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의 이야기] 故 홍정표 원로의 태권도와 무도 - 하편
발행일자 : 2011-01-14 18:27:19
<글 = 허인욱 무술전문위원>
6․25와 해인사
6․25때 부산으로 피난 갔는데, 미군 부대에 들어가서 심부름을 했다. 미국 사람하고 일본 사람이 날 보고 자기네 나라로 가자는 것을 거부했다. 내가 운동한다는 것을 알고 몇 차례 보여주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에서 임환경(林幻鏡, 1887~1983) 스님 밑에서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전쟁 때라 부산에 오래 있기도 뭐하고 한 형국에 누군가와 인연이 닿아 들어가게 된 것이다(정리자 주 : 지승원의 증언에 의하면 출가하여 무봉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하며, 강기석의 서술에는 홍정표는 1951년에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최봉술 스님을 따라 출가하였다고 하고 있는데, 임환경 스님의 문하가 옳다. 자료를 보면, 임환경은 1887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마장동에서 출생하였으며, 13세 되던 해 입산하여 가야산 백련암에서 연응(蓮應)스님을 스승으로 불교에 몸을 담았으며, 1946년 효봉스님이 방장으로 있던 해인사에 주지로 취임하였다. 임환경은 1949년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 1904~1979)에게 주지직을 인계하고 영자전에 머물면서 순회포교 활동을 하였다고 하는데, 강기석의 글에 보이는 최봉술은 최범술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1954년에) 해인사에 중학교가 생겨 (체육선생을) 조금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때도 YMCA권법부에서 배우던 무예를 조금 가르쳤다(강기석의 서술에 의하면, 그 때 당수부를 만들어서 방과 후에 30여 명의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당시 주민들이 ‘날아다닌다’고 할 정도로 혈기 왕성했다.
이후 1955년에 서울대 행정직을 얻어 상경했으며, 서울대생들을 상대로 태권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승원은 서울에 올라와서 체육교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도원과 흥무관 창설
6․25가 끝나고 이남석 씨가 야심이 많아서 독단적으로 (YMCA권법부가 아닌) 창무관을 냈다. 세력을 쥐고 싶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전통적인 것을 잇기 위해 (1966년에) 서울대 법대에 흥무관을 창설했다(정리자 주 : 박철희에 의하면, 홍정표는 1956년에 흥무관에 앞서 무도원을 창설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그만 두었다고 한다-이에 대해서는 박철희 편 참조-. 지승원에 의하면, 창무관 수련생들 중 일부가 홍정표에게 지도를 받고자 하였는데, 이미 선생이 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여 이를 돌려보냈다가 오해를 사기도 한 적이 있기도 하다고 한다. 당시 관을 통해서만 수련생들의 단 심사를 볼 수 있었는데, 창무관이나 강무회(강덕원무도회)를 통해 단 심사를 보기가 난감했던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강덕원과는 박철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재정립되는 과정에서 홍정표와 상의가 없었고 이때의 섭섭함 때문에 강덕원과도 거리를 두었다고 한다).
서울대에서는 3년 동안 근무하면 이동을 해야 하는데, 학생들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법대에서만) 8년을 (재직)했다. 사대에서 하다가 법대 학생들의 요구로 법대로 옮기기도 했다. 학생들이다 보니 운동실력이 뛰어나지는 않았다(정리자 주 : 지승원에 의하면, 서울 법대생 외에도 사대에 있을 때 가르치던 고등학생들이 법대까지 와서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지승원이 법대에 다닐 때는 선배들 중에 후배들을 가르치는 부장이 있었고 부장이 아니더라도 운동에 능한 선배들이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YMCA권법부의 무예를 지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승원이 대한태권도협회 초단을 받을 때는 국기원 건물이 완공되기 전으로 팔괘 품새와 지금의 고려 품새가 아닌 일(一)자형의 고려 품새가 있었을 때였다고 한다. 2단 심사는 국기원에서 봤는데, 당시까지 팔괘로 본 기억이 있으며, 홍정표도 책을 통해 태극품새를 보고 가르치기도 했지만, 옛날 형을 더 좋아했었다고 한다. 흥무관은 서울대가 관악으로 옮겨간 1975년에 폐관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고 한다. 서울법대 태권도부 출신으로는 신기남(의원)․이종황(검사)․이복환 선배․이협(의원)․양창수(대법관)도 기억난다고 한다.).
대한태수도협회나 태권도협회의 이사를 했지만 명예만 걸어 놓은 것으로 일에는 관여를 하지 않았다. 이교윤 씨와는 (서로) 이해를 (잘) 해 주었기 때문에 가깝게 지냈다. 조선연무관권법부 내에 알력이 많아서 나하고 의논을 많이 했는데, (이교윤 씨가)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다(정리자 주 : 지승원에 의하면, 청도관 출신의 유응준 씨와도 친하게 지냈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황기 씨는 (협회 등을) 혼자 하려고 했다. (운동을) 하지 않은 것도 했다고 하고 엉터리였다(정리자 주 : 지승원은 홍정표가 황기 선생에 대해서 평이 박하고, 국제태권도연맹의 최홍희 선생이 만든 창헌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홍정표는 무술의 오의는 직접 배우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말을 많이 했으며, 전승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따라서 개인이 창작한 최홍희의 창헌류나 책을 보고 독학한 황기에 대해 평가가 박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
제자들에게 무예를 가르칠 때 형 중심으로 한 것은 형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형에 모든 것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 전의 무술은 수련을 하면서 인간을 만드는 인격도야가 기본이었다.
예전에는 태권도를 수련이라 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정신 수양을 하면서 사람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운동으로 변해서 하나의 오락으로 되어 있다. 예전과 지금의 태권도 수련은 너무나 달라져서 말하기조차 어렵다.
현대의 태권도는 무술이라고 하기도 좀 어렵다. 옛날 같은 것이 나오기 어렵다. 지금 태권도 발차기만 강조하는 것이 좀 그렇다고 생각한다. 흥미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보기가 좋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 위까지 올려도 그대로 나두고 있다.
옛날에는 발차기도 허리 위로 올리지 않았다.손이 주먹보다 빠르고 발은 손에 다 걸리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방어와 공격이 급소를 향해서 일격에 끝을 맺었기 때문에 대련이 멋있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따라서 지금과 비교하면) 대련이 싱거웠다. 대신에 정신적으로나 힘이 집중되기 때문에 한 동작 한 동작에 힘을 쏟았다(정리자 주 : 지승원에 의하면, 홍정표는 무술은 ‘일격필살’이라고 생각하고 직선적인 동작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홍정표는 1984년에 종로YMCA에 태권도부가 다시 설치되면서 사범으로 재직하였다가 만 70세 되던 해에 퇴직했다. 당시 YMCA에서는 사범 2명이 수업을 진행하면서 대한태권도협회의 형들을 가르쳤는데, 그래도 20분 정도는 같이 수련을 했다. 일반 수업 이후에 본인들은 옛날 운동을 하였는데, 지승원도 이 때 YMCA권법부의 기법들을 익혔다고 한다).
앞으로 태권도도 인격도야와 일격필살의 무도로서 가치를 가지기 바란다.
홍정표 원로께서 2011년 1월 6일 소천하셨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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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4-05-2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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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형을 강조한 가라데조차도 실전공수를 표방하는 최영의의 극진가라데에 모두 깨졌다는 사실...
2013-04-1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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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입니다. 쓰신 글을 보니까, 태권도 무예의 본질 즉 일격필살이라는 것은 예전에 봤던 꽤 괜찮은 일본 가라데영화에서 사범(주인공)이 하는 말과 비슷합니다. 상대방과 겨루기에서 일격필살은 화려한 술기가 아니라 한 방이겠죠. 태권도의 화려한 발차기가 고수에겐 통할까요?
2013-03-2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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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신, 한 우물만 파신 무도인으로서 많인의 존경을 받을 만한 무도인 이심니다. 고인의 명복을 빔니다.
2011-05-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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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딱 잘라서 말하면 이분 말씀은 가라데가 좋다. 라는 것이군요. 왜 이런 분이 태권도 원로인지 모르겠군요. 발차기가 옛날엔 허리위로 올라가지 않았고, 손이 주먹보다 빠르고, 형에 모든것이 담겨있고, 전승을 중요하게 여기셔서 계인이 만든 최홍희의 창헌류를 싫어하고.. 완전 생각과 철학이 과거 일본 가라데 이군요. 이분은 태권도 원로라고 할수 없습니다.
2011-02-05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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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도복 입은 포스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2011-01-1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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