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카스 美 대륙 개척자를 만나다] 뉴욕 조시학
발행일자 : 2010-08-16 19:56:44
<무카스 = 미국 뉴욕 / 정대길 기자>

1961년 어바나 샴페인에 위치한 일리노이 주립대 비즈니스 경영경제학과를 졸업한 조시학(76) 사범. 한국인 최초로 뉴욕에 태권도장을 개관한 그다. 미국에 한인 도장은 최초였다. 문과 무를 함께 가르치고 싶어 날마다 수련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그를 두고 많은 제자들은 ‘똑똑한 스승’이라고 말한다. 2001년,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은퇴하기까지 그는 꼬박 40년을 태권도 속에 빠져 살았다.

조시학 사범
- 당신을 두고 유도와 태권도를 수련한 무도인이라고들 합니다.
“1949년에 유도를 처음 접했습니다. 이후 1954년에는 지도관에서 운동을 했죠. 군기가 엄청났습니다. 자유대련을 기본으로 했는데 매 운동 시간마다 긴장감이 팽팽했습니다. 이후 고려대학교에서 윤쾌병 관장을 모시고 운동을 했습니다. 고려대학교 공수도부였죠. 주장까지 했죠. 저는 당수도도 수박도도 아닌 공수도를 했습니다. 당시 태권도는 성인들의 호신을 위한 개념이었지만, 일반적인 시각에서 나쁘게 얘기하면 거의 깡패 취급을 받았습니다. 장가들기도 힘들 정도였죠. 젊었을 적, 아내의 부모님께 인사라도 할라치면 깡패한테 어찌 딸을 주느냐고 했을 정도의 사회적 분위기였습니다. 이렇게 짧게나마 과거를 돌아보니, 저도 어쩔 수 없는 ‘태권도쟁이’ 인가 봅니다.”
- 미국으로의 첫 발, 궁금합니다.
“6.25직후 대학원 진학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국가에서 유학생 시험을 개최한다는 공고를 보았습니다. 공부를 계속하려던 차에 좋은 선택이었죠. 1958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입국했습니다. 유명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특기 활동 등이 중요합니다. 당시 현지 미국인들에게 태권도란 익숙하지 않은 무술이었습니다. 그래서 특기란에 ‘코리언 가라테 블랙벨트 2단’이라고 기입하기도 했죠. 당시 일본의 가라테는 전역한 미군 참전용사들로부터 미 전역에 보급된 상황이었습니다. 순전히 미국인들에 의해서였죠. 일본인은 별로 없었습니다.”
- 미국에 한국인 최초로 태권도장을 개관했다.
“집에서의 지원금도 거의 끝이났습니다. 겨우 먹고 살았야만했던 유학생활이었죠. 도장을 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당시만해도 공부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야지라는 생각뿐이었죠. 그러다 미국인들이 유도보다는 가라테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미국 내에도 가라테 도장은 많았습니다. 일본 사람이 하는 도장이었죠. 그렇다고 대한민국 국민이 미국 땅에서 가라테를 그대로 가져와 도장을 개관할 수는 없었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국의 무술을 지칭하는 ‘코리언가라테’를 쓰자는 생각을 했죠. 한국인 최초의 도장이었습니다. 집 주인이 월세 가격을 싸게 해준 다고는 했지만, 저에게는 너무도 비싼 금액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저의 고충을 알고 당시에 성의를 모아주었고 그것이 큰 힘이 되었죠.”
1961년 초, 대학 졸업 후 귀국을 앞둔 그는 맨해튼 34번가에 위치한 ‘주도 트윈스'라는 유도 도장을 찾았다. 여기서 그는 미국인들의 유도와 동양 무술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알게됐다. 이때 태권도에 대한 가능성을 점쳤고, 결국 그는 귀국을 포기했다. 1961년 가을께, 조시학 사범은 뉴욕 맨하탄 57번가에 위치한 7층 높이의 빌딩 5층에 '헨리 조 인스티튜트'라는 도장을 개관했다. 물론 홍보는 ‘코리언가라테’였다. 후일 이 도장은 미국 내 대한민국 최초의 태권도장이 되었다. 미국명 ‘헨리 조’는 연일 언론의 관심을 받았으며, 잭팟 쇼, 자니 카슨 쇼, 와이드 월드 오브 등의 쇼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후 이듬해에는 신현옥(롱아일랜드), 전인문(뉴욕)과 손덕성 사범(뉴욕) 등이 개인도장을 개관했다.

조시학 사범
- 당시 태권도가 미국 정착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미국 각 언론에 격파시범 등의 묘기를 보여주면서죠. 특히 공중에서 발로 무언가를 격파하는 것은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유도는 재미없고, 태권도는 재밌다는 인식이 그때부터 퍼지기 시작한 것이죠. 동양의 마샬아츠, 이소룡에 대한 인기도 한몫했습니다.”
-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자리잡기, 힘들지 않았나?
“몸으로 배운 미국생활이었습니다. 한국의 작은 사범을 향한 각종 고소 등은 끊이질 않았죠. 도장을 개관할 때에는 비상구와 소방 시설 등이 있어야한다, 도장 보험, 수련생 상해보험 있어야한다는 등의 조항도 몰랐습니다. 수련 중에 이가 빠지고 다치고, 그로인한 사범의 관리 소홀이 문제가 되어 큰돈을 물어주기도 했습니다. 소방시설이 미비해 정부로부터 보수 공사 지적을 받았는데요, 그렇게 하게되면 몇 만 달러가 소비되어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죠. 결국 재판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의 건물주가 맹인이었고, 재판관 중에 운 좋게 맹인이 속해 있었죠. 증인으로 참석한 건물주의 한 마디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저희 건물은 텅 비었습니다. 아무도 들어오려고하지 않습니다. 헨리 조는 저희 건물에서 월세를 가장 잘 내는 세입자입니다. 만약 도장 문을 닫으면 저희 맹인들은 먹고 살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저를 뉴욕에서 40년간이나 도장을 할 수 있게 해준 특별한 선물이자 사건이되었죠.”
- ‘조시학’하면, 태권도 시합을 빼놓을 수 없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1965년 11월에 헌터 컬리지에서 전미오픈 선수권대회를 주최했습니다. 쿵후, 가라데, 태권도 등의 종목별 경기가 열렸죠. 점차 자리를 잡아가면서 67년 3회 대회에서부터는 꿈에 그리던 뉴욕의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참가선수들도 많아졌고, 인기 절정의 브루스 리(이소룡)가 게스트로 참가했습니다. 척 노리스는 선수로까지 출전하게 되면서 유명한 대회가 되었죠. 올해로 46회째를 맞았습니다.”

조시학 사범이 수련생의 자세를 잡아주고 있다
조시학 사범이 말하는 당시의 태권도 시합은? “발은 한국인의 태권도가, 손은 일본의 가라테라는 인식이 확대 되었죠. 시합에서도 실제 그랬구요. 점차 한국 태권도의 발차기가 없이는 상대를 이길 수 없게 되었죠. 처음에는 경기 스타일이 가라테였지만 점차 태권도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가라테의 색채를 완전히 벗어냈습니다.”
- 조시학 사범의 지도 철학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태권도는 무도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합니다. 왜 이렇게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해내려는 지도자들의 사고방식이 핵심이죠. 나도 했으니, 너도 하라는 식은 아닙니다. 또 무도란 인간으로서의 예의범절을 갖추게 하도록 교육해야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죠. 스포츠가 아닌, 지면서 이기는 무도 태권도를 배우게 해야 합니다”
조 사범은 태권도의 ‘무’와 ‘문’을 동시에 가르치고 싶다고 한다. 태권도의 혼란과 정체성 상실이 수면위로 급부상하기 시작하던 1960년대 초, 그는 학자로서 고민에 빠졌다. 조 사범이 말하기를 문을 위해서는 명칭의 통일이 중요한데, 당시 미국에서는 여전히 한국에서 온 사범들이 당수도, 공수도, 태수도 등의 이름을 가지고 각기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민 끝에 조 사범은 세계태권도연맹의 이종우 사무총장을 비롯한 태권도계 고위 간부들에게 명칭의 통일을 요구했고, 결국 각 관을 통합해 나온 것이 ‘태수도’였다고 한다.
- 죽기 전에 가장 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한국의 영향력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외와 한국 간의 중간 다리역할을 해내고 싶어요. 피파(FIFA)라는 조직체의 주도권이 영국에서 타국으로 넘어간 것도 좋은 예이지요. 우리는 태권도의 조직체를 재정비하고, 더욱 확장해야 합니다.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면 다 빼앗깁니다. 남김없이요. 태권도에 책임을 지고 일할 수 있는 기회와 시기가 오기를 고대합니다.”

무카스를 시작페이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