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철 칼럼] 나는 언제쯤 '진정한 태권도 사범'이 될 수 있을까?


  

아무런 이념도 없는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시대를 명징하게 볼 수 있는 혜안이 있다면 본질은, 담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탄생으로서 있어야 한다.

 

시작이라는 지점에는 ‘필요성’이 존재했지 가치의 기반이 절대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형상들은 본질이란 뿌리에서 뜯겨나가, 뜯긴 그 모습 그대로 또 다른 본질적 꽃을 피우는 경우들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변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옷은 신체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졌고,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기능성을 획득했고, 인간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심미적인 곳으로 시선을 옮겨왔다. 그래서 요즘의 옷은, 기능과 미적 가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신체를 가리기 위해 존재했던 옷의 존재성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치로서 인식되지 않는다. 물론 옷의 본질은 유형의 형태이기에 무형으로 존재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유·무형을 떠나, 본질에 대한 담론은 뿌리의 발견이 아닌, 현재의 모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본질의 생명력은 둘 중 하나다. 그 자체로 지속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거나, 시대의 흐름과 협업해서 세련되어질 경우이다. 태권도장을 운영하다 보면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필자 역시 본질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무엇이 본질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태권도의 뿌리에만 본질을 두자니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 같고, 더욱이 태권도를 마주하는 아이들이 태권도의 뿌리와는 다른 형태로 성장하고 있다.

 

시대정신 역시 태권도의 본질과는 다른 지점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이쪽과 저쪽의 세계가 다른데 이쪽 이야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다.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본질 다음으로 시대적으로 회자 되는 것은 ‘원리’이다. 손의 원리, 발차기 원리, 품새의 원리 등 많은 지도자가 원리에 근거해서 과학적 해석에 관심을 두고 있다. 좋은 기류이다. 이제껏 관념적으로 존재했던 태권도의 기술체계가 명징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은 태권도 지도자의 전문성을 재고시킬 수 있기에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을 한다.

 

원리는 기본적으로 합리성이자 자본주의다. 그렇기 때문에 원리는 논리로서 치환되고 논리는 지식으로서 치환된다.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들의 담론은 가벼울 것이다. 하나의 저울에 무게를 달아보면 원리로서 접근하는 모든 무술의 형태는 이미 다른 분야에서 존재했던 지극히 평범한 지렛대의 원리, 중력 그리고 신체의 각도 혹은 뼈의 정렬쯤인데 이것을 대단한 발견쯤으로 생각해서 자신을 높이거나, 누군가를 비방하고 있다. 저울은 이론적 발견의 무게보다는 자아증명 혹은 비방의 무게만 무겁게 측정할 것이다.

 

힘든 하루를 보내고(지면을 통해 다 쓰지는 못하지만, 무릎을 다친 상태에서 실기를 표현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수업을 하던 중 서영애 사범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발차기를 못 해서 아쉽겠어요” 그리고 덧붙여 나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말씀해주셨다

“설명은 잘하시는데, 모양에 대해서만 접근하시는 것 같아요”

“그 동작은 그런 뜻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요”

태권도를 지도하고 있는 서영애 사범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그간 우리의 원리 혹은 본질 타령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내가 이제야 깨달았던 것 이전에, 이미 많은 분들이 앞서 깨달았고 행동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앞굽이를 이야기할 때 기원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논쟁을 한다. 이후, 과학적 혹은 원리라는 지식에 기인한 논쟁 역시 시도한다. ‘맞는지 틀렸는지’가 쟁점 사항이다. 그러나 이런 쟁점은 증명이기보다는 대부분 ‘관철’이다.

 

필자가 서영애 사범님이 말한 짧은 한 문장이 놀랍고 반성적이었던 까닭은 간단하다. 예를 든 설명이니 오해가 없길 바란다.

 

앞굽이가 역사론적, 민족 사관론적 관점이 아니라, 앞굽이가 과학적으로 타당한지가 아니라, 원리론적인 증명이 아니라, 앞굽이가 생겨난 그 지점 즉, 원형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거듭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아닌, 아버지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인정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고, 아무도 관심을 받지 않는 것에 관한 관심은 시대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없다. 그것을 오랫동안 묵묵히 지키고 있는 원로 사범님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간 본질이니 원리이니 하는 담론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깨닫는 시간이면서, 그것은 태권도의 공명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역시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끝으로 이 칼럼은 오해의 여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배 사범으로서 다시금 겸손한 모습으로 성실히 수련에 임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태권도 사범으로서 논쟁과 담론이라는 대지가 아닌, 땀이라는 대지 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함이요, 그로 인해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위로를 받는 정도가 우리의 욕망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아무런 이념도 없는 것에 대한 애착을 가질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본다.

 

나는 언제쯤 태권도 사범이 될 수 있을까?

 

[글 = 정준철 관장 | bambe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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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철
긍휼태권도장 관장

브랜드발전소'등불'대표
대한태권도협회 강사
TMP격파팀 소속
<도장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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