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인 생애… 6․25, 거제도 포로, 그리고 북한 격술

  

[허인욱의 무예이야기] 우직한 무예인 - 윤병인 3(마지막)


윤병인

1950년 6월 24일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부는 시연회를 했다. 이날 박철희와 박희태는 한날 칼인 도와 봉 대련을 보이기도 했다.

이날이 많은 사람이 남쪽(南韓)에서 무예인으로서 윤병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다음날인 6월 25일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의 모습은 남한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1946년과 1950년 사이, 북한 의용군에 편입되었던 맏형 윤병두는 1950년 8월 북한 인민군 대위로 윤병인에게 나타났다. 윤병두는 윤병인에게 “너는 형인 나와 함께 가야한다”고 말하면서, 윤병인을 북한 쪽으로 데리고 갔다.

이후 윤병인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김주호․이동주 등 제자들 몇 명과 수용되어 있었다. 아마도 북한군과 관련된 어떤 일로 사로잡혀 포로가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윤병인은 포로수용소 내에서도 제자들과 수련을 했다. 제자들 또한 수용소 내에서도 선생을 성심성의껏 모셨다.

1952년 5월 7일부터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 포로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김주호는 선생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일어나다가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김주호는 동중학교를 다니면서 윤병인이 중앙기독교청년회권법부를 창설하기 전에 조선연무관권법부에서 가르칠 때부터 배워 ‘자띠’까지 따고 윤병인을 따라다니던 인물이었다. 이 폭동은 6월 10일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끝이 났다.

전쟁이 끝난 후 거제도 수용소에 갇혀 있던 포로들은 개인 면담을 통해 가고 싶은 곳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줬다. 이때 결과적으로 윤병인은 북한으로 가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전한다.

윤병인 자신은 부인과 딸 등 가족과 함께 남한에서 살기를 원했지만, 함께 포로수용소에 있던 인민군 포로들이 윤병인이 남한을 선택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아마도 윤병인이 윤병두의 동생이고 그가 남한에 남으려고 한다는 사실은 안 다른 북한 포로들이 밤에 잠을 자는 그를 집단으로 폭행했고, 윤병인은 정신을 잃은 채 북한 쪽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6․25 이후 남한의 있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권법부 제자 중 이남석과 김순배가 창무관을, 홍정표와 박철희가 강덕원을, 이동주가 대구에서 강무관을 각각 창설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북한에서의 그의 활동과 사망


윤병인 회갑잔치

윤병인은 1966년 1월부터 1967년 8월까지 북한 체육위원회에서 격술(특수전투훈련)을 평양의 모란봉 체육특수부원들에게 지도하게 하였다(혹자는 호위총국이라고도 말을 한다).

이 기간에 체육위원회는 윤병인에게 결혼을 권해 임정숙과 결혼을 하게 되었고, 1966년(또는 1967년)에 딸과 1968년에 아들 윤태원을 낳았다. 윤병인으로부터 시작된 북한의 격술은 남한의 군 관계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무예 개발을 촉발시켜 특공무술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었다(1977년 8월 19일 임진강을 통해 귀순한 인민군 9사단 직할 경보병 대대 소속의 이영선과 태권도 중심으로 단련된 국내 특수부대원 간에 맨손대련을 벌이게 했는데, 특수부대원들이 이영선의 일격에 실신할 정도로 상대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이영선은 체력단련을 위해 수도를 매일 1천5백 번에서 2천 번 이상 시멘트 바닥이나 돌일 치며, 격술 대련 동작을 하루 3시간씩 받았다고 한다. KAL기 폭파범인 김현희도 1980년 4월부터 평양 용성구역에 있는 간첩양성기관인 금성 정치군사대학에서 1년간 사격술 등과 함께 격술을 배운 것으로 알려졌다. ).

1967년 12월 북한정부 산하의 국제체육회는 격술을 국제경기단체로 만들려고 했다. 당시 남한에서는 태권도를 스포츠화해 국제경기로 발전시켜 국가이미지를 높이는 등 많은 도움을 받고 있던 시점이었다. 아마도 북한도 이러한 점에 영향을 받아 세운 계획이었던 듯하다.

하지만, 윤병인은 격술이 경기가 아니므로 경기단체를 만들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자, 국제체육위원회는 격술 프로그램 취소를 윤병인에게 통보하고, 그를 함경북도 청진의 시멘트 공장으로 보냈다.

격술은 상대의 살상을 목적으로 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건강 혹은 취미로서 즐기는 스포츠로서는 적합지 못한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다. 이후 윤병인은 무술가가 아닌 노동자의 신분으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후 북한은 최홍희가 1972년 박정희 대통령과의 마찰로 캐나다로 망명한 이후 국제태권도연맹(ITF)과 전략적 제휴를 통해, 국제스포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남북태권도 교류 시에는 북한 측의 맨 마지막으로 격술하는 이들이 나와, 팔기권을 시범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윤병인은 1983년 4월 3일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끝)

[글. 무카스미디어 = 허인욱 전문위원 ㅣ heoinu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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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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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m Soo

    관심을 갖어주시고 댓글올려 주셔서 감사함니다.
    본인이 윤병인 선생님의 서신 을 직접읽엇고, 카피를 가지고 잇읍니다. 이편지는 윤병인 선생님이 연변 병원의사, 원일우 박사에게 1974년에 보낸 서신 에서 확인한내용입니다. 하여든 반갑슴니다. 가능하면 연락부탁함니다. gmks@att.net 로 부탁함니다.

    2011-07-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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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북한의 주체격술은....윤병인 선생님이 주체로 하시게 아닌걸로 압니다...제일교포이신...
    권도회 공수도 나카무라 히데오(강 창수)님의 공수도가 모체인걸로 압니다!!!
    이부분.....바로 잡으셨으면....하는군요....!!! 조총련계 제자만 거의 받으셨고.....북한체제를
    지지하는 사람 같더군요.....일본에선 권성이라고 불리울 정도이니....!!

    2011-05-2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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