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전자호구도, 헤드기어도 없어
발행일자 : 2008-10-21 15:10:36
<무카스미디어 = 신준철 기자>


1973년‘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최근 태권도 전자호구 사용에 대한 찬반논쟁이 다시 가열되고 있다. 세계태권도연맹(WTF)이 베이징올림픽 직후 내년 런던세계선수권은 물론 2012년 올림픽에도 전자호구 사용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끝난 전국체전 태권도 경기에서도 전자호구가 사용됐다. 이는 ‘좋다 나쁘다’의 평가를 떠나 현대 과학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사진 속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경기 장면과 비교해 보면 태권도 장비가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 확연히 알 수 있다.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1973년 5월25일부터 27일까지 나흘간 국기원에서 열렸다. 이 당시에는 WTF(1973년 5월 28일 창설)도 없었고, 각 나라별 협회가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외 참가자들은 대부분 한인 사범들이 자비를 들여 데려온 제자들이었다. 대회는 개최국 한국을 비롯해 미국, 독일, 프랑스, 우간다, 멕시코, 자유중국(현 대만) 등 총 20개 팀이 참가했다.
경기 규칙은 지금처럼 세분화돼 있지 못했다. 경기 시간이 3분 3회전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주관적인 판단이 많았다. 경기 장비도 지금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헤드기어(머리보호대)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대나무로 만든 몸통 호구와 낭심 보호대만을 착용했을 뿐이다. 어떤 면에선 전자호구와 보호장비를 착용한 지금의 경기모습과 비교해 상당히 가벼워 보인다. 그런데 전자호구가 도입되면서 복고풍으로 회귀한 부분도 있다. 바로 사진 속 경기 모습처럼 도복 바지가 짧아졌다. 장비는 최신인데, 도복이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당시 경기운영부 임원으로 대회에 진행했던 박현섭 국기원 총무이사는 “해외에서 참가한 선수들은 경기규칙조차 모르고 있었다. 멕시코의 문대원 사범이 데려온 제자들을 내 도장(당시 마포동 서교동에 위치한 서교체육관)에서 경기 규칙을 가르쳐 대회에 내 보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며 “특히 ‘나미로’라는 멕시코 선수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상당히 몸이 재빨랐던 친구로 좋은 경기를 펼쳐 인기가 많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과거 세계선수권에서는 KO가 많이 나왔다. 보호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당시만해도 한국과 해외 선수들의 기량차이는 상당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당시 경기의 판정은 심판이 아닌 배심제를 통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배심제란 배심원들이 심판들의 수기 채점표를 받아 들여 참고 후 주관적으로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배심원들은 각 관(태권도 통합이전에는 청도관, 무덕관, 창무관 등으로 나눠져 있었다)의 고참이나 원로들이 맡았다. 그러다보니 누가 봐도 ‘청’이 이긴 경기가 ‘홍’의 승리로 마무리 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난리가 날 상황이지만, 당시만 해도 선후배 위계질서가 우선이던 시절이었다.
이렇듯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됐던 제1회 세계선수권은 대회 다음날인 28일 국기원에 20개국 대표가 모여 WTF를 창설하면서 체계가 잡혀나가기 시작했다. WTF 초대 총재는 김운용씨(당시 대한태권도협회장, 국기원장)가 사무총장에는 이종우씨가 선출됐다.
[신준철 기자 / sjc@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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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벗어...그래야만 태권도가 격투스포츠계의 호구로 안불려...
2008-10-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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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누가 봐도 ‘청’이 이긴 경기가 ‘홍’의 승리로 마무리 되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은 난리가 날 상황이지만, 당시만 해도 선후배 위계질서가 우선이던 시절이었다.
시작이 그러했으니 나중이 심히 썩었지. 원로라는 인간들 인격과 자질부터 검사해보자. 정말 태권도 다시 태어날 때가 된게야. 배운게 도둑질이고 그밥에 그나물이니 태권도로 비리저질러 배부른 놈들은 이제 과감히 척결해버릴때가 아닌가?2008-10-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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