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술 인물 탐구] 사이고 시로 ④편 : "제2의 고향, 나카사키(長崎)."


  

강도관을 떠나서 제2의 고향, 나가사키에 정착하다.

동양일출신문사 창립 당시 기념사진 (좌측 끝 2열에 사이고 시로가 있다.) [출처 : 동양일출신문사]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는 강도관(講道館)을 설립한 23세에 '가쿠슈인'(学習院) 교사로 부임하고, 메이지 19년(1886년) 6월, 27세에 교감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화족(華族) 가문 출신의 자제들 이외, 평민 자제들에게도 가쿠슈인의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가노 지고로의 진보적 교육방침은 메이지 21년(1888년) 11월에 취임한 초슈 번(長州藩) 출신의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楼)의 보수적 교육방침과 대립각을 세워 교감 직책에서 사퇴하게 되었다. 그 바람에 가노 지고로는 해외시찰을 목적으로 유럽에 파견된다.

 

가노 지고로가 부재중인 메이지 23년(1890년) 6월, 25세였던 사이고 시로는 8년간 몸을 담았던 강도관을 돌연 떠난다. 떠나면서 「지나도항의견서; 支那渡航意見書」라는 문서를 남겨두고 떠났는데, 일본측 자료에서는 러시아가 조선을 병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이 가득한 사이고 시로가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시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시대상과 일본의 제국주의적 행보와 당시 사이고 시로가 흑룡회(黑龍會)와 같은 국가주의 우익 조직 인사들과 교류가 있었던 것을 고려해보면, 과연 일본측 자료에서 주장하는 순수한 목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게 된다.

 

당시 일본에는 대륙 진출에 낭만을 느낀 젊은이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쑨원’(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을 도운 구마모토 현(熊本県) 아라오 시(荒尾市) 출신의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과 사이고 시로는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이고 시로는 강도관을 떠나, 중국으로 도항하기 위해 나가사키(長崎)로 이동했다. 이 시기에 옛 ‘아이즈 번사’(会津藩士)였던 ‘키타하라 마치나가’(北原雅長)가 초대 나가사키 시장으로 취임해있었다. 처음 나가사키에 도착한 사이고 시로가 어디에서 거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이지 24년(1891년) 12월에 그의 호적을 아오모리 현(青森県)에서 나가사키 시(長崎市) 히가시카미마치(東上町) 27번호로 옮겼다.

 

(* 히가시카미마치; 東上町 : 현재의 타마조노마치玉園町.)

 

에도 막부 말기, 세토 내해(瀬戸内海)에서 ‘카이엔타이’(海援隊)가 오즈 번(大洲藩)에서 대여한 ‘이로하 마루’(いろは丸)가 ‘키슈 번’(紀州藩)의 군함과 충돌하자 배상교섭을 진행한 쇼후쿠지(聖福寺)가 타마조노마치(玉園町)에 있다.

 

사이고 시로는 다이쇼 3년(1914년) 3월, 이마카고마치(今籠町)로 이전할 때까지 이곳 히가시카미 초 27번호에서 계속 거주했다. 56년의 생애 절반 이상을 나가사키에 거주하게 되면서 나가사키가 그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이고 시로가 나가사키와 깊게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메이지 35년(1902년) 1월 1일에 창간된 ‘동양일출신문’(東洋日の出新聞)의 편집자로 참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문 창간 이전에는 일본 열도와 중국대륙을 수차례 건너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고향 츠가와(津川)에 무도장 ‘강무관’(講武館)을 설립하고, 센다이(仙台) 제2 고등학교의 3대 유도 사범으로 부임하거나, 쿠루메 시(久留米市)의 난치쿠 사학교(南筑私学校)의 유도 사범으로서 큐슈 유도 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시아에 진출 야욕을 보이는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 가지고 조선, 중국,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내용일 뿐이다.

 

사이고 시로의 이러한 국제정세 관여도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로, 조선의 정치가 김옥균이 일본 망명 중에 나카사키를 방문했을 때 사이고 시로의 자택에서 은거했다는 사실이다.

 

김옥균은 1872년, 21세의 나이로 과거 문과에서 장원급제했던 수재였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조선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고, 그로 인해 급진적인 개혁운동을 펼쳤으며,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끊기 위해 노력했지만, 고종의 처가였던 민씨 세력과의 충돌로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일본의 군사력에 의지하여 메이지 17년(1884년) 12월에 6명의 대신을 살해하고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던 청나라 군대가 개입하여, 그보다 열세였던 일본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김옥균의 정권은 3일 만에 몰락했다. 김옥균은 ‘코코 타케조에’(竹添進一郎) 조선공사와 함께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망명했다.

 

김옥균은 메이지 15년(1882년) 3월부터 4월, 한 달간 나가사키에 머물며 임시 현의회(臨時県会)와 학교 시설 등을 시찰했고, 메이지 16년(1883년) 6월에도 나가사키를 다시 방문하여 나가사키 지역 인사들과의 교류가 있었고 후원자들도 있었다.

 

메이지 17년(1884년) 12월에 망명했을 때, 나가사키의 유지가 김옥균과 교류가 있었던 도쿄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저택으로 호위를 붙여서 보내줬다고 한다. 이후 10년간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지냈는데, 일본 정부의 지시에 의해 오가사와라(小笠原)와 훗카이도(北海道) 같은 오지로 유배되기도 했다.

 

항상 조선 정부가 파견한 자객들에게 목숨이 노려지다가 메이지 27년(1894년) 3월, 중국의 ‘이홍장’(李鴻章)과 의논을 나누기 위해 나가사키로 돌아왔고, 상하이로 건너간 직후 호텔에서 명성황후가 파견한 홍종우에 의해서 살해되었다.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했던 김옥균의 모습에 의협심 넘쳤던 사이고 시로 또한 이끌렸다고 일본 사학계에서는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평가와 판단은 계고가 필요해 보인다. 메이지 24년(1891년)부터 25년(1892년)까지 사이고 시로는 일본에서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과 박영효를 동양일출신문의 창간자이자, 동료였던 ‘스즈키 텐간’(鈴木天眼)과 함께 의논하여 나가사키 시내의 자택이나 교외의 은신처 등에 은거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사이고 시로는 이후에 나가사키를 방문했던 쑨원을 지원했다고도 한다. 스즈키 텐간과 함께 동양일출신문을 창간하여 편집자로 활동하고, 현재 ‘나가사키 수영 협회’(長崎游泳協会)의 전신이었던 ‘케이호 유영 협회’(瓊浦遊泳協会)를 설립하기도 했다.

 

나가사키 시내에 설립된 무도장에서 유도를 지도했고, 나가사키의 ‘마네키’(まねき)라는 요정(料亭) 집안의 외동딸이었던 ‘나카가와 치카’(中川チカ)와 결혼했다.

 


[무카스미디어 = 권석무 객원기자 ㅣ sukmoo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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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무 기자
무카스미디어 MMA, 주짓수, 무예 분야 전문기자.
브라질리언 주짓수, MMA, 극진공수도, 킥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무예 수련.
사람 몸을 공부하기 위해 물리치료학을 전공. 
무예 고문헌 수집 및 번역 복간본 작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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