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술 인물 탐구] 사이고 시로 ②편 : "강도관 입문과 상경"


  

강도관 최강의 사나이, 사이고 시로가 도쿄로 상경해서 강도관에 입문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메이지 15년(1882년) 3월, 17세의 사이고 시로는 절친한 친구였던 ‘사토 요시로’(佐藤与四郎)와 함께 도쿄로 상경했다. 육군사관학교 입학을 희망했지만 151cm의 신장이 걸림돌이 되어 입학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라는 인물은 같은 해 5월에 에이쇼지(永昌寺)라는 절에서 강도관을 설립했는데 지금까지의 유술(柔術)과는 다른, 새로운 유도(柔道)라는 것을 절간 한 구석에서 지도하고 있었다

 

사이고 시로의 도복 [출처 : Judo Info]

사이고 시로는 그 강도관에 일곱 번째로 입문해 에이쇼지에서 지내며 유도 수련에 힘썼다.

 

가노 지고로는 이 때 당시 23세, 전년도 7월에 도쿄 제국대학(東京帝国大学) 문학부(文学部) 철학(哲学) 정치학(政治学) 이재학과(理財学科)를 졸업했다. 메이지 3년; 1870년, 11세 때 해군성에서 근무했던 부친과 함께 현재의 고베 시(神戸市) 히가시나다 구(東灘区)에서 도쿄로 상경했다. 18세부터 처음으로 유술을 수련하기 시작했는데, ‘텐진신요류’(天神真楊流)의 ‘후쿠다 하치노스케’(福田八之助)에게 배웠다.

 

강도관의 첫 번째 입문자는 ‘야마다 츠네지로’(山田常次郎)였는데, 그는 이후에 이즈 시(伊豆市)의 해상운송 도매업자였던 ‘토미타’(富田) 가문의 양자가 되어서 ‘토미타 츠네지로’(富田常次郎)가 되었다. 그의 아들, ‘토미타 츠네오’(富田常雄)는 쇼와(昭和) 17년; 1942년에 소설 「스가타 산시로; 姿三四郎」를 발표하여 인기 작가로 등극했다.

 

이후에 스가타 산시로의 실제 모델이 사이고 시로라는 추측이 널리 퍼져서 사실과 같이 여겨졌지만, 정작 작가 토미타 츠네오 본인은 스가타 산시로는 가상의 인물일 뿐이며 결코 사이고 시로가 아니라며, 츠가와에 위치한 사이고 시로의 비문에 이것을 기록하여 부정했다.

 

하지만 스가타 산시로의 형제 묘사와 그가 아이즈 출신으로 17세에 도쿄로 상경했다는 설정과 ‘야마아라시’(山嵐)라는 기술을 표현한 것까지 사이고 시로를 연상시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작가 또한 공상 중에 떠오른 산시로의 생애 표현에 있어서 사이고 시로의 모습이 떠오른 것에 대해서는 시인했다고 한다. ‘타케와키 무가’(竹脇無我)가 연기한 텔레비전 드라마 「스가타 산시로; 姿三四郎」는 1970년도에 방영되었다.

 

토미타 츠네지로는 사이고 시로와 함께 강도관 사천왕으로 불렸다. 메이지 19년(1886년), 사이고 시로가 21세였을 때,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된 사건이 있었다. 경시청(警視庁)에서 개최된 무술대회에 명문 유술 유파, ‘요신류’(楊心流)의 ‘토츠카 히코쿠로’(戸塚彦九郎) 사범의 수제자 ‘테루시마 타로’(照島太郎)를 작은 체구의 사이고 시로가 그의 장기였던 야마아라시로 호쾌하게 던져버린 것이다. (당시 상대방이 테루시마 타로가 아닌 우케치 엔타로; 好地円太郎였다는 설도 있다.)

 

창시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강도관 유도가 유명 고류 유술 유파를 물리친 것으로 당시에는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 이렇게 사이고 시로의 활약으로 인해 강도관 유도가 크게 발전하여, 강도관 설립 8년 후인 메이지 23년(1890년)에는 문하생이 1,500여명에 달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③편에서 계속...)

 

[무카스미디어 = 권석무 객원기자 ㅣ sukmoo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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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무 기자
무카스미디어 MMA, 주짓수, 무예 분야 전문기자.
브라질리언 주짓수, MMA, 극진공수도, 킥복싱, 레슬링 등 다양한 무예 수련.
사람 몸을 공부하기 위해 물리치료학을 전공. 
무예 고문헌 수집 및 번역 복간본 작가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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