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복 하나 메고 이탈리아로 간 청년… 60년 뒤 이탈리아 태권도의 역사가 되다!

  

〈한혜진의 人사이드〉 EP.3 특별편 - 이탈리아 전역에 단단한 태권도 뿌리로 개척한 고 박영길 대사범

고 박영길 대사범의 묘비에 WT 조정원 총재가 손을 건네고 있다. [사진 = 코리아타임즈 최원석 기자] 

2024년 12월 7일(현지시각) 오후 7시 20분. 이탈리아 태권도 대부 박영길 대사범이 로마의 한 병원에서 급성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

 

고인은 별세 직전까지 이탈리아 북부 트리에스테에서 태권도 세미나를 이끌고 있었다. 피로가 누적돼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지만 멈추지 않았다.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그는 도복을 입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6개월 뒤, 로마 외곽에 자리한 박영길 대사범의 납골묘지를 세계태권도연맹(WT) 집행부가 찾았다.

 

계기는 로마에서 열린 WT 월드태권도 그랑프리였다. 대회 일정 속 WT 집행부가 태권도 세계화에 크게 기여한 박영길 대사범을 추모하기 위해 것. 

 

박영길 대사범은 이탈리아태권도협회 회장이나 주요 임원은 물론 WT 임원을 지낸 적이 없다. 평생 현장에서 제자를 가르친 사범이었다. 그럼에도 WT 최고 집행부가 공식 일정 중 그의 묘소를 찾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직함이 아닌 헌신이 남긴 무게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WT 조정원 총재를 비롯해 양진방 부총재, 서정강 사무총장, 드리스 엘힐리 부총재(모로코), 제이 워릭 집행위원(미국), 아흐메드 알제유디 집행위원(UAE), 윤웅석 국기원장, 그리고 생전 고인과 이태리 전역에 함께 시범투어에 함께한 WT 태권도시범단 나일한 단장과 단원들이 헌화하고 묵념했다. 부인 박창성 여사와 아들 박이태 씨 가족 등 유가족도 자리를 함께했다.

WT 조정원 총재를 비롯한 집행부가 6일 오전 고 박영길 대사범의 묘비를 찾아 추모를 하고 있다.

고인의 '묘비'에는  단 한 줄이 새겨져 있었다. 60년 전, 도복 하나를 들고 이탈리아 땅을 밟은 스물다섯 청년 사범에게, 이탈리아가 붙인 이름이었다.

 

1967년, 가라테의 땅에서 태권도를 심다

 

박영길 대사범이 이탈리아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67년 2월 이었다. 1년 전 먼저 이탈리아에 건너가 첫 태권도장을 연 형 박선재 사범의 권유가 계기였다.

 

당시 박선재 사범(전 WT 부총재, 이탈리아태권도연맹 회장)은 동생 박영길에게 "함께 태권도를 보급하자"며 이탈리아행을 제안했고, 그는 주저 없이 낯선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유럽은 물론 이탈리아는 가라테가 이미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태권도는 이름조차 생소한 무술이었다. 그러나 박영길 대사범은 그해 10월 로마에 도장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남부 나폴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태권도 기술과 정신을 전파했다.

 

이탈리아태권도협회(FITA)는 추모 성명을 통해 "박영길 대사범은 단순한 스승을 넘어 진정한 멘토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라며 "그의 비전은 태권도의 기술적인 측면을 넘어섰다. 그에게 태권도는 교육 도구이자 젊은 세대에게 존중, 연대, 규율의 가치를 심어주는 수단이었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그는 도시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외딴 지역까지 직접 찾아다니며 태권도를 가르쳤다. FITA는 "그는 가장 먼 지역까지 찾아가 희망을 전하고, 태권도를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박영길 대사범은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 협회장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음에도 57년간 현장에서 태권도 지도자 외길을 걸었다.

제3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대표자 회의에 참석한 젊은 시절의 박영길 사범이 대표자 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1973년 WT 창설 초기부터 활동하며 태권도 국제화 과정에 깊이 참여했다.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창설과 유럽 태권도 조직화, 올림픽 정식종목 진입 과정에서 유럽 저변 확대에 헌신했다.

 

2006년에는 WT가 새롭게 창설한 '제1회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부터 경기위원장을 맡아 품새를 세계적인 경기 종목으로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2017년 그리스에서 창설한 ‘제1회 세계비치태권도선수권대회’가 기술대표(TD)를 맡아 체계를 구축했다.

 

조정원 WT 총재는 고인이 별세 직전 출판한 자서전 <태권도, 사명이 끝날 때까지> 추천사에서 "이탈리아가 서울올림픽 시범종목을 시작으로 2012 런던 올림픽과 2020 도쿄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박영길 사범이 기반을 잘 다져놓은 덕이다"라고 공을 세웠다.

 

이어 "특히 WT 시범단과 이탈리아태권도협회가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앞에 역사적인 첫 태권도 시범을 선보이고 교황께 명예단증을 수여할 수 있었던 것은 박영길 사범이 두 조직 간 가교 역할을 충실하게 해온 결과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생애 마지막까지, 현장에서 태권도 보급에 힘썼던 '그랜드 마스터'

2022년 박영길 대사범이 현지에서 직접 이끈 이탈리아 순회시범공연에 WT태권도시범단이 4만 명이 운집한 밀라노 대표 명소 두오모 광장에서 시범을 보이고있다.

지난 2016년부터는 'WT 태권도시범단'과 함께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 꼬모호수, 알베로벨로, 몬테 디 프로치다, 오로세이, 알게로 등 이탈리아 전역 태권도시범 순회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수만 명이 운집한 두오모 광장은 물론 연중 이탈리아 내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새해맞이 축제와 지방정부 문화행사 무대에서도 태권도를 소개하며 대중 속으로 태권도를 끌어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짐을 싸서 세미나장으로 향하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겨루기 중심으로 발전한 이탈리아 태권도계에 시범 문화를 심기 위해 이탈리아태권도시범단 차오팀(CIAO) 창단을 주도한 것도 그였다. 이 시범단은 파리 올림픽 연계 공연, 이탈리아 갓 탤런트 본선 무대에까지 이름을 올리며 태권도의 예술성을 알렸다.

 

2024년 9월에는 자신의 태권도 삶을 기록한 자서전〈태권도, 사명이 끝날 때까지, 상아기획〉를 펴냈다. 출간 두 달 뒤, 그는 세상을 떠났다.

 

생전 고인과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양진방 WT 부총재는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팔순의 나이에 타지 세미나를 하실 만큼 열정이 대단한 분이셨다. 진정한 태권도 그랜드마스터이시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분이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7일 이탈리아태권도연맹이 태권도 보급 60주년이라는 특별한 갈라 행사를 앞두고 있다. 사실상 이 행사는 태권도 사범 박영길의 이탈리아 태권도 보급의 역사 60주년 기념식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만큼 이탈리아 태권도에서 박영길 사범을 빼놓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10만 제자, 그리고 안젤로 치토

 

시칠리아에서 토리노까지. 그가 평생 길러낸 제자는 10만 명이 넘는다. 모든 태권도장이 그에게 배운 제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수백 개의 도장이 그의 손길을 거쳤고, 수많은 선수와 지도자들이 그의 제자로 여전히 성장 중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현재 이탈리아태권도협회(FITA) 안젤로 치토 회장(WT 집행위원)이다. 남부 브린디시주의 한 지방 도시에서 태권도를 시작한 어린 치토는 순회 지도를 온 박영길 대사범과 처음 만났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피렌체에서 학업과 태권도를 병행하겠다고 하자 박 대사범은 "태권도를 제대로 하려면 로마로 와라"고 조언했다.

박영길 사범의 제자 안젤로 치토가 2016년 이탈리아태권도협회(FITA) 회장에 선출된 후 첫 공식 조치로 스승 박영길 대사범을 이탈리아태권도연맹 종신 명예회장으로 임명했다. (사진=FITA)

그 한마디는 치토의 인생을 바꿨다. 치토는 로마로 상경했다. 그 인연으로 박영길 사범의 도장에서 교범과 사범을 한 뒤, 박영길 사범 추천으로 협회 직원으로 채용돼 훗날 사무총장, 부회장을 거쳐 2016년 회장에 선출된 후 연임을 이어가고 있다. 

 

FITA는 공식 추모문에서 안젤로 치토 회장과 국가대표팀 기술감독 클라우디오 놀라노를 비롯한 이탈리아 태권도계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박영길 대사범의 가르침 속에서 성장했다고 밝혔다. 또한 "수많은 제자들이 태권도를 통해 삶의 방향을 찾았고, 최고 수준의 국제무대에서 이탈리아를 대표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취임 직후 그가 처음 한 공식 조치로 협회 역사상 최초로 명예회장직을 신설해 스승을 추대하는 것이었다. 

 

FITA 안젤로 치토 회장은 "박영길 대사범은 우리에게 태권도라는 소중한 선물을 남겼다. 그의 가르침과 열정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하늘에서도 그의 사명은 계속될 것이다."고 추모사를 밝혔다. 

 

묘소 앞에서

조정원 총재가 추모 후 참석한 WT 집행부와 시범단원에게 고인의 생전 공헌에 대해 설명 중이다.

조정원 WT 총재는 묘소 앞에서 고인을 추모하며 "태권도 세계화와 이탈리아 태권도를 개척한 너무도 귀중한 분이 갑작스럽게 2024년 12월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해 파리 올림픽 때 뵈고 곧 만나자고 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웠다"라면서 "지금도 생전에 보여주셨던 태권도에 대한 열정과 희생, 봉사, 그리고 겸손함이 잊혀지지 않는다. 태권도 사범으로서 갖춰야할 덕목을 모두 갖춘 표본이 된 분이셨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이어 "올해는 이탈리아태권도연맹이 태권도 보급 60주년이라는 뜻깊은 해로 행사를 준비 중이다. 박영길 사범께서 이탈리아에 온지 언 6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분께서 이 특별한 순간을 함께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지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태권도로 한국과 이탈리아를 잇고, 유럽과 세계를 이었다. 도복 하나를 메고 이탈리아로 향한 청년 사범의 꿈은 60년 뒤 유럽 태권도의 역사로 남았다. 그리고 오늘날 이탈리아에 태권도장이 첫 개관한지 60년의 역사 속에는 여전히 박영길이라는 이름이 가장 깊이 새겨져 있다.

 

 

 

기자 한혜진의 시선

젊은 시절 이탈리아에 태극기를 걸고 태권도를 지도하고 있다.

태권도 형성기부터 중흥기, 그리고 현대까지. 박영길 대사범은 그 긴 태권도 역사의 중심에서 단 한 번도 현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형 박선재 회장이 행정가로 이태리 태권도의 하늘을 넓혔다면, 박영길 대사범은 그 땅을 비옥하게 일구었다.

 

그는 평생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늘 제자들 곁에 있었다. 솔선수범과 겸손은 그의 삶 자체였다.

 

그래서 오늘날 이탈리아 태권도 60년의 역사에는 수많은 세계적인 태권도 간판 선수 배출과 지도자가 존재하지만, 그 시작점에는 여전히 박영길이라는 이름이 서 있다.

 

이탈리아 언론은 박영길 대사범을 두고 "태권도를 이탈리아에 심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오늘날 이탈리아 태권도 60년의 역사와 유럽 태권도 발전 과정 곳곳에는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화려한 직함보다 현장을 택한 사람.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았고, 팔순이 넘어서도 짐을 싸서 세미나장으로 향하는 것이 그에게는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것이 그를 진정한 그랜드마스터로 만든 이유였다.

 

도복 하나를 메고 이탈리아로 향한 스물다섯 청년의 꿈은 60년 뒤 유럽 태권도의 역사로 남았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심은 태권도의 씨앗은 오늘도 유럽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GRAN MAESTRO PARK YOUNG GHI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영길 사범이 생전 전국을 순회하면서 태권도 지도를 하고 있는 모습
태권도 세계화 형성기 이탈리아를 대표해 참석한 모습
88 서울올림픽 태권도 시범종목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코치로 참석한 모습
88 서울 올림픽 대표자회의
고 박영길 사범 묘비
조정원 총재가 고 박영길 사범의 아들 박이태 사범을 격려하고 있다. [사진=코리아타임즈 최원석 기자]

 

[무카스미디어 = 이탈리아 로마 - 한혜진 기자 ㅣ haeny@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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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혜진
태권도 경기인 출신의 태권도·무예 전문기자. 이집트 KOICA 국제협력요원으로 태권도 보급에 앞장 섰으며, 20여 년간 65개국 300개 도시 이상을 누비며 현장 중심의 심층 취재를 이어왔다. 다큐멘터리 기획·제작, 대회 중계방송 캐스터, 팟캐스트 진행 등 태권도 콘텐츠를 다각화해 온 전문가로, 현재 무카스미디어 운영과 콘텐츠 제작 및 홍보 마케팅을 하는 (주)무카스플레이온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국기원 선출직 이사(언론분야)와 대학 겸임교수로도 활동하며 태권도 산업과 문화 발전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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