에게 무술을 가르쳐 준 양국진은 50대 정도로 그당시 몇명의 수련생을 가르치고 있는데 황기와 박효필은 양국진에게 가르침을 원했지만 그들의 중국어가 능숙하기 않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한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으로 세번째 찾아갔을 때 허락을 받아내고 이틀에 한번씩 배웠다. 1937년 8월 개인적인 이유로 서울에 돌아온 후 다시 만주를 찾았지만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허인욱 2008)
가라테는 독학으로 터득했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무술경력은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았다. 태권도현대사와 길동무하다(서성원 2007)에 보면 황기는 가라테를 배우지 않았다. 중국무술이 주특기였던것 같다. 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태권도형성사(허인욱 2008) 에서는 그의 무예경력에 대해서는 반증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다른 주장을 서술하고 있다.
그가 집필한 서적들속에 나름대로 기술체계를 정립했지만 자신의 무예경력은 삽입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무예약력에 많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김영선 2019) 이에 대해 여러 태권도원로들도 대체로 동의한다. 황기 측에서 주장하는 무예경력은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태권도 역사 강원식과 이경명, 2002)
황기가 만주에서 중국국술을 배웠다는 주장에 대해 노병직씨도 다른 입장을 내놓았다. 황기는 1949년대 화수도교본, 당수도교본(1958), 1970년대 수박도대감 등의 책은 후나고시 선생이 저술 발행한 책들을 번역표절 개조한 책이다. 자칭 남만주의 십팔기를 배웠다고 하지만 그의 출신 도장과 스승은 밝혀지지 않으며 그의 지도방법도 일본 쇼토칸류를 그대로 행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가라테 보다 화수도라는 본인이 개발한 명칭에 더 심취해 있었고 이것이 당수도에서 화수도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었으며 당수도의 명칭을 화수도로 개명 할 때 우리나라에 적합하고 이상적인 명칭을 마련하여 나갈 방침이니 만큼 당수도는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당수도 교본 1958)
그 후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여 수박도라는 명칭을 얻었고 그는 다양한 저서를 집필했다.
1960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위원회가 발족되고 당시 정권에서 무술계의 유사단체들을 통합하라는 유사단체 통합령이 발동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통합파와 반대파가 심한 갈등을 빛었다.(황기는 통합 반대파, 이 기록은 관통합 기술때 자세하게 언급할 예정)
하지만 태권도관들이 통합되고 이쯤 무덕관의 관세도 서서히 잃어 간다. 그 이유는 당시 문교부에서 통합한 협회의 단증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로 무덕관 단증은 공인단증이 아니라는 생각과 사설단체가 발급하는 단증으로 도장을 운영하기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든 이때쯤 황기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수박도를 전파하게 된다.(정근표 2020)
황기는 일본의 가라테를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많은 자료를 통해 이미 알려져 있다. 광복이후가 되자 철도국 내에서 동료와 직장인들에게 중국무술의 세법(勢法)과 보법(步法)을 가르치면서 무예교습을 시작했다고 되어 있고(김영선 2019, 서상렬 2012) 여러 서적들을 집필함으로써 전혀 무술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한편 1949년 5월에 저술한 화수도교본은 한국 무예계 최초의 저서이고 1955년 10월 한, 중 친선 연무대회를 대한당수도라는 이름으로 개최한 이 대회는 최초의 국제행사로 기록되고 있다.(국기원 태권도 연구 정근표 2020)
표1. 황기의 저서(11권)
1949-50. 4. 4 | 화수도교본(년도 불확실 교본 1950년 4월4일 기재) |
1958 7. 7 | 당수도교본 수정증보 발간 |
1963. 6. 3 | 당수도 보신법교본 발간(팜플레트 출판) |
1969. 12 | 당수도교본 3차발간 및 영문번역 출판 |
1970. 4. 20 | 수박도 대감발간(한우리 출판) |
1977 | 당수도/수박도대감(영문) (성문사 출판) |
1987 | 무덕관(소책자)간행 |
1991 | 무예도보통지(권법) 발간 |
1992 | 무덕관책자 발표 |
1993 | 무도철학 발간 |
1994 | 수박도교본(제4권)발간 |
무덕관 하면 철도국(운수부) 도장이라는 닉네임이 붙을 정도로 무덕관은 철도와 관계가 깊다.
해방을 전,후해서 철도는 무덕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잠깐 격동의 한국의 역사속으로 들어가보자.
다음호에 계속.....
1. 일제 강점기 대동아공영권을 앞세운 철도부설권의 비밀!
2. 무덕관의 창설 논쟁?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 관장,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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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영 | |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대한태권도협회 이사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11)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20) 아시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금메달(2022) 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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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왜곡단체
해동검도 고구려사무랑?
해동검도가 고구려 사무랑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창건자인 나한일과 김정호의 법정 공방을 통해 기술의 상당수가 심검도와 기천문에 영향받아 만들어낸 현대 창작 무술임은 만천하에 드러나있다. 해동 검도에서 가르치는 검술 상당수는 심검도와 기천에서 따온 것이고, 일부는 둘을 혼합해서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것이며, 또 다른 일부는 아예 일본의 군도술인 토야마류와 나카무라류의 검리와 기술을 받아온 것도 있다. 그리고 본국검법과 쌍수검법은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나름 재현해낸 것이다. 해동검도 검술 중에 예도 검법이라는게 있어서 이것이 무예도보통지의 예도(조선 세법)이 아닌가 착각할 수도 있는데, 해동의 예도 검법 1번 ~ 9번은 나한일과 김정호가 창작한 검술이다. 해동검도는 사범급 연수를 짧고 빠르게 해줘서 도장을 쉽게 세울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빠른 시간 내에 세력을 끌어모았는데, 해동검도 브랜드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기에 다른 무술 도장을 하던 사람들이 짧은 연수를 받고 간판만 갈아치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던 사람들도 해동검도에도 흘러들어간 듯 최근에는 무예도보통지의 조선 세법도 하고 있다)#. 날조한 전통이 법정 공방으로 드러나버렸으니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진짜 전통 검술인 무예도보통지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된 셈. 하지만 도장이 세워진 시기나 해동검도 협회마다 커리큘럼이 제각각이기에, 모든 해동검도 단체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지는 않는 듯 하다.
※참고:무예24기와경당24반에
흘러들어간 해동검도단체
1.무예청박물관 해동검도진검동호회
90년대 해동검도진검베기 동호회 회원들
전통무예경당24반협회활동
2.무사협회단체 해동검도관장시절
경당24반쌍검수련생
3.한국해동검도 윤자경1세대 검무수련자들
*지무단 해동검도 검무단체 세계해동소속
*기예무단 해동검도 검무단체 한국해동소속
4.현재 전통무예 검무시연자들
해동검도단체소속 수련자들
이들 단체은 지금 전통문화 행사등 에서 활동하고있다. 돈에 흐름에 따라 활동한다.역사는 멀고 돈은 가까운 해동검도단체들2020-07-23 19:19:51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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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여 기억하다
경제침략의 주범·전범, 아베 가문
아베의 가문은 한마디로 ‘침략의 가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친손자가 현재의 일본 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하면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때리기도했다.
이자는,일본이항복하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한국을 떠나는데, 그때 남긴 가증스러운 말이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일제강점기)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2020-07-23 19:11:4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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