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나는 언더독일 때 더 강하다”…‘코리안 좀비’ 배준서의 화려한 부활
발행일자 : 2026-09-06 19:43:59
[한혜진 / press@mookas.com]

세계 최강 잔디부터 서은수·박태준까지 연파…국내 경쟁 가장 치열한 -58㎏급 정상

“나는 언더독일 때 더 잘하는 것 같다.”
한때 남자 경량급 최강자로 군림했던 배준서(강화군청)가 자신을 둘러싼 의심에 보란 듯이 답했다. 세계 최강 아볼파즐 잔디(이란), 우시 세계선수권 챔피언 서은수(한국체대), 파리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태준(경희대)을 연달아 꺾고 무주 그랑프리 정상에 올랐다.
배준서는 지난 5일 전북 무주 태권도원에서 열린 G6 등급의 ‘무주 태권도원 2026 세계태권도 그랑프리 시리즈’ 남자 -58㎏급에서 우승했다.
우승까지 가는 길에는 쉬운 상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16강에서는 최근 국제무대에서 한국 선수들을 잇달아 꺾으며 이 체급 최강자로 떠오른 잔디를 2-1로 제압했다. 준결승에서는 2025 우시 세계선수권 우승과 함께 대회 남자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올림픽랭킹 1위 서은수를 2-0으로 꺾었다.
결승 상대는 파리 올림픽 챔피언 박태준이었다. 배준서는 마지막 3라운드 종료 2.5초 전까지 8-13으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회심의 몸통 뒤차기를 적중시켜 4점을 얻었고, 곧이어 박태준이 한계선을 벗어나면서 종료 10초 이내에 적용되는 감점 2점까지 더해졌다. 불과 2.5초 사이 승부를 14-13으로 뒤집으며 라운드 점수 2-1의 대역전승을 완성했다.
지난해 무주 그랑프리 챌린지 결승에서도 종료 직전 몸통 뒤차기로 승부를 뒤집었던 배준서는 1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또 한 번 믿기 힘든 역전극을 재현했다.
“결과가 잘 따라주니까 저도 좋죠. 무주 태권도원의 기운이 저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태권도원은 저에게 ‘역전의 땅’인 것 같아요.”
배준서의 별명은 ‘코리안 좀비’다. 상대가 누구든 경기 내내 끊임없이 압박하며 체력을 소진시키고, 수세에 몰려도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투지에서 붙은 이름이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 역시 잔디와 맞붙은 16강전이었다.
잔디는 지난해부터 국제무대에서 패배를 모르던 세계 최정상급 선수다. 날카롭고 강한 앞발을 앞세워 박태준과 안향식, 양희찬 등 한국의 정상급 선수들을 잇달아 제압했다. 배준서에게도 첫 맞대결이었다.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었어요. 잔디가 지난해부터 한 번도 지지 않았으니 현재 최강자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대진이 맞지 않아 만나지 못했는데, 한 번은 빨리 붙어보고 싶었습니다.”
경기를 앞둔 배준서의 고민은 명확했다. 잔디의 강한 앞발을 어떻게 끊어내느냐였다. 거리를 내주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자신의 장점인 체력과 접근전으로 정면 승부를 걸었다.
1라운드에서는 잔디의 날카로운 발에 옆구리를 허용하며 고전했다. 하지만 배준서는 쉴 새 없이 거리를 좁히고 몸싸움을 걸며 상대의 체력을 갉아냈다. 2라운드부터 잔디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고, 끝까지 압박을 멈추지 않은 배준서가 결국 3라운드에서 승부를 뒤집었다.
“잔디의 발은 듣던 대로 정말 날카로웠습니다. 떨어진 거리에서는 발의 힘도 강해서 그 앞발을 끊어낼 수 있을지가 가장 걱정됐어요. 그런데 막상 부딪혀보니 예상보다는 할 만했습니다. 2라운드부터 잔디가 지쳐가는 게 보였고, 끝까지 체력을 갉아내며 몰아붙인 것이 통했습니다.”
후배들의 조언도 도움이 됐다. 경기 전날 박태준의 방을 찾아 잔디에 관한 정보를 들었다. 코트에서는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벌이지만, 국제무대에서는 함께 한국 경량급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선후배였다.
“태준이가 잔디에 관한 여러 가지 ‘꿀팁’을 줬어요. 우리나라 선수들이 저와 경쟁자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후배잖아요. 잔디가 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기지 못할 상대는 아닙니다. 우리 선수들이 충분히 이길 수 있어요.”
경기가 끝난 뒤에는 잔디가 대기실을 찾아와 “다음에 다시 한번 붙자”고 했다. 배준서는 웃으며 “싫다”고 답했다.
“솔직히 다음에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요. 그만큼 강한 선수니까요.”
이번 우승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배준서가 최근 적지 않은 부침을 겪었기 때문이다.
2016 버나비 세계청소년선수권을 시작으로 2019 맨체스터 세계선수권 -54㎏급 우승, 2022 과달라하라 세계선수권 동메달, 2023 바쿠 세계선수권 -58㎏급 우승까지 오랫동안 한국 남자 경량급을 대표했다.

그러나 네 번째 세계선수권 출전이었던 2025 우시 대회에서는 예선 탈락의 쓴맛을 봤다. 올해 울란바토르 아시아선수권과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대표 선발전에서도 연이어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2000년생인 배준서의 뒤에서는 박태준과 서은수, 안향식, 양희찬 등 어린 후배들이 빠르게 치고 올라왔다. 일각에서는 이제 ‘배준서의 시대가 끝난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배준서는 흔들리지 않았다.
“선발전에서 패했지만 마음까지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생각은 조금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장기적인 목표를 먼저 이야기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제가 조금 겸손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목표를 향한 간절함은 그대로지만 먼 미래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기로 했다. 당장 눈앞에 놓인 전국체전과 그랑프리 파이널 출전 준비에 집중할 생각이다.
“올림픽에 출전했던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운과 시기가 맞아야 하는 것 같아요. 간절함은 늘 있지만 이제는 그 욕심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않고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준서는 올림픽랭킹만으로는 이번 무주 그랑프리 출전권을 얻을 수 없었다. 지난해 같은 장소에서 열린 그랑프리 챌린지 우승으로 확보한 출전권이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줬다.
쉽게 얻은 기회가 아니었기에 준비는 더욱 철저했다. 좋은 몸 상태와 자신감을 안고 코트에 올라 세계 최강자와 올림픽 챔피언, 세계선수권 챔피언을 모두 넘어섰다.
세계선수권을 두 차례 제패하고도 다시 언더독으로 평가받는 현실. 역설적으로 그 위치가 배준서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우시 세계선수권 이후 올해 초까지 계속 기대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으니 주변에서 의심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강화도에서 해오던 운동을 지금도 계속하는 것뿐입니다.”
‘코리안 좀비’는 자신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계속하다 보면 결국 저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무주 그랑프리 우승도 그 증명의 한 부분입니다. 다만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지금처럼 꾸준히 훈련해서 앞으로 더 큰 증명을 해내고 싶습니다.”
국내 경쟁이 가장 치열한 남자 -58㎏급. 모두가 후배들의 시대를 이야기할 때, 대표팀 맏형 배준서는 세계 정상급 경쟁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다시 가장 높은 곳에 섰다.
끝났다는 평가를 받을수록 강해지는 선수. 배준서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카스미디어 = 무주 태권도원 - 한혜진 기자 ㅣ haeny@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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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 |
| 태권도 경기인 출신의 태권도·무예 전문기자. 이집트 KOICA 국제협력요원으로 태권도 보급에 앞장 섰으며, 20여 년간 65개국 300개 도시 이상을 누비며 현장 중심의 심층 취재를 이어왔다. 다큐멘터리 기획·제작, 대회 중계방송 캐스터, 팟캐스트 진행 등 태권도 콘텐츠를 다각화해 온 전문가로, 현재 무카스미디어 운영과 콘텐츠 제작 및 홍보 마케팅을 하는 (주)무카스플레이온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국기원 선출직 이사(언론분야)와 대학 겸임교수로도 활동하며 태권도 산업과 문화 발전에 힘쓰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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