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인욱의 무인이야기] 돌을 맨손으로 깨다-양익명(梁益命)

  


맨손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양익명(梁益命)은 조선 숙종(肅宗) 6년(1680)에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박천군수(博川郡守)와 중화부사(中和府使) 등을 지냈다.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던 숙종 8년(1682)에는 군관(軍官)으로 일본에 가는 통신사 일행을 수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이나, 출신에 대해서 알려주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통해서 그의 내력만을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무예도보통지 권법 2인

박천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우의정 민암(閔黯, 1636~1694)이 숙종 17년(1691) 3월에 그의 용력(勇力)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남을 숙종에게 고한 적이 있었다. 민암은 그가 돌덩이를 주먹으로 격파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손으로 막을 수 있으며, 또한 말타기에도 능해 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라고 보고하였다. 민암은 당시 무사들이 강궁을 잡아당기지도 못한다고 하면서 그의 재주를 권장해 병조(兵曹)에서 수용토록 하자고 숙종에게 건의하였다. 숙종도 이에 좋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숙종 18년(1692) 8월 9일(병술)에는 숙종이 친히 그를 불러서 무예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어제처럼 친히 임하여 무예 재주를 관람하고, 무릇 4일 만에 파했다. 우의정 민암이 일찍이 박천군수 양익명의 용력이 남들보다 뛰어남을 임금께 아뢰었었다. 이때에 이르러 앞으로 오도록 불러서 그의 무예를 시험했는데, 양익명이 주먹으로 돌을 치자 손이 닿는 순간 돌이 곧바로 부서졌다. 임금이 “또 능한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니, (양익명이) 대답하기를, “신이 서 있고 앞에서 이리저리 돌을 던지게 하더라도 막아내어 맞힐 수 없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선전관 네 사람에게 돌을 가져다가 던지도록 하니, 양익명이 손으로 받아내고 발로 차고 하여 하나도 (자기 몸에) 맞는 것이 없게 하였다. 임금이 기뻐하며 드디어 하교(下敎)하기를, “양익명이 지금 무슨 관원이냐?”라고 하자, 좌우에서 대답하기를, “전에 군수(郡守)였는데, 고적(考績)에 하등(下等)이었습니다.”라고 하니, 하등의 고적을 없애 주고,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1617~1714)은 “무예(武藝)를 친히 검열하시는 것은 국가의 대사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양익명의 재주 같은 것은 다만 맞닥뜨려 겨루는 놀이일 뿐입니다. 가까운 자리에서 시험할 것은 되지 못하니, 원컨대, 상례로 삼지는 마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춘당대에 나가 양익명을 불러 그의 솜씨를 본 숙종은 그의 무예솜씨에 만족한 탓인지 하등이었던 그의 근무성적을 없애 주고, 품계에 맞는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였다. 원래 조선시대 지방 관리의 근무평가는 ‘수령칠사’라고 하는 7가지 기준을 가지고 이루어졌다. 농업과 누에치는 것을 잘 할 것, 인구를 늘릴 것, 학교를 일으킬 것, 군대에 관한 사무를 잘할 것, 부역(賦役)을 고르게 할 것, 소송을 잘 처리할 것 그리고 간사하고 교활한 것 등을 없애애는 것들이 그것이다. 지방관의 성적평가는 관찰사가 매년 6월 15일과 12월 15일에 했는데, 이 때 성적은 상상(上上)․상중(上中)․상하(上下), 중상․중중․중하, 하상․하중․하하 등 9등급으로 나누었다. 양익명은 하등이었다고 하므로 하상․하중․하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 관리가 하등의 성적을 받으면, 곧바로 파직을 당해야 했으며, 하를 받아 파직된 자는 2년이 지나야 임용되었다. 즉 원칙대로라면 양익명에게 벼슬을 제수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시 양익명에 대한 숙종의 관대함은 승정원일기 숙종 18년(1692) 9월 16일 기록에도 나타난다. 병조판서 민종도(閔宗道)가 춘당대 시재 때에 양익명에게 품계에 맞는 관직을 제수한다는 명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가 박천군수로 있다가 물러날 때, ‘해유(解由)’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자, 숙종이 이미 명령이 있었고 관직을 제수하였으니 구애받지 말라고 하기도 하였다. ‘해유’는 조선시대 관리가 물러날 때 제출해야 하는 인수인계서로 ‘해’는 임기가 만료되어 그 직책에서 해제된다는 뜻이고, ‘유’는 임기중의 업무에 대한 평가를 거쳤다는 뜻이다. 즉 ‘해유’는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인수인계하면서 재임했던 동안 출납․보관하던 물품 등의 회계가 정확함을 인정받고 책임을 면제받는 것이었다. 따라서 해유를 마치지 못한 관리는 전보될 수 없고, 혹시 특명으로 전보되어도 녹봉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해유받지 못하여 해임된 자는 관료로 천거받지 못하게 했다. 그런 양익명임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벼슬을 제수했다는 것은 그의 무예솜씨를 매우 높이 산 까닭이라 짐작된다.


무예도보통지 권법

승정원일기를 보면, 이 때 양익명은 종4품의 도총부(都摠府) 경력(經歷)에 임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군관(軍官), 부호군(副護軍), 부사(府使), 영종첨사(永宗僉使), 백령첨사(白翎僉使), 창성부사(昌城府使) 등을 거쳐, 숙종 37년(1711)에는 중화부사(中和府使)에 이르렀다. 하지만, 숙종 38년(1712) 10월 28일(무인) 기록을 보면, 양익명은 전삼세(田三稅)를 은(銀)으로 바꾸어 지부(地部)에 상납할 적에 장사치들과 결탁하여 물건을 판매한 이익을 모두 자기를 살찌우는 데 사용했고, 촌가(村家)에 출입하면서 뇌물을 억지로 받은 것이 발각돼, 사간원의 탄핵을 받게 된다. 같은 날짜의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양익명에 대해 “본래 무식한 사람으로 눈이 있으나 글을 알지 못했으나 크고 작은 공적인 일을 군관 이(李)씨 성을 가진 사람의 손에 맡겼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무예만 알고 다른 일에는 무딘 전형적인 무인이었던 것 같다.

숙종은 그를 즉시 파직시키지 않고, 좀 더 자세히 알아보라는 명을 내리기도 하고 같은 해 10월 29일과 11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그의 파직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 대한 숙종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성격을 알고 뛰어난 무예 솜씨를 아낀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숙종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11월 5일 숙종실록을 보면, 중화부사의 이름에 조유춘(趙囿春)이라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 결국에는 경질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1일에 그는 부호군(副護軍), 숙종 41년(1715)에는 소강첨사(所江僉使)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양익명의 무예와 관련해서는 승정원일기 영조 24년(1748) 11월 24일에도 기록이 있다.
임금이 말하기를 “윤창주(尹昌周)는 장사로서 유명했는데, 선조께서 명하여 양익명과 힘을 겨루도록 하였다. 양인이 힘을 겨루다가 바지가 찢어지기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뒤에 선조(숙종)께서는 (웃사람이) 보기 좋지 않다고 하여 다시는 각력(角力)을 시키지 않았다.”라고 하니, (좌변포도대장) (조)동점(趙東漸)이 말하기를, “(윤)창주는 훈련원에서 벽의 가장자리에 발을 붙였는데(着足), 대들보 위의 제명(題名)이 있는 가장 높은 곳입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인간으로서 가지기 어려운 신선과 같은 날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숙종이 양익명과 장사로 유명한 윤창주를 대결시킨 일화를 담고 있다. 윤창주는 을사사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윤임(尹任, 1487~1545)의 증손이다. 승정원일기의 기록만으로 살펴보면, 윤창주는 훈련원 대들보 위의 판액이 있는 위치까지 발자국을 남길 정도의 인물이었다고 하니, 그는 몸이 날래고 발차기에 능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무예에서 발질이 이어져 왔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바지가 찢어지는 바람에 이후에는 각력 시합이 금지가 되었지만, 손에 능한 양익명과 발에 능한 윤창주의 대결은 매우 흥미로운 대결이었을 것이다.

양익명은 전체적으로 맨손무예에 능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떤 무술을 수련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국가의 녹을 먹는 관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권법에 능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한창인 때에 명 군사들로부터 기효신서 등에 실린 무예를 배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익명은 그러한 무예에 정통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그가 별도의 무예를 수련했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한 확인은 추후 자료 발굴을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참고로 손으로 돌을 깨는 기법은 지금도 무예를 하는 이들이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가끔 시연하곤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고려시대에도 찾아진다. 고려 원종(元宗) 12년(1271)에 낭장(郞將) 김희목(金希牧)은 손으로 돌을 깰 수 있다는 이유로 원의 황제가 그를 불러 보고자 하므로 고려에서 보내주었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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