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카스 발언대] 국기원 1품 심사 기준 완화, 태극5장 이후로 축소가 해결책인가?

  

국기원 1품 심사기준 완화, 품새 축소만 해결책? 심사 기준 축소, 법적 근거도 과학적 근거도 없다

 

임미화 관장

최근 태권도계 일각에서 아동들의 1품 심사 부담을 줄여주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태극 1장부터 8장까지 모두 가르치고 평가하는 것이 지도자도 힘들고 아이들도 힘들어하니 시도협회에 권한을 주어 심사 범위를 1~4장으로 축소하거나 무작위가 아닌 2개 품새만 사전 공지하자는 식의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것이다.

 

일선 도장에서 유·초등부를 지도하며 겪는 현장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학령 인구는 줄고, 타 종목과의 경쟁은 치열해지며, 아이들의 인내심은 과거와 같지 않다. 그러나 '힘들다'는 이유로 평가의 기준을 낮추고 국기원의 고유 권한인 심사 표준을 지역별로 타협하려는 시도는 당장의 진통제를 맞기 위해 태권도의 미래라는 생명줄을 끊어내는 '제살 깎아먹기'에 불과하다.

 

먼저 이 논의의 법적 근거부터 짚어야 한다. 국기원 태권도심사규정 제16조는 "국기원은 심사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현재 1~4품 심사는 국기원이 대한태권도협회와 위임계약을 맺고, 대한태권도협회가 다시 각 시도협회와 재위임계약을 맺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심사를 '시행'하는 권한의 위임일 뿐이다.

 

동 규정 제17조는 심사 기준을 변경하려면 반드시 국기원의 사전 승인이 필요함을 못 박고 있다. 즉, 시도협회가 국기원의 승인 없이 심사 범위를 임의로 축소하는 것은 이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이 논의는 법적 근거조차 없는 '월권행위'일 수 있다.

 

AI가 모든 것을 대체하는 시대에 학부모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태권도장을 찾는 이유는 단지 땀을 흘리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태권도 수련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통해 아이의 '내면 근육'과 '두뇌'가 함께 성장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1품 심사 축소 주장은 뇌과학과 아동 발달 심리학의 세계적 흐름을 완벽하게 역행하고 있다.

 

태극 1장부터 8장까지의 수련은 단순히 동작을 암기하는 육체노동이 아니다. 최근 뇌과학과 인지심리학 연구들은 '몸을 움직이며 동시에 머리를 쓰는 훈련'이 아이의 두뇌 발달에 매우 효과적임을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품새 수련은 바로 이 조건을 가장 잘 갖춘 운동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태극 품새는 몸의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사용하는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양측성 운동(Bilateral Movement)은 뇌의 좌우 반구를 연결하는 통로인 뇌량(Corpus Callosum)을 자극하여 뇌 전체가 균형 있게 발달하도록 돕는다. 또한 수십 개의 동작을 순서대로 기억하고 정확히 재현하는 과정은 작업 기억(Working Memory, 정보를 머릿속에 잠시 담아두고 활용하는 능력)을 반복적으로 단련시킨다.

 

이는 학교 수업에서 선생님 말씀을 기억하며 받아 적는 능력, 수학 문제를 풀 때 앞 단계를 기억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능력과 직결된다. 이처럼 품새 수련이 아이들의 뇌 발달, 특히 판단력과 집중력을 담당하는 전두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연구들이 꾸준히 축적되고 있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복잡해지는 태극 품새의 구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몸과 뇌가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설계된 '발달의 사다리'다. 이 사다리를 4장에서 잘라버리자는 주장은 아이들이 가장 성장할 수 있는 구간을 어른들의 행정 편의를 위해 제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치가 하락한 자격은 시장에서 버림받는다. "태권도 1품은 대충 해도 딸 수 있다"는 인식이 학부모들 사이에 자리 잡는 순간, 태권도장은 다른 수많은 스포츠 학원과의 경쟁력을 영영 상실하게 될 것이다. 태권도의 진정한 경쟁력은 '쉬운 성취'가 아니라, 어렵고 힘든 과정을 이겨냈을 때 아이 스스로 느끼는 '해냈다'는 성취감, 즉 극기(克己)의 경험에 있다.

 

이 위기 앞에서 세계태권도의 중앙도장인 국기원의 역할은 자명하다. 현장의 민원에 밀려 시도협회의 축소심사 형태를 묵인하며 기준을 훼손하는 '쉬운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기회를 통해 만 12세 미만 아동의 발달 특성을 과학적으로 반영한 '아동기 특화 표준 수련 및 심사 체계'를 국기원이 직접 연구하고 선언해야 한다.

 

왜 하필 만 12세 미만인가? 발달심리학의 토대를 세운 피아제(Piaget)의 인지발달 이론에 따르면, 이 시기의 아동은 신체적 움직임과 직접적 경험을 통해 뇌가 폭발적으로 발달하는 '구체적 조작기(Concrete Operational Stage)'에 해당한다.

 

추상적 사고가 가능한 12세 이상의 청소년 및 성인과는 인지 발달의 구조 자체가 다르다. 이들에게 성인과 똑같은 잣대, 즉 품새의 완벽한 재현만을 평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학술적으로도 이미 오류다. 국기원이 해야 할 일은 기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이 시기 아동의 특성에 맞는 올바른 평가 기준을 새로 세우는 것이다.

 

국기원은 꼼수와 타협하는 곳이 아니라, 전 세계 태권도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표준(Standard)'과 '철학'을 세우는 곳이어야 한다. 현장이 힘들다고 교과서를 찢어버릴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더 훌륭한 교과서를 현장에 쥐어주는 것이 국기원이 해야 할 진정한 도장지원사업이다.

 

태권도가 다른 스포츠, 다른 활동과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 있다. 흰 띠에서 시작해 품새 하나하나를 익히고 심사를 통과하며 띠의 색깔이 바뀌는 과정은, 단순히 기술의 단계만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각 품새의 동작 원리를 이해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은 '나는 해냈다'는 자기효능감(Self-efficacy)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을 키운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경험만큼은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다.

 

현재 국기원 심사는 품새·겨루기 등 기술 중심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진정한 무도(武道)의 가치는 기술 너머에 있다. 인지적 유연성(규칙이 바뀌어도 즉각 적응하는 능력), 자기 조절(타격 직전 스스로 힘을 제어하는 능력), 회복 탄력성(실패 후 감정을 추스르고 재도전하는 용기) 이것이 바로 태권도 수련이 키워야 할 아이들의 진짜 역량이다.

 

국기원이 해야 할 일은 기준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발달 특성에 맞는 새로운 평가 기준을 과학적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어른들의 타협으로 아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이 성장의 기회를 빼앗지 말자.

 

※ 이 글은 외부 필자의 의견으로 무카스미디어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필자는 국기원 전 이사를 역임하고, 현재 국기원 도장지원사업 TF 위원, 경희대학교 체육대학원 태권도학 박사수료, 나라차태권도 분당도장 관장을 역임하고 있다. 

 

[글 = 임미화 관장 - 나라차태권도 ㅣ press@mook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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