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미국행을 선택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메달리스트'


  

[박호진 변호사의 미국 진출 바로알기 7] 힘든 미국생활, 자라나는 자녀를 보며 힘을 얻는다!

국내 태권도 전공생과 지도자들이 큰 관심을 갖는 미국 태권도 진출에 도움을 주고자 미국 내에서 여러 태권도 사범들의 취업비자와 영주권 업무를 담당해온 박호진 변호사를 통해 현실감 있는 ‘미국 태권도 사범 바로알기’를 연재 합니다. 미국 내에 다양한 사례의 태권도 사범의 정착기와 실패담 그리고 미국 진출에 반드시 알아야할 이슈를 앞으로 매주 목요일 소개 합니다. [편집자 주]

 

박호진 변호사

허 사범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태권도 명문 실업팀 선수로 활동했었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딴 경력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운동을 하면서 의형제처럼 지내던 1년 선배가 2년 먼저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 선배를 통해 듣는 미국생활이 무척 매력있던 차에, 그 선배가 일하던 도장에서 사범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행을 결심하게 됐다.

 

그 도장 관장님이 거래하는 변호사를 통해 비자를 받았다. 사실 그 당시에는 어떤 비자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미국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로부터 요청받는 자료들과 돈을 보냈고, 준비를 시작한 지 약 3달이 지났을 때 미국 이민국의 승인 소식을 들었다.

 

대사관에 가서 비자 인터뷰를 받을 때도 별 다른 준비 없이 갔었지만, 담당 영사였던 흑인 영사가 ‘자기도 어려서 태권도를 했었다’, ‘당신 경력이 참 대단하다’는 등 이야기를 하는 것을 통역을 통해서 들었던 기억이 전부였다. 일주일쯤 후에 집으로 여권이 와서 펼쳐 보니 O-1 비자가 찍혀 있었다.

 

허 사범이 부인과 만 3살이 된 아들과 함께 미국에 들어온 것은 2008년 가을이었다.

 

근무할 도장은 워싱턴 DC 근교의 메릴랜드 주의 차분하고 여유로운 분위기의 소규모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규모 도시라고는 하지만, 상당수 거주자들은 워싱턴이나 그 근교로 통근을 하는 소득수준이 꽤 괜찮은 사람들이어서 분위기가 시골 같지는 않았다.

 

관장님은 미국에 온 지 25년이 넘은 50대였고, 도장을 4곳이나 운영하면서 대외활동을 왕성하게 하는 분이었다. 운영하는 도장마다 관원 수도 많은 편이어서 도장사업으로는 이미 상당한 성공을 거둔 분이었다. 게다가 태권도를 보급하고 미국 내에서 태권도 위상을 높이는 일에 대한 신념이 놀라울 정도로 강한 분이어서 관장님과 대화를 나누는시간이면 허 사범의 마음 속에도 뿌듯함이 생겨났고, 관장님에 대한 존경심마저 생겨났다.

 

대외활동으로 관장님이 도장을 비우는 일이 많아서 관장님은 허 사범이 최대한 빨리 업무를 익히고 도장 운영실무를 모두 맡아 주길 바랐다. 허 사범은 부담이 되기는 했지만, 도장 운영에 익숙해지면 다섯번째 도장을 내서 허 사범에게 맡길 것이고 영주권 문제도 곧 해결해 주겠다는 말에 ‘한번 해 보자’는 결심으로 수업에서 지도하는 일은 물론 도장 관리, 그리고 관장님의 대외활동을 뒷받침하는 일까지 요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했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허 사범이 도장 운영에 참여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도장의 관원 수는 250명을 넘어섰다. 허 사범의 노력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었다. 다른 지역 도장을 운영하던 선배도 ‘허 사범은 미국 도장 체질인 것 같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놀리기도 했다.

 

도장 운영 능력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싶은 생각이 들자, 허 사범은 관장님께 앞으로 계획에 대해 물었다. ‘다섯번째 도장은 언제쯤 내실 계획인지’, ‘영주권은 언제쯤 받을 수 있을 것인지…’ 관장님은 ‘지금은 이러저러한 일들로 정신이 없으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생각해 보자’고 했다.

 

다시 1년이 지나갔다. 허 사범은 자신이 맡을 도장과 영주권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관장님은 한번도 그 일들에 관해 언급 하지 않았다. 자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다시 6개월을 기다렸고, 여러 가지 일로 바쁜 분에게 공연한 무거운 주제의 말을 꺼내기가 죄송스러워 다시 6개월을 기다렸다.

 

그 사이 미국에 함께 온 아들은 프리스쿨 (유아원)과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생이 되었다. 이제 아들은 영어로 또래 친구들과 대화하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에도 자주 친구 집에 놀러가곤 했다.

 

한 학기에 한번씩 학교 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에도 선생님은 아들이 매우 활달하고 친구들과 사이도 좋고 숙제도 잘 해 오는 좋은 아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미국에 오길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나도 독립과 도장 개관, 영주권 문제에 전혀 진척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 한국에서 받아 온 O-1 비자가 만기되어 연장해야 했다. 허 사범은 조금씩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작심하고 관장님을 기다렸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수업이 끝나갈 무렵 도장으로 들어서는 관장님의 표정은 웬일인지 편안하지 않아 보였다.  ‘때를 잘못 골랐나?’ 하는 생각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오늘은 꼭 물어봐야 겠다’는 생각에 관장님께 다가가 말을 건넸다

 

관장님, 저 … 다섯번째 도장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잔뜩 찌푸린 관장님의 미간이 허 사범의 눈에 들어왔다. 

 

허 사범,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 지금 그 얘기할 때가 아니야. 도장 운영에나 더 신경을 써’

 

말을 마치자마자 관장님은 책상에서 무언가를 꺼내 도장을 나가 버렸다.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부사범이 다가와 ‘사범님, 수업 시작해야 하는데요… 제가 우선 시작할까요?’ 하고 말을 걸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날은 어떻게 하루가 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내가 지금 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물음이 가슴 속에서 일어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할 뿐이었다.

 

허 사범은 주변을 수소문을 한 후 필자를 소개받아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다.

 

허 사범의 첫 마디는 영주권을 받으려고 하는데, 도장 측에서는 아직 스폰서를 해 주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필자는 허 사범에게 대표적인 경력을 물었고, 그가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라는 사실을 듣자마자 ‘허 사범님이 원한다면 도장의 스폰서 없이도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다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 이력서를 보내라고 했다. 이력서 상의 내용을 모두 검토해 본 결과 역시 허 사범은 스스로 스폰서가 되어 영주권을 신청하기에 충분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허 사범은 소위 1순위로 영주권 수속을 밟았고, 불과 8개월 만에 영주권 카드를 손에 쥐었다. 부인과 아들 역시 허 사범의 동반가족으로 영주권자가 되었다.

 

허 사범은 자신이 영주권을 취득했다는 사실을 관장님에게 알렸다. 관장님은 ‘잘 됐네. 축하해’라고 할 뿐 별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후로 다시 3년의 시간이 지났다. 허 사범은 아직 관장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분의 도장을 잘 운영하면 약속대로 자신의 도장을 차려 독립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묵묵히 총 6년의 시간을 도장에 헌신했다. 허 사범의 성실함과 뛰어난 태권도 능력 덕분에 도장의 관원 수는 늘 300명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끔 ‘이 도장이 내 도장이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관장님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욕심을 떨쳐 내곤 했다.

 

도장 은행계좌 관리, 다른 사범의 월급 지급도 허 사범이 맡아서 했다.

 

영주권을 딴 지 6년하고도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허 사범은 도장 내 국기원 승단심사 준비 건으로 관장님과 의논을 하고 있었다. 승단심사는 도장 내 큰 행사이기도 하고 정기 회비 이외에 가장 큰 수입원이 되는 행사였기 때문에 늘 관장님이 직접 그 준비과정을 지휘하고 관리를 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번에는 관장님이 외부행사로 장기간 해외에 나가게 되어 허 사범이 맡아서 진행해야 했다.

 

승단심사로 인해 들어오는 돈이야 허 사범이 정리하여 은행에 입금하고 관장님께 추후 보고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심사준비과정에서는 도장 은행계좌에서 출금을 할 부분이 있었다. 허 사범은 스스럼없이 ‘관장님, 제가 계좌에서 필요한 돈을 꺼내서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색을 한 관장님 입에서는 의외의 말이 튀어 나왔다 ‘내가 허 사범을 어떻게 믿고…’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허 사범은 한참 동안 관장님의 눈을 바라보았다. 화가 났다가, 슬퍼졌다가, 허탈해졌다가, 급기야 서글퍼졌다. 데스크 옆에 걸어 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고 주머니를 뒤져서 도장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관장님에게 드렸다. 

 

그만두겠습니다.’

 

그렇게 허 사범은 미국에서 자신의 꿈을 키워왔던 도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갑작스런 결정에 다른 도장 일자리를 알아 봐야 하는지, 이 기회에 자신의 도장을 차려야 하는지도 쉽게 결정이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미국행 꿈을 심어 주었던 선배가 찾아와도 주변을 겉도는 대화를 나누거나 술을 한잔 마실 뿐이었다.

 

몇 달을 쉬니 경제적으로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도장을 차리기로 했다. 다행히 대회에서 가끔 인사한 적이 있었던 관장님이 도장 차리는 일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기존에 일하던 도장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타운에 도장을 차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쇼핑몰과 거리에 전단지를 돌리고 시범을 보이는 일들을 시작했다. 도장 관원은 쉽게 늘지는 않았다. 견디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도장 수입이 손익분기점을 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밝게 커가는 아들을 보는 것이었다. 아들은 허 사범의 부인을 닮아 책을 좋아했는데, 타운마다 있는 공공도서관에는 좋은 책들이 가득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화 DVD도 많아서 일주일에 한두번씩 아이와 함께 도서관에 가는 일은 잔잔한 즐거움이었다.

 

아이가 들려 주는 학교생활도 허 사범이 한국에서 경험했던 학교생활과는 사뭇 달랐다. 넓고 깊은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아이들에게 직접 경험하고 참여할 기회를 많이 주는 학교 수업도 좋아 보였고, 아이들에게 여유를 주는 학교생활에 대해 들을 때면 마음에 편안했다. 일요일이면 동네에 있는 ball park에 가서 아들과 캐치볼도 하고, 원반 던지기도 했다. 부인이 준비해 준 도시락을 먹는 즐거움은 허 사범에게 삶의 휴식처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만둔 도장에서 보냈던 시간들에 대한 회한과 새로 시작한 도장사업이 잘 되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는 밝고 건강하게 커 주는 아들과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는 부인을 바라 보면서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었다.

 

미국에서 도장을 운영하는 사범들에게는 미국 시장 가능성이나 master라는 위상이 큰 매력이다. 하지만, 미국생활 특히 학령기 아동을 자녀로 둔 사범의 경우 아이가 교육받는 환경 또한 매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수 밖에 없다.

 

필자가 지켜 본 허 사범은 뛰어난 태권도 선수이자 사람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가 사범생활이 고단하고 힘들 때 아이가 좋은 교육환경 속에서 밝게 자라나는 모습은 큰 위안이 되었다. 어느 부모에게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 외부 기고문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박호진 변호사는 성균관대 법과대학과 비즐리 로스쿨 출신의 뉴욕주 변호사로 현재 뉴저지 포트리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 중이다. 뉴저지로 옮기기 전에는 맨하탄 소재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위치한 로펌에서 이민법 변호사로 활동했다. 미주 최대 웹커뮤니티 헤이코리안 닷컴을 통해 10년 가까이 무료 법률상담을 제공해 오고 있다. 현재는 태권도 사범의 미국 진출을 위한 토탈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콘 컨설팅의 고문변호사로도 활동 중이다.

 

[글 = 박호진 변호사ㅣ lawyer@beaconi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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