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선도 이야기] 대진국(大震國) 발해(渤海)

  

정현축의 국선도 이야기 33


《삼국사기(三國史記)》〈최치원전〉에는 이렇게 나온다.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들이 서로 모여 북쪽으로 태백산(太白山) 아래 의거하여, 국호(國號)를 발해(渤海)라고 하였다.’

고구려 유민들이 모여 대진국 발해를 개국한 태백산(太白山)은 바로 상고시대에 환웅(桓雄)께서 하강하신 산이며, 신라 말기의 대학자이자 도인이었던 고운(孤雲) 최치원( 857〜? ) 선생께서 《천부경(天符經)》을 발견한 산이기도 하다.

《천부경》은 상고시대에 환웅께서 설하시고, 신지(神誌) 혁덕이 받아 적었다고 전해지며, 녹도문자로 되어 있다. 내용은 간략하면서도 정밀하여서, 사람이 소천지(小天地)라는 이치를 일목요연하고도 명백하게 밝혀놓고 있다.

태백산(太白山)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한 학설은 지금의 ‘백두산’을 말하는 것이라 하고, 다른 학설은 현재 중국의 서북지방에 있는 태백산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현재 중국의 서북지방은 고조선시대에는 치우천황이 활동했던 동이족의 무대였다. 그러므로 고운 최치원 선생이 단군전비(檀君篆碑)를 직접 본 것이 바로 이곳이며, 그가 당나라에 체류했던 기간일 것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후자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과 그 부친 대중상(大仲象)은 668년 고구려(高句麗)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 유민(遺民)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고구려의 영토 회복에 나섰다.

신인(神人)이 대조영의 꿈에 나타나 금부(金符, 金尺)를 주면서 “天命이 네게 있으니 우리 진역(震域)을 다스리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건원(建元)을 천통(天統)이라 하였으며, 대조영 자신 지극 정성으로 하늘에 제(祭)를 지냈다고 한다.

대조영(大祚榮)과 그 부친 대중상(大仲象)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太白山) 동북쪽 땅을 확보하고 굳게 지키니, 고구려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들었다. 압록강 상류와 동북 만주 지방에는 여전히 고구려의 유민과 말갈족이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북 만주의 지리적 가치는 전략상의 이점 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이점도 대단히 커서 여러 가지 특산물이 풍부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쟁에서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솔빈(率賓)의 말과 위성(位城)의 철(鐵)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대조영은 철의 생산지였던 위성부터 먼저 점령하였다.

나·당 연합 전쟁으로 고구려 땅을 나눠 갖은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유화 정책을 써서 대조영에게 진국공(震國公)에 봉하였다. 그러나 대조영은 그것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고구려가 지난 날 통치했던 영토의 동쪽에 세력을 일으켜 당나라에 대항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는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파견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공격해 들어왔다. 이에 대조영은 정면대결을 피하고, 좀 더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천문령(天門嶺)에서 잠복하였다.

고구려 군대는 본래 기습공격에 특기를 가지고 있었다. 대조영은 밀림에 둘러싸인 산악지대인 천문령(天門嶺)으로 당나라 군대를 유인한 다음,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당나라 군대는 더 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에서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고, 대조영은 고구려 땅 전체를 차지하려던 당나라의 야욕을 완벽하게 꺾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고, 사방 5천리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개척해 나갔다.

천문령(天門嶺)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승리한 뒤 대조영은 698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진(震)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하였다. 그러다가 705년 당나라와 화친한 뒤, 713년에 발해(渤海)로 국명을 개칭하였다.

대진국 발해(698~926)는 당나라와 거란을 제어하리만큼 강력하였으며, 단기(檀奇)의 계통을 이어 태백산(太白山)에 보본단(報本壇)을 설치하고 해마다 천제(天祭)를 지냈다.

대조영(재위 699~719)은 또한 고구려 전쟁 때 불타 없어진 민족의 ‘고서(古書)’들을 복원하는 데 힘썼다. 그리하여 국조(國祖)이자 신조(神祖)인 단제(檀帝)로부터 고구려 대진국에 이르기까지 천손(天孫) 대대로 계승된 계통을 혁혁하게 세웠다.

대조영(大祚榮) 자신은 단군왕검 때부터 전해온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찬양문을 짓고, 친동생 대야발(大野勃)은 서문을 짓고, 개국공신 임아상(任雅相)은 주해를 지었다.

그리하여 대조영이 지은 《삼일신고 어찬 진본》을 태백산(太白山) 보본단에 모셨다는 기록이 《대진국본기(발해본기)》〈제3대 문황조〉에 전하고 있다.

대진국의 고왕(高王)인 대조영이 단군왕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삼일신고》에 찬양문을 지었다는 것은, 고대 조선의 역사적 사상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음을 스스로 천명(天命)한 것이었다.

대조영은 또한 동생 대야발(大野勃)을 시켜 전쟁 때 불타 없어진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복원·편찬 시켰다.

이에 반안군왕(盤安郡王) 대야발(大野勃)은 장장 13년에 걸쳐서 자료조사와 집필 작업 끝에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복원·편찬할 수 있었다.

대야발(大野勃)은 왕명(王命)을 받들어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藏書)와 옛 비(卑)와 흩어져 있던 사서(史書)들을 수집하였다. 그리고 여러 역사적 평론을 참고하여, 13년에 걸쳐 비로소 《단기고사(檀奇古史)》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원본은 임금에게 올려 목판에 글자를 파서 국서고(國書庫)에 두고, 또 그것을 베껴서 백성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대야발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서문(序文)에서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가 백제와 고구려의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불태운 것을 몹시 원망한다.’고 밝혔다.

대야발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복원·저술하는 13년 동안 돌궐국(突厥國, 지금의 터키)에 2차례나 들어가 옛 단군(檀君)시대에 세운 비문(碑文)인 단군고비(檀君古碑)를 현지 답사하였다.

고조선 단군의 옛 비석인 단군고비(檀君古碑)가 왜 돌궐국(突厥國, 지금의 터키)에 있을까?

돌궐은 몽고족의 일파이며, 몽고는 원래 단군조선 초기인 서기전 2137년 단군조선 4대 오사구 단군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汗)으로 봉한 것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돌궐도 단군조선의 후예인 것이다.

사라진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역사책을 복원하기 위하여 대조영과 대야발이 13년이라는 기나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은, 고구려 정신을 올곧게 정통으로 계승하여 후대에 이어주고자 함이었다.

이렇듯 대진국(大震國) 발해(渤海, 698~926년)는 220여 년간 15왕조에 걸쳐, 고구려 고토(古土)를 지키고 민족의 정신을 지키고자 혼신(魂神)의 힘을 다한 나라였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은 진국(震國)의 부족 하나가 금(金)나라가 되고, 금(金)나라가 청(淸)나라가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중국사람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봉선서(封禪書)〉에서 진시황(秦始皇)이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방사(方士) 한종(韓終)과 서불(徐巿) 등 동남동녀(童男童女) 5백 쌍을 신선(神仙)이 살고 있는 해동(海東) 발해(渤海)의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냈다고 하였다.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을 말하며, 바로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실제 진시황이 보낸 방사(方士) 한종(韓終)이 삼한(三韓)에 와 머무른 자취가 있으며, 서불(徐巿) 역시 우리나라 남해에 온 증거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1974년 2월 16일 경남기념물 6호로 지정되어 연구되고 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제1회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진시황(秦始皇) 뿐만이 아니라, 한무제(漢武帝)와 제(齊)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또 연(燕)나라의 소왕(昭王) 등도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여러 방사(方士)들을 신선(神仙)이 살고 있다는 발해(渤海)의 해동(東海) 삼신산(三神山)으로 보낸 사람들이다.

이렇듯 신선사상(神仙思想) 기원(起源)의 원류는 바로 한국(韓國)에서 비롯되었다.



* 위 내용은 외부 기고문으로 본지 편집방향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글 = 정현축 원장 ㅣ 국선도 계룡수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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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미^^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부산을 구포, 울산을 염포, 진해를 웅포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

    2012-10-0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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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항!

    그래서 육당 최남선 선생께서 백두산을 여행하시고 나서 불함산(不咸山) 답사기를 쓰셨군요!

    2012-10-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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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3~400년대의 인물인 신라의 박제상 선생께서는 봉래산은 불함3역의 하나로 인삼이 유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최치원 선생께서 중국에서 일할 때.. 상관인 고변의 생일에 신라의 인삼과 거문고를 선물하였다고 합니다.. *^^*

    2012-10-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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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벽해

    감사히 읽었습니다.
    후대에서도 역사를 잘 계승토록 노력해야겠습니다.

    2012-10-0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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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그네

    단기고사(檀奇古史)》의 서문(序文)에서 대야발이 ..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가 백제와 고구려의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불태운 것을 몹시 원망한다..고 쓴 내용은 중요한 증거자료이군요! 단기고사는 대조영 형제 덕분으로 지금도 우리가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2012-10-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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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선

    참 잼난 이야기네요.. 지금은 전설 내지는 전해 들려오는 이야기인가요? 역사의 흔적이 현재까지 면밀히 내려와야 하는데 중국땅에 그 흔적들이 남아있으니 참 안타깝네요~~ 잘 읽었습니다.

    2012-10-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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