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칼럼] 도복 입고 링에서 싸우면 양아치 같다고?


  

[치고! 막고! 이동희의 주먹 이야기 2편] 태권도가 최고라고 확신하는 태권도 사범입니다.

어쩌면 품새 선수와 시범 공연인으로서의 창창대로가 보장되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길.  

 

스무 살이 되자마자 K타이거즈를 나와 태권도학과에 입학해 대학을 다니며 격투 선수의 길로 걸어나갔다. 내가 생각한 태권도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집안의 반대가 심했는데 특히 어머니께서는 “잘 하던 애가 제정신이 아니게 됐다”며 울면서 반대하셨고, 소속되어 있던 K타이거즈 안학선 스승님(단장님)과 안창범 코치님(당시 기준) 또한 나무라시며 반대를 하셨다.

 

당시 무릎 꿇고 앉아서 온갖 상황이 난무하는데 난리도 아니었다.

 

“싸움꾼이나 해서 뭘 하겠냐!”

 

이것이 어른들 말씀의 골자였다.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해가 간다. 갓 성인이 된, 어찌 보면 미성숙한 녀석이 잘 하던 것을 그만두고 뜬금없이 격투기를 한다고 하니 이해가 안 되실 만도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당시에는 K-1과 프라이드라는 격투 단체들이 매우 유행을 하고 있었다. 특히 K-1은 MAX 라는 -70kg의 체급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체급이 당시 동양인들의 꿈의 무대였다. 나 또한 그랬다.

태권도복을 입고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이며 K-1 MAX의 챔피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실제로 나는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술인인 나에게 부와 명예를 함께 얻을 수 있는 이런 비전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태권도의 강함을 증명해내겠다!'

 

“한 순간의 충동일 뿐이다. 내일부터 계속 도장에 가서 훈련해!”

 

이런 아버지의 말씀을 가볍게 흘려버리고 나는 바로 격투기 체육관에 등록을 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반 정도 미쳐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가능하게 된 것은 지방에 살다가 중3때 서울로 올라와서 혼자 생활을 하고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아무튼 이렇게 나의 격투기 선수 생활이 시작됐다.

 

당시 다니던 체육관은 국내 무에타이와 입식타격의 전설이자 최고수인 임치빈 관장님이 계신 곳이었다. 이곳에서 선수까지 하고 싶다는 의도를 밝히고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왼쪽 선수시절의 이동희 사범, 가운데 임치빈 관장님

참고로 격투기 수련을 하면서 느낌 점들이 몇 가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발기술의 감각은 역시 태권도가 우세했다.

 

당시 나는 어찌 보면 전술이나 감각을 거의 잃어버린 태권도 경기 겨루기 시절의 발기술만으로 격투기 대련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로 싸우는 것은 매우 유리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손기술이었다. 주먹이 얼굴로 날아오기만 해도 매우 당황하여 밸런스가 깨져버렸으니... 약점이 손쉽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장점인 발기술을 봉인하고 손기술로만 싸우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 부분이 특히 어려웠는데 어느 순간 해결하게 된다.

과거에 격투 스파링을 할 때 앞발 돌려차기

둘째, 품새 수련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된다.

 

품새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정의내리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효과 면에서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자신의 몸을 인지하고 컨트롤 하는 능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여러 격투 공방을 배우면서 기술 동작은 한 번 배우면 바로 마스터했다.

 

그러나 저번 칼럼에서 이야기 했다시피 이것을 실제로 싸우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동작을 빨리 익히고 멋지게 수행할 수 있다고 해서 실제로 움직이는 상대와 싸울 때 사용하는 것은 전혀 다른 분야이다. 이 부분에서도 고생을 많이 했는데, 시간이 좀 지난 후 극복할 수 있었다.

2006년 품새선수로 활동할 시기

(태권도 수련과 격투 수련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이는 차후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위와 같은 수련을 거치며 나는 군대(코이카)를 가기 전까지 총 4번의 격투시합에 출전했다.

 

당시 기억을 떠올려 그 과정에 대해 대략적이나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기술이야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사실 거기서 거기이다. 정신(마음)의 변화를 기준으로 설명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시합은 태권도인이라는 티를 팍팍 내기 위해 도복을 입고 출전했다. 대기실에서부터 링 위까지 다른 선수들은 모두 트렁크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나만 도복을 입고 있었으니 그 뻘쭘함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자부심 하나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출전한 기억이 생생하다.

 

이 날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체력적으로 힘든 날이었다. 사실 도복이 걸리적거리고 땀에 젖어 무거워지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첫 출전이라 긴장이 많이 돼서 호흡도 잘 하지 못해 마구잡이로, 본능적으로 휘둘러댔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때 가장 화려하게 싸웠다.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하게 되니 익힌 기술의 정체성이 가장 잘 발휘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무대포로 싸운 것은 누가 뭐래도 극복해야하는 점이었다. 

첫 격투 시합인 데뷔전이 끝나고 링에서 내려 온 직후

두 번째 시합은 첫 번째와 비교하면 많이 차분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이 많이 되었는데, 그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단계로 기억하고 있다. 이 때 첫 K.O 승을 따냈는데 첫 시합처럼 흥분했으면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즉, 한 번 해 본 경험이라 ‘익숙’까지는 아니더라도 모든 상황이 덜 당황스러운 단계였다. 맞던 때리던 어느 정도 침착하게 넘기는 정도라 보면 되겠다.

 세 번째 시합은 개인적으로 딱 도움이 될 만한 긴장만 하고 침착함이 깊어진 단계이다. 경기 상황에 마구 휘두르는 모습이 대폭 줄어들고, 연습한대로 생각해서 시도하며 상대를 파악해서 공방을 펼칠 수 있었다.

 

이 때 시합을 하며 느낀 것은 또 시합을 해도 별 두려움 없이 링 위를 오를 수 있겠다는 점이었다. 그 전까지는 항상 긴장과 두려움이 있었다면 이후부터는 승패에 관계없이 그저 링 위에 올라 서로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상황 자체가 그리 큰 부담으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

 

네 번째 시합은 계속 이기다가 유일하게 무승부를 기록한 경기라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기억을 떠올려 보자면 그 전까지는 하지 못했던 ‘즐김’이 있었던 경기였다. 부담감과 긴장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맞으면 맞는 대로, 때리면 때리는 대로 경기 자체를 즐기면서 임했던 것 같다.

 

아마도 이 후에 경기를 계속 했다면 이런 마음이 깊어지는 방향으로 갔으리라 본다.

네 번째 시합을 뛰는 도중

이상의 과정은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태권도 겨루기를 했을 때도 겪었고, 이후에 품새 선수를 했을 때, 시범 공연을 할 때도 겪었던 것들이었다.

 

단지 분야가, 환경이 바뀌며 Reset되어 다시 겪게 되는 것이다.

 

내가 출전했던 격투 시합은 입식타격이었다. 아마도 UFC처럼 종합격투기 룰로 출전하게 된다면 이상의 과정을 비슷한 순서로 겪게 될 것이다.

 

단지, 그 과정을 지나는 속도와 깊이 면에서 처음 겪는 사람들보다 빠르게 지나갈 것이다.

 

추후에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바로 이것이 실전이다.

 

사람들은 ‘실전’하면 UFC를 실전이라 하기도 하고, 아무런 룰이 없는 길거리 싸움 혹은 전쟁 상황 등을 실전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실전은 우리 모두가 태어나면서 이미 임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모두가 실전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 혹은 선택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는가, 즐기게 되는가...' 이것이 진짜 실전을 치루는 과정인 것이다.

 

‘인생은 실전이다. 조그만 한 녀석아!’

 

인터넷에 이런 유명한 말도 한 때 유행했지 않은가. 매우 직관적이고 옳은 말이라 본다.

 

아무튼 나의 격투기 선수 시절은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에 군 입대 문제 때문에 국제협력요원(코이카)으로 남미의 에콰도르를 가게 된다. 이 때만 해도 한국에 돌아가면 계속 K-1 챔피언이 되기 위한 꿈을 실현하고자 했었다. 그래서 수련을 멈추지 않았고 운 좋게도 현지에 함께 일하던 사람이 남미 킥복싱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와 겨루며 감각을 잃지 않고자 했다.

 

이 외에도 흑인 강도 둘을 만난 일, 전국 순회 시범을 한 일 등 여러 이야기가 많으나 지면 관계상 이는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 나는 계획대로 격투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태권도의 강함을 알리고 이를 널리 퍼트리기 위해 이것을 시작했다. 이것을 위해서는 ‘문화’의 힘이 필요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이 생활을 계속 하면 그것이 가능해질지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정말 선수생활을 성공적으로 하게 되어 챔피언이 된다면.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을지언정, 나만 좋고 끝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이는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와서 흔히들 겪는 ‘머리가 굵어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가치에 대한 기준이 바뀌면서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결국 나는 학교를 복학하고 나에게 주어진 현 상황에서 ‘실전태권도 문화’를 최대한 잘 퍼트릴 수 있는 방법은 동아리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내가 알기론 전국의 태권도학과 동아리 중에 최초로 격투기술을 기반으로 한 ‘실전태권도 동아리’였을 것이다.

 

이 동아리를 ‘싸울아비’라고 하게 되었다.

2013년 싸울아비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그러던 어느 날 경희대학교 태권도학과 전교생을 모아놓고 동아리장들이 동아리 회원 모집을 위해 강단에 나가 동아리 소개를 할 때였다. 이때 필자 또한 동아리장이라 동아리 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다.

 

“여러분! 우리 경희대학교 최고의 태권도학과 맞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저기 어디 태국의 어떤 무에타이 학교 같은 곳에서 ‘경희대학교 태권도학과 너무 멋집니다. 그래서 서로 대련으로 교류하고 싶습니다!’라고 했을 때, 누가 나와서 붙을 겁니까? 어떤 동아리가 나설 겁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타 동아리에서 모여 술 마시는 영상이나 나오며 홍보할 때 우리는 싸우고, 피멍 드는 사진과 영상이 난무했다(이러니까 안 됐지...).

 

그리고 위에 저 연설로 정점을 찍었다.

 

장내는 조용했고, 아무런 호응을 이끌지 못했다.

 

간간히 친한 동기나 후배들이 “이동희~ㅋㅋ” 정도나 할 뿐이었다.

 

회원 모집을 마치고 다음 순서를 위해 객석으로 돌아갔을 때는 친한 벗들이

 

“아니 왜 동아리 모집을 하는데 철학을 이야기해요” 하며 조소 섞인 핀잔이나 받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은 ‘문화’가 이끌어간다. 태권도가 정말 약하고 그래서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면 강해질 수 있는 문화가 정착되면 된다. 그 생각에 마음이 맞는 후배 및 친구들과 동아리를 만들었고, 좀 더 구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통 관심들이 없었다.

 

사실 그 마음을 백번 이해한다. 그들은 지금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더욱 중요하다. 품새 시합에서 메달을 따는 것, 더 좋은 시범 공연을 하는 것, 좋은 학점을 받는 것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너무 많다.

 

태권도가 어디서 약하다고 하든지 말든지, 대중에게 이미지가 어떻든지 별 상관없는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안다. 한 때 메달을 위해 열심히 수련했고, 더 멋진 시범을 위해, 주위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술을 연마했다.

 

하지만 그래도 우연히라도 태권도가 타 무술에게 쥐어터지고 깨지는 영상 따위를 보고 그 아래 조롱 섞인 댓글들을 보면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다.

 

격투기를 수련할 때도 그랬다. 나는 격투기를 하지만 그 격투기가 태권도라고 생각했다. 나는 태권도인이고 그것을 토대로 싸우니까 말이다. 태권도에 주먹 기술이 있으니 내가 지르는 주먹은 ‘태권跆拳’ 인 것이다.

 

이런 나를 가장 이해해주고 응원해야 할 사람이 누구였을까? 당연히 주위에 친하게 지내던 태권도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내가 이기길 진심으로 응원했지만, 이동희를 응원한 것이지, 태권도를 응원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복싱 잘 돼 가요?”

 

“싸움질은 좀 어때요?”

 

이따위 말이나 할 뿐이었다.

 

그래서 설득을 위해 ‘모두 태권도에 있는 기술이고 나는 그것을 증명하기 노력한다’ 따위의 말들을 하면 듣는 둥 마는 둥 딱 저 위에 동아리 모집 때의 대중과 같은 표정으로 있다가 말을 돌리곤 했다.

 

그래. 안다. 내 말이 재미없었다는 것을. 내가 좀 더 흥미롭게 이야기 했으면 좋았을 걸.

 

“도복 입고 링에서 싸우면 양아치 같아.”

 

십여 년 전, 어떤 선수가 도복을 입고 K-1에서 싸워 이기는 걸 본 한 친구의 말이었다. 그것도 오랫동안 태권도를 수련하고 있었던 친구다.

 

하... 왜? 도복은 성스러운 것이고 그래서 링 따위에 올라 싸우면 안 되는 건가? 오히려 자랑스럽게 보이던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그럼 정신 수양이랍시고 똥 폼 잡는 건 멋진 거고, 질 것 같으니까 싸움에서 도망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십여 년 전 과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적어도 무술적 본질(격투능력) 면에서 태권도는 대중들에게 조금씩 외면 받고 무시당하고 있었다.

 

대중이야 본인들 맘대로 보고 느끼고 판단할 뿐이다. 당연한 것이다. 이걸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태권도인들은 다르다. 본인들이 나서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그런데 문제점조차 제대로 인식을 못 하고 있었으니...

 

이 철옹성같은 생각을 어떻게 문화로써 깨부술 수 있을까. 어떻게 행동으로 이끌어낼 수 있을까. 나의 화두는 깊어만 갔다.

 

그대들은 왜 분노하지 않는가.

 

그대들은 왜 나와 같지 않은가.

 

 

[글 이동희 사범 ㅣ jsrclu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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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이동희 태권도 관장
이동희 실전태권도 저자
실전태권도 수련회, 강진회强盡會 대표
대한태권도협회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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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쎄

    대단합니다.

    2019-05-09 14:54:56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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