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이야기] 수박의 명인- 이방실과 누이동생
발행일자 : 2011-07-18 09:51:39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이방실(李芳實, 약 1298~1362)은 경남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에서 충렬왕 24년(1298)에 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씨족원류를 보면, 이방실은 함안(咸安) 이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함안이씨족보’에는 이방실의 아버지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이원(李源)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앞서 간행된 씨족원류에 이방실이 시조로 기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의 아버지나 선조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집안 배경보다는 이방실의 개인 능력으로 벼슬길에 나간 것으로 봐야 할 듯하다.
이방실은 충목왕(忠穆王)이 원나라에 갈 때 호종한 공로로, 충목왕 즉위 후 정5품의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면서 역사서에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방실은 공민왕 3년인 1354년에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는데, 이 때 몽골의 다루가치인 노연상(魯連祥) 부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진압했으며, 1359년에는 모거경(毛居敬) 등이 4만 명의 홍건적을 이끌고 의주․정주․인주 등을 함락시키자 안우(安祐)․이음(李蔭) 등과 함께 철주에서 이를 물리쳤으며, 이어 함종(咸從)에 들어온 적도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그 공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그는 또 홍건적이 70척의 배를 이끌고 또다시 서해도에 침입하자 풍주에서 물리쳤으며, 1361년에는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周元帥) 등이 이끄는 20여 만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를 침범하자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병마절도사 김득배(金得培)․김경제(金景) 등과 함께 개주(价州)․연주(延州) 등에서 맞아 싸웠다.
이듬해 정세운(鄭世雲)․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와 함께 20만 명의 대군으로 개경을 공략․수복하여 반성․사유․관선생 등을 비롯한 많은 적을 죽이고, 나머지는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그는 전쟁에서의 공으로 정2품의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왕의 신임을 독차지한 것을 시기한 김용(金鏞)․박춘(朴椿)의 흉계로 안우․김득배와 함께 피살되었다.
태종실록 태종 7년(1407) 정월 갑술일의 언급을 보면, 이방실은 고려말기에 안우와 더불어 선전자(善戰者) 즉, 싸움을 잘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태종실록에서 말하는 싸움은 개인적인 신체 능력보다는 전략전술에 능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옳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가 집안 배경 없이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는 점과 충목왕을 호종한 것을 봤을 때는 무예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로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慵齊叢話)에는 이방실과 누이동생의 무예 실력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방실이 젊었을 때 날래고 용맹하였는데, 견줄 이가 없었다. 서해도(西海道)에서 노닐 적에 길에서 우연히 훤칠하고 키가 큰 사나이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내는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말 앞에서 “영공(令公)은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방실은 그가 도적인줄 알면서도 사양하지 않았다. 약 10리 정도 가니 논 가운데 비둘기 한 쌍이 앉아 있었다. 도적이 “공은 맞출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하자, 이방실은 화살 한 대로 두 마리를 맞춰 잡았다.
해가 저물어 빈 원(院)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도적에게 주면서 “내 잠시 말을 보고 올 터이니, 너는 잠시 여기에 있거라.”라고 하였다. (말을 보고 난) 이방실이 화장실에 앉아 있는데, 도적이 이방실을 향해 활을 당겨 화살을 쏘아댔다. 이방실은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잡아 화장실에 끼어두었다. 이러기를 10여 차례 반복하자, 화살 통에 있던 화살이 다 떨어졌다. 도적은 그의 솜씨에 탄복하고 살려달라고 빌었다.
이방실이 주위를 둘러보니 옆에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 상수리나무가 있었다. 그가 몸을 위로 솟구쳐 나무 끝을 잡더니 한 손으로 도적의 머리끝을 붙잡아 나무 끝에다 매고 칼로 머리 가죽을 벗기니 휘었던 나무 끝이 튀겨 일어나는데, 그 기세가 하늘을 뚫을 만큼 세차므로 머리칼은 모두 뽑히고 도둑의 몸은 땅에 떨어졌다. 이방실은 이 모습을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 가버렸다.
이방실의 지위가 높아진 만년에 다시 그 곳을 지나가다가 어느 농가에서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머문 집이 매우 큰 부자였다. 지팡이를 짚고 나와 맞이하던 노인이 크게 술상을 차리더니 술이 취하자 노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는 어렸을 때 힘있는 것만 믿고 도적이 되어 무수한 행인을 죽이고 약탈을 하다가 한 소년을 만났는데, 비할 수 없이 용맹스러웠다. 내가 그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내가 해를 당하여 하마터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습니다. 이로부터 마음을 바꿔 농업에 힘써 다시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말하고는, 모자를 벗어 보이는데, 머리는 이마처럼 번들번들하여 머리칼이 하나도 없었다.
이방실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역시 날래고 용맹하였다. 항상 작은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 두고 둘이 나뭇가지 위를 올라 다니는데, 이방실이 올라가면 나뭇가지가 움직였으나, 누이동생이 올라가면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는 누이동생이 파리한 아이와 말을 타고 강 남쪽으로 건너가려고 하였는데,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서로 먼저 건너가려고 다투면서 누이동생을 들어 내렸다. 이에 화가 난 여동생은 배의 노를 들고 배를 타려고 하던 사람들을 난타하는데, 굳센 모습이 마치 나는 송골매 같았다.
이방실이 화살 한 대로 2마리의 비둘기를 잡았다거나, 날아오는 화살을 맨손으로 잡았다는 점을 보면, 무예 솜씨가 매우 뛰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두고 올라갔는데, 이방실은 움직이고 누이동생은 움직이지 않더라 하는 용재총화의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방실과 누이동생의 무예 실력이 세간에 전해질 정도로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의 부재로 그가 어떤 무예를 연마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 말이나 조선 전기까지 남아 있는 기록에서 맨손 무예를 가리키는 말로 ‘수박(手搏)’이라는 명칭이 존재하므로, 이방실이 수박의 고수였다고 말을 해도 그리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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