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역사 "노병직과 쇼토칸과의 관계"그리고 송무관 창설자 노병직(1편)


  

역사속의 태권도근현대사 14편

역사를 바라볼 때 한가지 사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의 평화로운 공존이 있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이 컬럼 역사속의 태권도역사”는 펙트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참고문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 태권도역사를 격동의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현재 태권도가 가고자 하는 올바른 길을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간혹 이 컬럼이 다른 이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음은 인정하며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도 나오길 기대한다. [필자 주] 

 

송무관(松武館) 창설자 노병직의 유년시절 역사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당시의 시대속으로 들어보자!

 

송무관 창설자인 노병직의 유년시절과 동경휴학시절이었던 1919~1944년 우리나라의 역사속으로 들어가보자!

 

일본이 1910년 현직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조선의 3대 통감에 임명하고 조선의 내각총리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들은 한일병합늑약에 조인하며 우리는 치욕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 늑약은 불법적인 국제병합으로 당시 황제인 순종은 붕어직전 지난날 병합 인준은 일본이 역신의 무리와 더불어 제멋대로 선포한 것이다. 라고 유언에서 적시되어 있다.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2016)

 

한일병합늑약을 불법으로 성사시킨 일본이 제일 먼저 추진한 사업이 토지조사사업과 철도건설이다. 전쟁의 군수품을 일본본토가 아닌 조선에서 조달하기 위한 수탈이 시작된 것이다.

 

스무술 일본 유학시절 까까머리의 노병직 원로가
가라테 도복을 입고 기백있게 서 있다.

토지수탈은 실로 엄청났다. 우리 농민들의 토지를 불법과 반강제로 빼앗아 그것을 다시 조선으로 이민온 일본인에게 헐값에 팔고 실제 땅주인인 농민들이 다시 그밑으로 들어가 농사를 짖는 고통스런 삶이었다. 러시아는 1917년 3월과 10월에 일어난 두개의 러시아혁명으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체제를 국가모델로 현실화시켰다.

그동안 군림하던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정통파 사회민주노동당)에 의한 소비에트정부가 성립한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혁명을 말한다.(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2019, 러시하혁명에 관한 통일대비 역사교과서 모형제시 배선주 2020) 이 혁명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운동의 촉진제가 된다.

 

고종황제가 사망했던 1919년 노병직은 태어났다.


당시 언론, 교육,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등이 모인 33인의 민족대표와 학생대표가 3월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모의했는데 하루 전날 많은 시민이 모이면 군중심리로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로 약속을 어기고 1919년 3월 1일 인사동 요리집 태화관에 모여 단독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조선총독부 총무경감에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했다고 하며 스스로 투항해 버렸다.(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2019) 

 

우리 조선의 학생들은 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탑골공원 육각정에서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뛰쳐 나가 조선은 독립국임을 선언했고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 만세의 함성은 서울과 주요 중소 도시로 번져갔다.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 2019)당시 재판과정에서 민족대표들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한 것은 당연한 결과이고 조선은 스스로 발전할 수 없고 복지국가가 불가능할 상태로 한일병합을 원하지는 않지만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라고 일제의 조선침략논리에 젖어있기도 했다.

독립선언서 독립기념관(국가지정기록물 제12호)

일본은 한마디로 전쟁에 미쳐가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이 당시 중국은 중화민국이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이 빨리 끝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에상이 빗나갔다.

 

중국 국민당 정부 장계석은 “백년항쟁” 선언하고 장기전으로 중일전쟁이 전개된다. 전쟁도 전쟁이지만 국내사정도 좋지 않았다. 장제스(장계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마우쩌뚱(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내전을 가르켜 1차 국공내전이라고 한다. 서로 동족간의 내전을 벌이던 시기에 내전을 중단하고 국,공합작으로 일본에 대항한다.

 

일본군이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지역을 ‘만주국’이라 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만주사변을 일으킨다.

 

이후 제국주의의 야욕을 마침내 들어내고 중국의 내륙을 공격할 명분을 찾다 베이징 외각의 작은 돌다리 로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본군사병이 사라진 것을 빌미삼아 전쟁선포도 하지 않고 중국을 공격했다.

 

청.일전쟁과 마찬가지로 중,일전쟁 또한 중국은 힘없이 무너졌다. 순식간에 베이징을 점령하고 다시 상하이로 전쟁을 확대하고 당시 중국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다.


우리나라는 민족말살정책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1938년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어가 선택과목으로 바뀌고 조선어를 가르치면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초등학교의 이름이 천황의 국민이라 하여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1937년 12월~1938년 2월까지 난징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중국국민이 정확한 수치는 알수 없지만 무려 20~30만명이 도륙당하고 방화, 강간등을 자행했고 수많은 전쟁피해자들이 발생했다고 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2차세계대전이 본격화되고 전선이 동아시아지역에서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일본의 전선이 2~3개로 나누어져 일본이 일으킨 전쟁이 장기화 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전쟁 물자와, 군수품, 인적자원들을 동원해야 했다.

 

이에 1938년 4월1일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한다. 이는 우리나라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 대만, 필리핀, 사할린등 전지역의 식민지에 국가총동원법이 발동된다.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하에서 전시상태가 되었고 모든 일본의 정책은 전쟁과 만물려 강제진용, 학도지원병제도도 시행되었다.

 

남성들은 전쟁터나 노동노예로 가혹한 삶을 살았고 여성들은 성노예로 일본과 동아시아 일대 군위안소의 위안부로 끌려갔다. 한국여성은 일본으로 가면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거짓광고와 납치, 인신매등으로 끌려가 성노예로 삶을 강요받으며 심지어 이름대신 번호를 부여받아 감시당했고 폭행이나 살해되는 등 비인간적이고 작악한 행위를 일삼았고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여성을 증거 인멸을 위해 살해했다.

 

이런 시기에 태어난 조선의 최고 무도인 노병직!

 

1966년 1월30일 대한대권도협회 제4대 회장, 2014년 태권도진흥재단 명예의 전당사업 “태권도를 빛낸 사람들” 최종 10인 인 교육자 및 지도자 부분 노병직!(1919~2015) 그는 태권도실력이나 교육면에서 손색이 없었던 송무관의 창설자이다. (박규태 2109, 대한태권도협회50년사 2014)

 

노병직은 1919년 7월 3일 황해북도 개성시 자남동 547번지에서 노원식(부), 임순만(모) 슬하의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났고 어린시절 허약한 체질로 이를 극복해보려고 아버지로부터 한국의 전통 무예인 수박희를 수련한다.

국민훈장 모란장 사상장면(kbs)

노병직은 1년이 늦은 9살에 개성의 만월보통학교에 입학했지만 몸이 허약해 결국 3학년이 되던 해에 그는 장기 결석으로 휴학했다고 언급되어 있다.(박규태 2019)아버지인 노원식은 뒤후려차기를 매일 연습시키며 이를 수박희 또는 수박치기로 말했고 점점 수박희에 흥미를 붙이게 되었다.(노병직 1999, 박규태 2019)

 

그가 1919년생이고 늦은 7살에 입교후 그후로부터 3학년이면 1928~1930년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때부터 아버지(노원식)이 건강을 이유로 노병직에게 전통무술 권유해서 아버지에게 직접 수련을 받았고 12세가 되던해 최절정이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12세면 만월보통학교(초등학교) 2학년정도 되는 1930년쯤 되고 전통무술 수련을 멈춘 시기는 1930년 초,중반에 부모님 두분이 돌아가시면서 슬픔과 고통속에서 지냈고 특히 당시 장자가 집안을 계승하는 유교관습에 따라 유산이 장남에게 돌아갔고 노병직은 무일푼로 학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니 무예수련도 이때 중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전통무예를 수련한 기간은 그가 다시 재입교한 약 1년정도 밖에 되지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1년간의 짧은 수박희 수련임에도 불구하고 노병직의 무예수련은 매우 뛰어 났음을 암시한다. 고통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 동경유학을 선택했고 일본에 밀항하다시피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1936년 3월14일 도착해 예비학교를 6개월 다니고 대성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그는 일본대학 법학과에 입학하고 그해 겨울 공수도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후나고시 기친의 쇼토칸(松道館)을 입관하면서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다음 편에서 계속)

1. 노병직은 몇단.....?

2. 송무관 탄생의 비화........?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글 엄재영 사범 = 대망태권도장 관장 & 북경체대 교수 ㅣ kaikans@hanmail.net]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엄재영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끼고 느끼는 만큼 가르친다.

대한민국 체육훈장 기린장 수훈
현)대망태권도관장
현)북경체육대학교 교수
현)2020년 대한민국 품새 국가대표
현)국기원 강사 / KTA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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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권인

    노병직 선생님이 공수도인인지 태권도인인지 그에 대한 태권도사적 평가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분은 개성에서 송무관을 창설하셨고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역임하셨던 주요 인물입니다.
    그 분의 공적과는 별개로 광복 이전 공수도 경력을 를 공재적으로 표방하고
    국내 최초의 공수도 도장을 열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태권도인들은 그 분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2021-01-06 09:32:44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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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억하고 기록하다

    일제,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네 눈에선 피눈물이…

    반만년이면 긴 세월이다. 반만년 빛나는 역사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륙의 끝자락에 붙어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고 하면 지나친 자기비하인가.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래도 6·25라는 미증유(未曾有)의 시련을 겪고도 세계가 부러워하는 번영을 이룬 것에 대견하고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내 나이쯤 되는 사람은 피난 보따리 등에 지고 포성이 울리는 피난길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배는 고파 쪼르륵 소리가 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먹는 것으로 보였다.

    요즘 밥투정, 반찬투정하는 애들을 보면 이만큼 살게 된 조국 대한민국이 고맙다. 우리 국민은 외국에 나가서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산다. 전에는 쪼그리고 살았다.

    우리는 이제 경제대국이다. 그러자 일본이란 이웃이 심술을 부린다. 사촌이 땅을 사서인가. 겁이 나서인가.

    ■이웃사촌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웃도 이웃 나름이다. 내 기억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이웃이 있다. 돈푼깨나 있어서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에도 자가용 굴리고 애들도 좋은 옷 입고 목에 힘주고 다녔다. 동네서 웬만한 애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다.

    잘 살면 어려운 이웃도 배려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좋은가. ‘적선지가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 하지 않던가. 결국, 그 집은 사업이 잘못돼서 폭삭 망했다. 빚쟁이가 모여들고 차압당해 빈손으로 쫓겨나는데 보기에 참 그랬다. 평소에 이웃에게 잘했으면 따뜻한 위로라도 받지 않았을까.

    요즘 나라가 시끄럽다. 이웃 나라인 일본 때문이다. 아니 ‘아베’라는 인물 때문이다. 긴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흐르는 물도 발원은 찾으면 산속 옹달샘인 경우가 많다.

    작금의 발생한 일본의 경제침략을 보면 그 뿌리는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난한 섬나라 일본은 무척이나 우리를 괴롭혔다. 해안을 무단으로 침범해 약탈했다. 왜구라 했다.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도요토미 히데요시)은 간이 부었다. 그가 저지른 것이 바로 임진왜란. 끔찍한 재앙이었다.

    ■경제침략의 주범·전범, 아베 가문

    아베의 가문은 한마디로 ‘침략의 가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친손자가 현재의 일본 총리 ‘아베 신조(安倍晋三)’다. 또한, 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1879년 일본 이시카와현(石川縣)에서 태어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는 1944년 7월 24일 일본의 제9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시기 조선 총독을 지냈다.

    그는 1944년 마지막 조선 총독으로 취임하여 전쟁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인력과 물자를 일본으로 착취해 갔다. 조선 총독으로 부임 후 전쟁 수행을 위한 물적·인적 자원 수탈에 총력을 기울였다.

    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하면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때리기도 했다.

    이 자는, 일본이 항복하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한국을 떠나는데, 그때 남긴 가증스러운 말이 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일제강점기)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어떤가 소름이 끼치지 않는가. 또한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는 만주국을 건설하며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하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투쟁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무력화시켰다.

    그는 일본 괴뢰정부인 만주국에서 고위 관료로 일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에서 전쟁 물자를 관장하는 군수차관과 상공장관을 지냈다. 일본 패망 후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돼 수감되었으나, 냉전이 격화됐던 시기인 1948년 성탄전야에 공직 진출 제한을 조건으로 석방된다.

    1952년 공직 진출 제한이 풀리자 '자주헌법 제정' 등을 슬로건으로 내건 일본재건연맹을 설립해 정치를 재개했다. 일본 재무장 신호였다. 기시 노부스케는 1955년 11월 자유민주당을 창당해 초대 간사장이 됨으로써 이른바 자민당 55년 체제를 열었다.

    이후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 시절에 줄기차게 평화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군국주의 부활이다. ‘아베 신조’가 이번 선거로 노렸던 것은 선제공격이 가능하도록 평화헌법을 바꿀 수 있는 개헌의석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전쟁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통한의 실패를 했다. 아베는 단념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이번 경제침략이다.

    아베의 의식 속에 한국은 일본의 노예로 각인되어 있다. 노예가 상전과 동격이 되려고 한다는 생각이다. 견딜 수가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과의 동격은 안 된다. 그게 바로 아베가 일으킨 경제침략의 가장 확실한 동기다.

    ■온 국민이 하나로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됐다. 아베의 경제침략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한반도 지배야욕의 한 축이다. 일본은 화이트리스트 국가 중 한국을 꼭 집어서 배제했다. 한국의 목을 졸라서 죽이겠다는 결의다. 전쟁은 시작됐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비장한 결심으로 싸워야 한다.

    맹수가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 하물며 일본이란 거대한 적과 전쟁을 하는데 온 몸을 던져야 하지 않겠는가. 국회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술 취해 비틀거리며 횡설수설 예산을 심의할 수는 없다. 추경 통과에 100일이 걸려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온 국민이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한다.

    아베야. 너는 네 조상들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천인공노할 만행을 듣지도 못했느냐. 우리 속담에 ‘간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다’는 속담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단호하게 대응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잇따른 조치는 한·일 양국, 나아가 세계의 자유무역과 상호의존적 경제협력체제를 위협하고, 한미일 안보 공조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처사다.

    비록 예결위원장이 술에 취해 횡설수설했어도 추경은 통과됐다. 정부는 일본의 조치에 대응해 소재와 부품 기술개발과, 관련 기업 자급지원 등에 쓸 2,732억원의 예산을 신속하게 집행해야 할 것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도 당연히 파기해야 한다. 내 눈에 피눈물 나게 했는데 너는 웃게 해 주겠다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은 무엇인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의 발전이다. 한국이 발전하고 계속해서 세계의 지도적 국가로 성장하는 것은 아베에게 있어서 담마진(두드러기)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해해야 한다.

    더구나 남북한의 평화는 일본에 공포다. 고속으로 추월해 오는 한국의 발전이 너무 무섭다. 만약 남북한이 손을 잡으면 어찌 될 것인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아베에게 묻는다. 우리가 일본을 침략한 적이 있느냐.

    한국이 북한에 전략물자 최신 소재를 보낸다는 개가 웃을 소리로 아베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다. 한국이 일본에서 수입하는 소재를 일일이 일본 정부가 허가하겠다는 것이다. 목을 죄겠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 제외 국가로 묶어 놓은 일본의 폭거를 정상적인 머리라면 누가 인정하는가. 아베가 착각했다. 한국이 무릎을 꿇을 줄 알았는가. 아베는 지 할배가 총독으로 군림하던 때를 생각했는가.

    도대체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세상이 다 아는 일본의 억지를 쳐다만 보고 있을 것인가. 누가 편들어 달라더냐. 할 말을 똑바로 하라는 것이다. 미국이 방관해도 우리는 싸울 것이고 반드시 승리한다. 배 12척으로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을 우리 국민은 지금 가슴에서 불태우고 있다.

    다시 임진왜란이 떠오른다. 수백 명의 일본 낭인 패들이 궁궐을 넘어 일본도로 명성황후를 살해한 끔찍한 만행이 생각난다.

    우리는 철통같이 뭉쳤다. 일본의 경제침략 야욕은 노량 앞바다에 수장된 왜선의 비참한 몰골로 사라질 것이다. 아베는 사람으로 돌아오라. 그것만이 인간으로 대접받는 유일한 길임을 알아야 한다.

    2020-11-08 09:21: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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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의가문 망언역사

    아베의 가문은 한마디로 ‘침략의 가문’이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친손자가 현재의 일본 총리 ‘아베신조(安倍晋三)’다.징병·징용 및 근로보국대 기피자를 마구잡이로 색출했으며, 심지어는 ‘여자정신대 근무령’을 공포해 만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여성에게 정신근무령서(挺身勤務令書)를 발부했고, 이에 불응하면 국가 총동원법에 의해 징역형을 때리기도했다.이자는,일본이항복하자 총독부에서 마지막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한국을 떠나는데, 그때 남긴 가증스러운 말이 있다.“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한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일제강점기)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2020-11-07 22:10:15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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