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이야기] 조선의 칼장인 1 - 벙어리 신씨

  

그나마 이름을 알 수 있는 칼 장인들


단원 김홍도의 대장간(보물 527호)


칼을 만드는 장인은 우리 역사에서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조선시대 칼 장인에 관한 기록도 거의 전해지는 것이 없다.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판전(板前)과 소천변(小川邊) 등지에 환도장(環刀匠)이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칼 장인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세종대 인물 심을(沈乙)이다. ‘세종실록(세종실록 권48 12년 6월 경오)’에 의하면, 심을은 경북 의령에 거주하는 선군(船軍)이었는데, 세종 12년(1430)에 일본에 건너가 칼 만드는 법을 배워왔다고 한다. 돌아온 그는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임금에게 올렸는데, 일본 칼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세종은 심을의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그에게 옷 한 벌과 쌀과 콩 10석을 하사하기도 했다.

이후 그 이름을 알 수 있는 칼 장인은 ‘난중일기’ 1595년 7월 21일에 “21일 식사 후에 태구련(太九連)과 언복(彦福)이 만든 환도를 충청수사와 두 조방장에게 각각 한 자루씩 나눠보냈다”라는 기록이 나타나는 태구련과 언복이다. 태구련은 아산 현충사에 전해지는 2자루의 장검에도 그 이름이 나타난다. 장검에 “갑오 4월에 태귀련(太貴連)․이무생(李茂生)이 만들다"라는 글귀에 기재되어 있는데, 태구련과 태귀련은 동일인으로 봐도 큰 오류는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 글을 통해 이무생이라는 칼장인의 존재도 알려준다.

이헌경(李獻慶, 1719~1791)의 문집인 ‘간옹선생문집(艮翁先生文集)’의 ‘이검설(二劍說)’에는 그가 함경북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었을 때 만난 장인과 그가 만든 칼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나는 유학자로 어려서부터 글 읽는 것을 좋아했으나 칼쓰기를 배운 적은 없으며, 힘 또한 칼을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달리 칼을 좋아했다. 사람들이 칼을 차고 있는 것을 보면, 번번이 기뻐 안색이 변하였으며, 이야말로 ‘장부의 복장’이라고 여겼다.

요 몇 해 전에 나는 변방의 종성에 있을 때 칼을 잘 만드는 이동평(李東平)이라는 자를 알게 되었다. 또 옛날 병장기 속에서 일본의 좋은 철을 얻어 명하여 두 개의 칼을 만들게 하였다.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았는데, 짧은 것은 그 모양이 달이 처음 생겨나는 것과 같아서 그 위에 추비(秋朏)이라는 이름을 새겼다.


이헌경은 이동평이라는 칼 장인에게 길고 짧은 두 개의 칼을 만들었는데, 짧은 것은 그 모양이 초승달 형태여서 그 위에 ‘가을날의 초승달’이라는 뜻의 ‘추비(秋朏)’이라는 이름을 새겼다고 한다. 아마도 짧은 검은 칼 몸이 많이 휘었던 모양이다(이동평에 관해서는 조혁상, '조선후기 도검의 문학적 형상화 연구', 성균관대박사학위논문, 2010에서 도움을 받았다).

청도의 칼 장인 벙어리 신씨


기산 김준근의 대장간


이후 기록으로 알 수 있는 칼 장인으로는 이옥(李鈺, 1760~1812)의 신아전(申啞傳)에 나타나는 ‘벙어리 신씨’가 있다. 벙어리 신씨는 경북 청도군에 사는 벙어리 칼 대장장이였다. 그는 이름 없이 탄재(炭齋)라는 호(號)로만 행세하였다. ‘탄’과 ‘재’는 각각 ‘숯’과 ‘집’을 의미하므로 ‘숯을 많이 사용하는 대장간’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그는 호를 통해 자신이 대장장이임을 드러낸 것이다.

탄재는 칼을 잘 만들었는데, 칼이 날카롭고 가벼워서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보다 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다른 칼 장인들은 대개 쇠를 고르는 일에 세심하게 하는데 반해, 탄재는 쇠의 품질은 묻지 않고 그 값만을 물었다. 값이 비싼 것이 상품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탄재는 또한 성질이 매우 사나와서 자기 뜻에 거스르는 사람이 있으면 화로의 불덩이를 집거나 불을 헤칠 데 사용하는 쇠 젓가락인 부젓가락과 쇠망치를 겨누기도 했다. 한번은 경상감사가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일을 시켰는데 그 앞에서 상투를 자르며 거절하기도 했다.

탄재는 칼 말고 다른 물건에도 박식했다. 한번은 고을의 군수가 탄재에게 자신의 구슬갓끈을 살펴보게 하였다. 그는 바늘로 금을 긋고 지푸라기를 꽂아 일본인이 호박(湖泊)을 캐는 시늉을 하였다. 군수는 이것은 연경에서 사온 것이라고 하였다. 탄재는 손을 들어 남쪽에서 북쪽으로, 동쪽으로 하였다. 물건이 옮겨간 것을 말한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믿지 못하는 기색을 보이자 탄재가 크게 노해, 갓끈을 잘라 불 속에 던지자 송진 냄새가 났다. 호박은 송진이 땅속에 묻혀서 굳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군수는 “이제 믿겠네. 그러나 갓끈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어찌하겠느냐”라고 말하였다. 탄재는 집으로 가서 갓끈을 한줌 움켜 가지고 와서 돌려주었는데 모두 같은 것들이었다.

태어나면서 벙어리인 자는 귀도 들리지 않는데, 탄재 역시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말을 주고받을 수 없었다. 오직 고을 아전 가운데 손짓으로 말을 대신 할 줄 아는 자가 있어, 몸짓으로 말을 하면 서로 그 마음의 곡절을 다 표현할 수가 있었으므로 언제나 그가 와서 통역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아전이 탄재보다 먼저 죽자 그 집에 가서 널을 때리며 하루 종일 개가 울부짖듯이 하였다. 얼마 뒤에 그도 병으로 죽어 탄재가 만든 칼은 희귀품이 되었다.

이옥은 탄재에 대해 “그가 상투를 자른 일은 스스로를 지킨다는 의미이고, 호박을 알아차린 일은 날 때부터 아는 성인과 같다. 이 벙어리는 도를 얻은 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는 한갓 칼장인에 그치는 자가 아니다. 통역하던 아전이 죽자 애통해한 일은 자신의 뜻을 알아듣는 친구를 얻기 어려움 때문일 것이니,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18세기 후반 문인인 심재(1722~1784)가 편찬한 '송천필담(松泉筆譚)'에 의하면, 벙어리 신씨가 만든 칼은 왜인들도 신이 만든 것 같은 물건이라는 극찬을 하기도 했다.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이재난고(?齋亂藁)’ ‘청도군산 보검’조에도 청도군에서 나는 보검을 조선에서 제일로 치는데, 벙어리 신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칼 #장인 #조선시대 #허인욱 #판전 #소천변 #세종 #난중일기 #조방장 #무인이야기

댓글 작성하기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