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술 인물 탐구] 사이고 시로 ③편 : "아이즈 번 가로(家老)의 양자가 되다."


  

아이즈 번 가로,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의 양자로 입적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좌) 사이고 시로, (우)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 [출처 : Hairlebrity]

사이고 시로, 즉 당시 이름, ‘시다 시로’(志田四郎)는 메이지 17년(1884년), 19세 당시에 옛 아이즈 번의 가로(家老)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西郷頼母近悳)의 양자가 되었다.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는 당시에 ‘호시노 치카노리’(保科近悳)라고 자칭하고 다녔으므로, 당시에 시다 시로는 호시노 시로로 개명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사이고 타노모치카노리의 조상에 대해서 알아보자.

 

(*가로; 家老 : 에도시대 다이묘의 중신으로서, 다이묘 가문의 업무를 총괄했던 가신 중의 우두머리다.)

 

도쿠가와 막부의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4남이었던 ‘도쿠가와 마사유키’(徳川正之)는 정실의 소생이 아니라, 히데타다의 유모를 섬겼던 시녀 ‘시즈’(静)의 아이였다. 당시 통례는 정실의 체면과 쇼군의 첩들과 시녀들이 거처하는 ‘오오오쿠’(大奥)의 질서 유지를 이유로 서자의 출산을 에도성 외부에서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래서 시즈라는 시녀는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딸이었던 ‘켄쇼인’(見性院)에게 맡겨졌고, 그곳에서 도쿠가와 마사유키가 태어났다. 그리고 과거 다케다 가문의 가신, ‘신슈타카토 번주’(信州高遠藩主) ‘호시노 마사미츠’(保科正光)의 양자가 되어 ‘호시노 마사유키’(保科正之)가 된다. 그리고 마사유키는 아이즈 번의 23만 석에 이르는 초대 번주가 되었다.

 

(켄쇼인; 見性院 : ‘아나야마 우메유키 정실’(穴山梅雪正室)이다.)

 

그 신슈타카토 번주 가문 출신이었던 ‘호시나 마사치카’(保科正近)라는 인물은 아이즈 번의 가로(家老)가 된다. 마사치카의 장녀는 도쿠가와 가문을 대대로 섬겨온 ‘후다이’(譜代) 다이묘였던 ‘마츠다이라 야스나가’(松平康長)의 가신이었던 ‘사이고 신페이’(西郷新兵)에게 시집을 가서 ‘사이고 요시쥬로’(西郷吉十郎)를 낳았다. 이후에 사이고 요시쥬로는 ‘사이고 치카후사’(西郷近房)로 개명하지만, 그는 차남이었으며, 외조부였던 호시나 마사치카의 적장자, 즉 외숙부였던 ‘호시노 마사나가’(保科正長)가 병약했기 때문에 그의 양자로 입적하여 ‘호시노 치카후사’(保科近房)가 된다.

 

양부였던 호시노 마사나가가 사망하여 가로(家老) 직책이었던 호시노 가문을 치카후사가 물려받았는데, 호시노 마사나가의 첩이 아들 ‘호시노 마사오키’(保科正興)를 낳았다. 그리고 호시노 마사오키가 성장하여 그에게 가로 직책을 물려주고 치카후사는 다시 자신의 원래 성씨인 사이고(西郷)로 돌아왔다.

 

그런데 호시노 마사오키가 아이즈 번의 집안 문제에 휘말려들어 현재의 ‘아가 초’(阿賀町) ‘니쥬츠미즈사와 저수지’(日出谷水沢) 지역에 유배되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번주였던 호시노 마사유키는 호시노 마사오키의 후임 가로(家老)로 사이고 치카후사를 임명했다. 이로써 사이고 치카후사가 아이즈 번의 사이고 가문 초대 가로가 된 것이다.

 

또한 아이즈 번의 번조(藩祖), 호시노 마사유키는 자신의 이복형이자 3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에게 도쿠가와 가문의 옛 성씨인 ‘마츠다이라’(松平) 성씨를 부여받는데, 어린 시절 자신을 거두어준 호시노 가문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평생 호시노 성씨를 사용했다. 아이즈 번의 3대 번주 ‘마사카타’(正容)에 이르러서는 호시노에서 마츠다이라로 성씨를 변경하였다.

 

그런데 사이고 가문의 먼 조상은 큐슈(九州) 구마모토(熊本)의 ‘키쿠치’(菊池) 가문이라고 한다. 키쿠치 가문 일족이 아리아케 해(有明海)를 건너와 히젠쿠니(肥前国) 타카키군(高来郡) 사이고(西郷) 지역에 성을 세워 스스로를 사이고 가문이라고 불렀다. 더해서 ‘이사하야’(諫早)에 진출했지만, ‘류조지’(竜造寺) 가문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사이고 일족은 큐슈 일대로 흩어졌고, 사쓰마(薩摩)로 이동한 사이고 일족들 중에서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후손으로 태어났다. 또한 사이고 일족은 미카와(三河)에도 진출하였는데, 그 후손이 아이즈 사이고(会津西郷) 가문이다.

 

(사이고; 西郷 지역 : 현재의 운젠 시(雲仙市) 미즈호 초(瑞穂町) 사이고(西郷) 지역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실이었던 ‘사이고 우노츠보네’(西郷局)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낳았는데, 그녀는 미카와에 정착한 사이고 가문 출신이었다.

 

보신전쟁에서 아이즈 번이 패배하자, 사이고 가문은 대가 끊어진 가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이고 타노모’(西郷頼母)는 메이지 3년(1870년)에 조상의 성씨 중 하나인 ‘호시노’(保科)로 성을 바꾸었고, 메이지 8년(1875년)에 후쿠시마 현(福島県) 내의 한 신사(神社)의 궁사(宮司)가 되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궁사 직책에서 면직되었다. 또한 어머니와 아내, 여동생 2명, 딸 5명을 포함한 일족 21명이 보신전쟁 중에 전원 자택에서 자결했고, 장남 ‘요시쥬로 아리치카’(吉十郎有隣)만이 아버지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지만, 메이지 12년(1879년)에 22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호시노 타노모는 시다 시로, 즉 사이고 시로에게 양자로 입적할 것을 권한 것이다. 그렇게 메이지 17년(1884년)에 양자가 된 ‘시다 시로’(志田四郎)는 ‘호시노 시로’(保科四郎)가 되었는데, 메이지 22년(1889년)에는 정부로부터 사이고 가문의 재흥(再興)을 허가받아 다시 성씨를 변경하여 ‘사이고 시로’(西郷四郎)라고 자칭하였다.

 

[무카스미디어 = 권석무 기자 ㅣ sukmooi@naver.com]
<ⓒ무카스미디어 / http://www.mookas.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권석무 기자
무카스미디어 MMA, 주짓수, 무예 분야 전문기자.
브라질리언 주짓수, MMA, 극진공수도, 킥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무예 수련.
사람 몸을 공부하기 위해 물리치료학을 전공. 
무예 고문헌 수집 및 번역 복간본 작가로 활동.
#주짓수 #유술 #유도 #사이고 시로 #브라질리언 주짓수 #강도관 유도

댓글 작성하기

자동글 방지를 위해 체크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