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이원국, 어떻게 무술도장을 개관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아픈 역사와 태권도의 상관관계는....?

 

청도관의 창설자 이원국은(1907~2003)에 충북 영동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어릴 때 안국동에서 태껸을 배웠다. 17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1926년 와세다 중고등학교를 졸업, 19세때 일본주오대학 법학과 다니면서 쇼토관 가라테(후나고시)약 5년간 가라테를 배웠다고 한다.(외길 70년 태권도기틀 다진 엄운규  2017) 

 

이원국는 '흙수저'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원국이 태어났던 1900~192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을까?

 

청도관창설자 이원국

1904년 2월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랴오동반도의 뤠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급습해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군을 한국에 주둔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겁박하여 강제적으로 한일의정서(1904)를 체결한다.

 

이 의정서의 합의 내용은 우리나라에 일본의 군대가 들어와서 우리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말도 안되는 협약이다. 사실상 외교권을 박탈당하는 첫 사건인 셈이다. 이때 일본군대의 우리나라의 황실인 경북궁범궐로 우리의 무능한 외교와 안보를 여실히 들어내는 사건이었다.(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2016, 내이버 지식백과)

 

1905년 7월 당사국인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대가로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한다는 내용의 가쓰라-테프트비망록을 교환! 미국이 우리의 아군이 아니었음을 알고 황실은 크게 실망하였다고 한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일본이 대한제국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조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했다. 1905년 11월 을사5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을 앞세워 치욕의 2차 한일 협약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공식적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된다.

 

하지만 이 을사늑약은 고종이 끝까지 직인을 찍지 않아 이 국제법상 무효 문서로 인정받았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지만 식민지국가는 참여조차 하지 못하는 비참함을 맞본다.(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사 2016)

 

1909년 우리의 열사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사건이 민족운동에 불을 지피고 3,1운동의 기틀을 마련한다.

 

하지만 1910년 치욕의 한일 강제병합으로 36년간 식민지로 우리민족이 유린당하는 결과를 났게 된다.

 

우리 민족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손병희가 이끄는 1919년 3.1운동과 그 중심에 있던 유관순 열사의 위대한 투쟁으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분노와 심정을 알고 깜짝 놀란 일본은 무력으로 우리를 통제하려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 문화통치란 허울뿐인 역사관이었다.)

이처럼 해방이전까지 나라를 잃은 고단한 삶이 우리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으니 우리 대한제국 아니 대한민국의 무술역사가 온절 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위의 배경지식을 잘 생각하며 다시 우리 태권도역사를 들여다 보자.

 

본격적인 태권도의 현대화에 중심에 서있는 이원국은 일본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동경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944년 조선총독부 법무부 법무관으로 전근했다(태권도신문, 서성원2003, 대한민국 오천년사 최점현 2008, 강원식 남은숙 1996)

 

이때 조선총독부의 총독 아베 노부유끼는 일본에서부터 이원국과 아는 사이였다. 1945년 8월15일은 우리가 염원하던 독립이 되었지만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을 고한 날이기도 하다.

 

 조선총독부의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노부유끼는 1945년 9월12일 일본의 패망과 함께 선을 떠나면서 본인의 마지막 업무 연설문에서

 

항복문서에 싸인을 하고 있는 아베노부유끼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란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국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 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 올 것이다.” 라는 망언을 남기고 일본으로 떠난 인물이기도 하다.

 

아무리 패망이 짙게 깔려있던 일본이지만 문화통치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을 펼쳤던 시기에 어떻게 이원국은 무술도장을 개관할 수 있었을까?

태권도를 수련중인 성인수련생들.......

그리고쇼토관 가라테의 카타평안형()은 어떻게 탄생했까?

역사속의 역사(3편)으로 계속........(위의 내용 일부는 필자의 생각이 있을 수 있음)

 

● 다음 목차는................

▶ 가라테 평안형(카타) 탄생의 비밀?

▶ 청도관의 시작 "시천교당" 을 아십니까?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글 = 엄재영 사범 ㅣ 대망태권도장 관장 |  kaikan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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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영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대한태권도협회 이사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11)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금메달(2020)
아시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금메달(2022)
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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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니

    아베 노부유키는 저런 말 한 적 없음. 인터넷 조금만 뒤져봐도 나옴.

    그리고 제목에 해당하는 내용 좀 올리기 바람.

    운동하는 사람이라고 글쓰기의 규칙이 엉망이어도 되는 게 아님.

    생각해서 글로 쓰는 것도 이렇게 근거 없고 산만한데 평소의 생각이나 말은 어떤지 짐작이 감.

    2020-09-11 14:02:39 수정 삭제 신고

    답글 0
  • 미쳤다김

    제발 좀 어릴때 태껸배웠다는 글은 안썼으면 하는 바램이다 당시 송도관에서 공수도 배워놓구 꼭 어릴때 태껸배웠다구 하는 글좀 안썼으면 한다. 미화 좀 하지말길...

    2020-07-21 11:38:03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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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도 바로세우기

    무엇을 야기하려고 하는지
    사진과 스토리가 맞지도 않고
    있는 사실만 써야지
    소설 쓰지마시고

    2020-07-10 05:19: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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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니애비

    그래서 어떻게 차렸다고요??

    2020-07-08 12:41:08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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