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태권' 명칭 1955. 12. 19 청도관 고문회에서

  


오늘날 태권도는 국제 스포츠로서 보편화된 개념이다. 태권도가 무도인가 스포츠인가라는 논쟁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는 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 올림픽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게 한 역사적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태권도의 정체성은 속성상무도가 본(本)이라면 스포츠는 체(體)로서 사상, 철학, 문화 등 상호보완적인 동시에 그 인터페이스가 태권도동호인에게 어떠한 한계를 느껴지지 않는 무도·스포츠문화를 추구하며 자연스럽게 발전해 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직도 태권도 명칭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개명(제정)되었는가를 정확히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태권도 관련 여러 문헌에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왜냐면 태권도 명칭을 창시(제안)했다는 최홍희 본인이 바른 기록을 남겨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창시자로 자처하고 있는 최홍희는 명칭제정일을 1955, 4, 11이라 하고 있어 대부분의 태권도 문헌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1956년 1월 중 이승만 대통령은 태권 승인 요청을 두 차례나 기각했으며 친필 휘호를 내린바 없다. 최초 태권 명칭은 1955.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11명)에서 채택되었다. 그 후 태권, 태권도라는 명칭은 주로 손덕성, 최홍희 계열의 청도관, 오도관을 중심으로 사용돼 오다가 1959년 대한태권도협회(회장 최홍희)가 창립되기도 했으나 이듬 해 4. 19. 사태로 인해 대한체육회 가맹이 좌절되었다.

1961. 9. 16. 창립된 대한태수도협회는 1965. 8. 5. 대한태권도협회(회장 최홍희)로 바꾸어 태권도의 공식적인 명칭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국기태권도라는 휘호는 1971. 3. 20.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내려졌다.

태권 명칭 유래

최홍희는「태권도교서」(1973)에서 다음과 같이 태권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후 근 10년간 발만 쓰던 태껸과 주로 손의 기술에만 의존하던 가라데를 종합연구하여 오늘과 같이 체중에 구애됨이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현대적이며 과학적인 무도로 발전시킨 다음, 이 무도의 성격에 알맞고 역사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이름을 짖고자 고심하다가 마침내 1955년 4월 11일 개최된 명칭제정위원회에서 본인이 제출한 태권도가 만장일치로 가결됨으로써 여태까지 구구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이름을 태권도로 단일화하게 되었다.4월 11일을 태권도의 날로 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①

"그해 4월 11일 사계의 조예 있는 인사와 사학가 그리고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명칭 제정위원회에서 제의된 여러 가지 명칭 중 저자가 제안한 태권 두자가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이 때부터 당수, 당수, 권법, 택껸 등등 구구 각각으로 불리어 오던 명칭을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통일시킨 해로 저자의 일생을 통해 가장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명칭제정위원회: 유하청(미창사장), 손덕성(청도관 관장), 최홍희 장군(3군관구사령관),이형근 장군(합참의장), 조경규(국회부의장), 정대천(국회의원), 한창환(정치신문사 사장), 장경록(정치신문 주간), 홍순호(공익통상 사장), 고광래(본사 주간), 현종명(청도관 사범). 1955년 4월 11일"②

그리고 명칭제정위원회 참가자 명단 사진과 신문기사(참가자 명단 및 회의 내용일부)로 사실을 증빙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역사적 자료로 제시한 한 장의 기념사진이다. 사진에는 4288(주;1955년에 해당).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 제1회 고문회라고 명기돼 있다. 그리고 신문기사(회의 참가자 명단 및 중요 회의내용)의 출처 및 연월일 등을 밝히지 않고 있고, 태껸, 택껸 등 용어를 혼용해 쓰고있다.

필자는 이 회의 내용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청도관 고문회를 명칭제정위원회로 둔갑하며 1955년 12월 19일 회의날짜를 1955년 4월 11일로 날조한 전말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1955. 12. 19 청도관 고문회에서

위 관련된 회의 내용을 저자(최홍희)의 각기 다른 두 문헌의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회의내용 사례 1;
최장군: "태권"(태拳)에 대한 글자의 뜻을 기술과 역사적인 견지에서 설명했다.
유하청:나는 최홍희 장군이 제안한 태권을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무도에 관한
명칭을 제정하는데는 국가원수인 이승만 박사의 승인을 얻는 것이 퍽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참석자전원: 만장일치로 찬성.③


회의내용 사례 2;
최장군: 태권도에 대한 글자의 뜻을 기술과 력사적 견지에서 설명하였다.
유사장: 최 소장이 제출한 명칭을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명칭을 개정 공포한다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만치 즉석에서 결정한다기보다 이에 대한 사적 고찰과 학리적 연구가
필요하니 일단 이에 대해 유명한 사학가들에게 의뢰하여 빠른 시일 내에 최 소장이 제출한
명칭의 사적 고찰을 마치고 그 기간에 각자의 다른 명칭이 있으면 제출하여 몇 개의 명칭을
첨부해서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얻어 공포함이 좋겠습니다.

조부의장: 결의 사항으로 사적 증거와 학적자료 수집을 위해 3인 소위원회를 결성하고 금년(1955
년도를 지칭) 12월 31일까지 완료하여 각 위원들에게 개별적으로 통지한 다음 이 통지를
받은 위원은 일주일 안으로 그에 대한 해답과 대통령 각하의 재가를 얻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④

사적 증거와 학적 자료 수집의 한 방편으로 최홍희는 그의 『태권도교서』(1973)에 당시 "영남대학교 총장 사학박사 이선근"은 "태권도의 역사"라는 글을 썻다.

이선근의 장황한 넋두리를 빼고, 그의 글에서 "택껸과 수박의 전통을 이어받은 창헌류는 벌써 10여 년 동안 널리 해외에 소개되어 오늘에 와서는 이미 50여개 국에 천여 만의 수련생이 있는 현실이며…,"로 최홍희 본인이 말한 태껸과 가라데를 이선근은 택껸과 수박으로 왜곡, 미화하고 있으며, 최홍희는 태권을 태권도로 둔갑, 1983년 평양에서 발간된「태권도백과사전」에 회의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조선일보 특파원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이호성 기자가 쓴 『한국무술 미대륙 정복하다』(스포츠조선, 1995)에서는 최홍희의 기록과비교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는 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최홍희) 태권도라는 말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한 명칭위원회를 구성했다. 제1차 명칭위원회는 1954년 12월 19일에 열렸다. 참석자는 손덕성 청도관 관장, 이형근 합참의장, 조경규 국회부의장, 한창환 정치신문사 사장 등이었다.

이 위원회는 만장 일치로 태권도(태권)라는 말을 승인했다.
그러나 조경규 국회 부의장이 이 대통령의 재가를 받자고 제안하는 바람에 경무대의 회신을 기다리게 되었다. 목마르게 기다리던 대통령의 회신은 "태껸"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라는 것이었다.

제2차 명칭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거기서도 태권도가 채택되어, 경무대에 결과보고가 올라갔다. 내려온 대통령의 회신은 여전히 태껸이었다. 최홍희는 경무대 비서실에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날 회의에 참가한 손덕성, 이형근, 조경규 등 3명이 대통령의 승인을 받기 위해 대표로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김창룡 특무대장이 암살되는 바람에 이 면담은 취소되었다.

몇 달 후, 이승만 대통령은 친필로 태권도라는 휘호를 내렸다. 1955년 4월 11일, 이날이 바로 태권도의 탄생일로 태권도의 날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최홍희와 이호성, 두 저자의 책 내용 중 회의 일자와 회의 횟수를 서로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최홍희는 1955. 4. 11은 명칭제정위원회의 회의일자라고 밝히고 있는데 반해 이호성은 이 대통령 휘호를 받은 날짜라고 밝히고 있다.

엇갈리는 기록을

최홍희는 자신의 회고록『태권도와 나 1』에서 소설에서나 흥미를 느껴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한편 이날 저녁 회의에서 형식적으로 결의한 3인 소위원회 구성에 관계없이 나는 다음 날부터 오도관에다 태권도의 새 이름을 쓰라고 지시하고직접 경무대 서장실에 연락하여 한자로 태권도라고 쓴 이 대통령의 휘호를 요청했다.

그런데 2, 3일 후 나의 기대와는 달리 경호 대장으로부터 "대통령 각하께서 한글로 택껸이라 쓰시겠답니다"하는 전화가 왔다.(중략)

그러나 며칠 후 경무대에서 온 연락은 역시 한글로 써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이라 나로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이 대통령의 손발 노릇을 하는 경호대의 실력자 서정학과 곽영주 그리고 심지어는 경무대 부서장까지도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요정에다 초청했다. 나는 이 좌석을 이용하여 이 박사가 태권도를 한자로 휘호하도록 그들을 설득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결국 그들은 속담에 먹은 소 똥눈다로 내가 원하는 태권도(跆拳道) 세 글자를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이 휘호가 발표됨으로써 태권도는 누구의 모략도 받을 수 없이 공식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와 같이 나는 태권도를 창시하기 위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과 술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태권도가 탄생한 1955년 4월 11일 저녁 내 기쁨이란 그 어떤 말이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⑤

이제 태권, 태권도 명칭에 관련, 최홍희의 여러 문헌에서 지적할 수 있는 함정을 살펴볼 차례이다.

첫째. 최홍희는 1955. 4. 11. 이날을 명칭제정위원회 최초의 회의 날짜라고 하며 또 다른 책에서는 휘호가 내린 날짜로 상반된 말을 하고 있다.

둘째, 이호성이 말한 1954. 9. 16 제1차 명칭위원회의 연도는 1954년이 아닌 1955년이 바르다는 것은 사진의 기록이 단기4288(1955)이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1954년 9월 중순에 보병 제29사단 제1주년 창설 기념식에 이 대통령이 참석, 최홍희의 당수도시범대회를 지켜보고 저것이 택껸이라는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뒷날에 태권 두 자의 명칭을 작명하게 된 것이었다.

셋째, 1955. 4. 11 회의를 가졌다고 할 때 "금년 12월 31일까지 완료"라는 기간은 너무 길고, 이호성이 말하는 회의일자가 9. 16.이 신빙성을 더해 주고 있다. 단지 연도가 틀리다는 것 외에 회의날짜는 사진의 기록과 일치한다.

넷째. 이 대통령의 승인, 휘호를 요청했는데, 두 번씩이나 태권이 아닌 택껸을 고집하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다섯째, 이호성은 3인이 직접 경무대를 방문, 면담을 요청한 날짜가 바로 특무대장 김창룡 저격사건이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이호성이 말한 특무부대 대장 김창룡 저격사건은 역사적 사실이다. 최홍희는 그 사건에 대해어느 태권도 저서에서도언급하지 않은 것은 1956년을 은폐, 1955년으로 모든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1955. 12. 19. 회의날짜를 철저히 위장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바,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사건은 1956년 1월 30일 발생했고 그 역사적 사건은 익년 1957년 9월 22일 허태영 등 범인 4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형에 처하게 됨으로써 사건이 종결 되었다.


이승만의 태권,跆拳道 휘호는 사실무근

이 대통령에게 태권용어의 승인 및 휘호를 요청한 시기는 1956년 1월중이고 이호성이 말한 같은 시기에 가진 2차 회의마저 최홍희는 그것마저 숨기고 있다.

최홍희가 말한 1955. 4. 11이라는 날짜는 한마디로 날조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태권도문헌은 기록마다 상이한 내용이며, 회의개최 연월일, 대통령 사용 승인 및 휘호하사 등. 특히 이 대통령에게 한자로 써 달라고 요청, 跆拳道 휘호가 정말 내려졌다고 하는데, 그 귀중한 역사적인 친필을 누가 보관하고 있다는 것인가.

두 번씩이나 택껸을 쓰라며 승인을 받지 못했고, 심지어 3인이 경무대 면담을 요청한 날이 바로 저격사건이 발생하였다. 국기(國基)가 흔들릴 정도의 긴박한 상황에서 대통령을 보좌하는 경무대 요원들이 재삼(再三) 대통령에게 승인 요청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저격사건 이후 그 와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및 휘호가 내려졌다는 것은 최홍희 회고록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소설 속의 스토리이다.

1956. 1. 30 김창룡 특무대장 저격사건으로 인해 이 대통령의 휘호하사는 명백한 허구이다. 정말로 이 대통령의 친필로 휘호가 내려졌다면 지금껏 이에 대한 어떠한 증빙자료는 왜 없는 걸까. 당시 가장측근 인물이었던 손덕성, 남태희(이상 재미), 현종명(사망)원로 등뿐만 아니라 그 휘호를 한 번이라도 보았다는 태권도인은 지금껏 아무도 없다.

최홍희는 대통령의 친필을 보관 중 부주의로 분실하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분실되기전까지 행적에 대한 사료(史料)를 제시해야 한다.

그는 『태권도창시자 최홍희 회고록, 태권도와 나』두 권을 쓸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수집, 보관하고 있는데, 하필 그 귀중한 역사적인 대통령의 휘호를 분실했을까. 그 대안으로 증빙할 수 있는 어떠한 자료라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최홍희가 주장하는 태권도 명칭은 명칭제정위원회 1955. 4. 11. 제정 아니고 「1955. 12. 19 대한당수도 청도관제1회 고문회 회의에서최홍희 소장이 제안한 태권(跆拳) (태권도가 아닌 태拳 二字)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라고 사실적 기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태권, 태권도라는 명칭 채택에 있어‘청도관 고문회’를 은폐하고 ‘명칭제정위원회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및 휘호’를 내세워 태권도사를 왜곡, 날조한 장본인이 바로 최홍희이다.

오늘날 태권도인들은 그러한 허구적인 태권도사의 전통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이 날조된 태권도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태권도에 대한 최홍희의 공과를 사실대로 겸허하게 수용해야 할 것이며 80이 넘는 고령임에도 태권도발전에 헌신하고 있는 그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태권도가 이처럼 허구적 슬픈 역사의 역경 속에서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요인은 태권도의 뿌리가 한민족 고유의 문화요 사상이며 철학의 토양에서 태동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010919)

주:
① 최홍희,『태권도교서』 정연사 p13
② 같은 책 p507
③ 같은 책 p507
④ 최홍희, 『태권도백과사전 1』 평양 p247
⑤ 최홍희, 『태권도와 나 1』 다음 p346∼347


#이경명-태권도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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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친놈

    지랄염병들하네
    잘먹고잘살아라 빙신들아

    2005-01-1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림원섭

    도장에 오는 자들은 누구

    내 도장에
    내 학교(유, 초. 중. 고. 대)에
    내 직장에
    내 가게에
    내 식당에
    내 병원에
    내 이발소에 오시는 손님들

    사범님을
    선생님을
    교수님을
    그 주인님들을 존재하게 하는 자들

    그들은 그 존재에 감사할까
    그들은 손님 대접을 해주고 있는가

    돈을 받고 지식을 파는데
    먹고살게 해주는데
    존재하게 해주는데

    그 손님들이 감사하다고 할 때까지
    그 손님들이 최고라고 해줄 때까지

    알량한 지식이었나
    당당한 지성이었나
    혹시 교만방자 했나
    품질이 좋았나

    귀하는 오늘도 옳고 그른 것을 분명히 가르쳤는가
    귀하는 오늘도 질이 얼마나 좋고 나쁜 것을 팔았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명들에게

    확실하게
    완벽하게
    정직하게 분별을 하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거울은 얼마나 보았는가

    묻노니
    나부터 양심에 한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가

    amea@chello.se
    www.amea.nu
    http://cafe.daum.net/wmhgf

    2003-11-28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림원섭

    내가 베트남에서 생겼던 일

    아래 생긴 일로 난 깊은 잠에서 깨우치기 시작을 했던가!

    매우 당당한 모습으로 낙하산을 타던 난 태극기를 이마에 양 어깨에 기세등등하게 붙이
    고 1966년 봄에 큰 배를 타고 근 1주일이 넘게 달려 월남에 갔다. 바다 물고기도 날개가
    달려 날라 다니는 것을 보면서 배 멀미가 고약한 것도 경험을 하면서 월남 태권도 교관으
    로 갔다.

    내가 처음 부임한 곳은 제2사단 지역 ‘꽝나이’ 지역이다. 이 지역은 ‘추라이’ 우리
    해병대 지역과 매우 가까운 곳이다. 그리고 약 3십리 가까운 거리에 월맹(베트콩)군 사단
    이 있다는 곳이다.

    미 고문관 숙소에서 미 양키들의 식사를 하며 살기란 정말로 힘이 들 때다. 그래서 월남
    에 아주 작은 고추가 매우 맵다. 난 매운지도 모르고 식사를 하면서 뚝뚝 비어 먹으니 식
    당에서 일하던 월남인들이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보는 것이다. 그 후 설사를 만나 혼 줄
    이 나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이 때 3번의 죽을 고비를 경험했다. 손금이 길었던지 구사일생으로 산 사람이다.
    한 번은 운전을 하고 가던 중 총알이 유리창을 뚫고 날아와 내 얼굴 매우 가까이 스치고
    지나간 일이다. 씽하는 바람소리를 들었으니까 말이다.

    두 번째는 기름을 반질반질하게 칠하며 공사 중인 나무다리를 건너러 다가 난간 약1cm에
    서 내 찝차가 섰던 것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약5-60m 낭 떨어진 곳
    이며 밑에는 물이다. 이 다리를 세워 놓으면 섣달 열흘도 못가서 폭파가 되는 다리다.

    세 번째는 내 숙소는 미 고문단 팀의 숙소인데 거 이 1주에 한번 혹은 두 번씩 베트콩 박
    격포가 떨어지는 곳이다. 어느 오밤중에 쨍 - 쨍하며 찢어지는 소리가 또 요란하여 깨어
    서 옷을 들고 속옷 바람으로 잽싸게 방카로 갔다. 벌벌 떨고 있는 자들이 나만 있는 것
    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코앞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군목(목사)이 직통으로 이마에 총알
    을 맞아 직사했다. 이 고문단 숙소에 베트콩이 들어 와 있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사에
    살벌할 때다.

    근 1시간 반이 지난 다음에 조용해져서 나가보니 여기 저기 시체들이 있고 또 내 방에 가
    보니 나와 반대편에서 자던 미군이 즉사해 있었다. 물론 내 방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
    었다. 어떻게 내가 살게 되였는지 납득이 가지 아니할 정도다. 산 이유가 있다. 그 때 베
    트콩들이 쏘는 박격포들은 수류탄처럼 터지면 파편들이 위로 솟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
    에 닫던 지간에 밑으로 퍼지는 폭탄이다.

    그런데 그 베트콩 박격 폭탄은 본인이 자는 방 벽 쪽 위에서 터지는 바람에 우산처럼 퍼
    지는 그 파편들은 내 몸만 남겨두고 퍼져 나가 나와 반대편에서 자던 그 미군 병사는 즉
    사하고 나만은 기적적으로 살았던 것이다.

    그 후 이 때 놀라서 비상종(Bell)만 울리면 놀라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서 귀국을 하
    려고 신청을 하니 큰 도시 다낭으로 옮겨준 그 때가 1968년이다. 이 때가 1968년 구정
    때 도시 게리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그 바로 전이다.

    시체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1군단 도장을 가려면 미 양키들의 헬리콥터 장을 바로 옆
    으로 지나서 가야 하기 때문에 그 때의 상항이란 그 널은 비행장에 새 까 막게 탄 시체들
    이 가득했었다. 머리도 없는 시체, 발 다리가 만 있는 시체, 몸통만 있는 시체 등등 참
    아 눈뜨고 볼 수가 없는 가지각색들의 시체들이었다.

    이 때 나의 느낌은 왜, 왜, 같은 동족끼리 서로 죽여야 하고 왜, 남들인 우리나라 군대
    와 미군들이 와서 죽어주면서 싸워줘야 하는 지를 생각하게 되였다. 그러면서 기억이 나
    기를 내 어린 시절 6.25 때 동네 마을에서 죽은 시체를 본 기억이 나고 내 부친 생각도
    났다. 여기에서 나의 고민이 시작이 되였다. 왜‘라는 단어는 계속 꼬리를 물었다.

    그 도시 이름은 제1군단 지역인 다낭(Danang) 이라는 도시인데 베트남이 남북으로 잘린
    군사분계선이 있는 바로 밑에 옛 왕궁 터가 있는 ‘후예’라는 도시에 제1사단이 있고
    그 밑에 다낭이라는 도시에 1군단이 있고 그 바로 밑에 제2사단이 있고 그 옆 ‘추라이
    ‘에 우리 해병대가 주둔해 있는 매우 위험한 곳이다. 이 다낭 지역에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 ’곰탕집‘도 있는 월남에서 2번째 큰 도시다.

    그 후 어느 날 군 찝(Jeep) 차를 몰고 다니던 본인은 빨강 신호등에 의해서 정지를 했
    다.
    그 순간 뒤에서 꽝! 하여 내려서 보니 오토바이가 내 차를 들이 받아버렸다. 그러니 군
    용 차량보다 약한 그 오토바이가 상할 수 밖 없다. 뒤에서 와서 받은 충돌은 니가 잘못
    을 했으니 난 간다고 하니 날 붙들고 놔 주질 아니한다. 충분히 뿌리 칠 수가 있지만 갑
    자기 모인 관중들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고 설명을 친절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납득이 간 그 오토바이 운전수는 말이 매우 재미가 있다. 당신이(나보고) 우리나
    라(월남)에 오질 아니했으면 이런 사고가 나지 아니했지 아느냐 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
    똥찬 말이다. 그렇게 표현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느그 나라 정부에
    서 초청을 해서 왔다. 하니 그 자는 우리 국민은 원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망가
    진 오토바이 수리비를 내라는 것이다.

    이런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경찰들이 왔다. 그래서 응원자를 만 난 기분으로 신이 나서
    그 상항을 설명을 했다. 그 오토바이 운전수도 신나게 설명을 했다. 다 듣고 난 그 경찰
    은 뜻 밖에도 내 편이 아니고 자기 백성의 편이였다. 그 경찰도 말을 하기를 니가 여기
    에 오지 아니했으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아니했지 않느냐 그러니 수리비를 내고 가라 그리
    고 너는 부자가 아니냐? 하는 식이다.

    이 다낭 주민들에게 삥 둘려 싸인 난 겁도 나고 해서 그 자리에서 다행히 있는 돈을 주
    고 곧바로 1군단 도장으로 가서 날 도와주고 있는 즉 내 소속 상관격인 소령이 있는 사무
    실에 가서 그 자초지종을 설명을 하니 그 밑 하사, 중사, 중위, 대위, 소령까지 모두 내
    편이 아니고 자기 국민의 편이었다. 내가 교통위반자라는 것이다.

    이 때 난 매우 억울했다.
    그러나 난 사색을 하기 시작을 했다. 왜, 이들은 자기들을 직접 가르치는 태권도 사범 편
    이 아니고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이들은 끈질기게 설득하는 나의 편이 아니고 철저히 자
    기 백성의 편이였다. 고로 여기에서부터 이 우둔한 머리는 깨우치게 되였던가! 그래서
    이 베트남은 옛 진시왕도 지배를 못했던가!

    그랬던가! 나는 군 생활을 할 때 미 고문단 하사관에게 우리 대한민국 장교가 먼저 경례
    를 하는 것도 보았고 또 월남에 가서는 키가 큰 미군 장교들이 키가 작은 월남 하사관들
    에게 꼼짝 못하는 것도 보게 되였다.

    9222년(2003년)11월16일 씀.
    www.amea.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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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ea@chello.se

    2003-11-2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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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고

    한도가 넘었네요.

    2003-11-1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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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림원섭


    이 멜로 소식을 부탁합니다. wonsup@chello.se

    2003-11-1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림원섭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 환인, 환웅천황께서 창시한
    우리 배달민족 삼신사상

    불교, 유교, 모든 종교의 시조였던 그 삼신(三神) 철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우리 배달민족의 “경전”
    즉 불교 경전보다 5000년이 앞선 이 엄청난 우리 역사 책
    위대한 책 자랑스러워 당당한
    “천부경, 참전계경, 삼일신고”는 아직까지 생생하게 씽씽하게 살아있다.

    노상 대 강도 외세 원, 당, 명, 청이 약3십 만권
    왜놈들이 51가지 책 종류들 약2십 만권을 깡그리 태웠어도
    그 기록은 타질 아니했다.
    그 기록들은 탈 수가 없었다.
    이 경전을 태울 수가 없었다.

    “하늘은 시작됨이 없이 시작한 하늘이라.”
    “하늘 즉 우주는 시작됨이 없이 시작되고 끝남이 없이 끝나리라.“
    “이 세상은 나는 것이 없음으로 돌아가는 곳이 없느니라.”
    “땅은 땅이면서 하늘이고 사람이며, 사람은 사람이면서 하늘이요 땅이라는 말이다.“
    “모습이 없이 볼 수 있고 함이 없으면서 모두 이루고 말 없으면서 다 행하였다.

    “사람이 곧 하늘인데 어찌 사람 밖에서 신을 찾을 것인가?“
    지중해 문화인 성경책(이스라엘 경전)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다.”고 하는 유치한 우주론과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을 큰 눈 뜨고 못 보고 못 읽었다 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사대의 시조 신라 29대왕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겹사돈 대 살인 집단이었던 화랑도의 수장 김유신 이 놈들 때문에
    여기에서부터 우리 민족은 더럽게 되기 시작이 됐다.
    이 시절 대 어용 불교인 원효와 이 자의 아들 설총을

    나는 이 것을 꼼꼼히 못 보고 못 읽었다 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원나라가 침략하자 양반, 유생, 관군이 다 도망을 갔으나
    노비군 만은 끝까지 남아 충추성을 사수했었다
    그런데 몽고군이 물러간 뒤 양반 관리들은 관가의 기물을 훔쳐 다는 핑계로
    그 노비군의 지도자들을 모두 목 잘아 죽였다.

    이런 원나라 식민지 약127년
    퍽 으나 많은 미인들 수출과 몽고군대 40년 주둔

    이런 것들을 만약 못 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아 - 계백 장군이여 - 장군의 혼은 지금 어디 있소?
    칼. 창 녹여 괭이, 삽, 호미, 쟁기를 만들었던 평화의 나라 백제를 망하게 했고

    아 - 을지문덕 장군이여 - 장군의 지혜는 어디 갔소!
    저 - 널은 땅 고구려가 병신 같이 망했고, 발해까지 망했다.

    아 - 강감찬 장군이여 - 장군의 용맹은 어디로 갔소!
    이런 장군을 두었던 고려도 망하고 말았다.

    이렇게 망하게 한 근본적인 종교는 어떤 종교였는가!
    불교였나, 유교였나?
    오늘을 망하게 하고 있는 종교는 지중해 문화 기독교인가?

    신라 겹사돈 두 김씨 놈과 당나라 소정방이와 짝짝 꿍
    지 민족 엄청난 학살, 살상, 살인 행각을 했던 화랑도
    그리고 당나라 군대가 17년 동안 있었던 것을

    만약 내가 이런 것을 못 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원으로 당으로 명으로 청으로 식민지 인수인계
    때국 놈 식민지 리조 약 500년 동안

    의인들을 깡그리 죽인 비열한 대 살인자 리성계 조선
    5째 아들 리방언 민족의 대 살인 역적 놈
    고려의 충신들을 모두 때려죽이고
    명나라에 년 7십만 양씩 상납을 상속한 자
    그 세월이 리조 5백년이라

    세종대왕의 아버지 리방언 엄청나게 무지막지하게
    고려의 충신들을 그리고 백성들을 죽었다.

    343여회의 민란이 일어났던 리씨 왕조 시절
    피로 시작하고 피로 끝난 리성계 족속들

    만약 내가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못 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공자, 맹자, 노자, 묵자, 관자, 순자, 장자, 모택동, 등소평까지
    태극을 만든, 송나라 지방관리 주돈이(1017-1073), 음양, 오행,
    주자(1130-1200)학에게 년 7십 만 양씩 공식 상납
    비공식은 또 얼마였는가?
    이 놈의 유교여 - 저주하노라 -

    온 나라가 썩을 데로 부패되었던 때
    동학의 녹두장군 절세의 애국자 외세를 철저히 반대하며
    평등주의를 힘껏 부르짖었던
    전봉준 어른 그 해 1895년 5월11일 날 전봉준 장군은

    때를 만나니 하늘과 땅이 힘을 모아주고
    운이 다하니 영웅도 할 바가 없구나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따랏나이
    내 부끄러울 것이 없는데
    나라 사랑하는 마음 그 누가 알아주랴, 라는
    시한 수를 남기고 41세(1854-1895)의 젊은 나이로 당당히 기꺼이 떠났다.

    나는 이런 것들을 꼼꼼히 못 보고 못 읽었다 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청이 왜놈들한테 망하니 그 재산이 쪽바리들에게 인수인계 된 것
    조선 땅 1백 년 전에 미. 일이 비열하게 야합으로
    각가지 엄청난 수모의 식민지 약36년
    성 노예와 왜놈 군대 51년 주둔 한 것 등등...

    최익현, 림병찬 의병장님들,
    안중근 의사와 3.1절과 신채호 선생님, 김구 선생님과
    여러 많고 많은 항일투사님들

    의사, 열사님들의 존함을 모두 쓸 수가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
    특히 이름 없이 돌아가신 민족의 영웅들의 자존심이 참으로 그립다.

    만약 이런 것들을 자세히 못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36년 피 고통의 왜놈에서 양키 미국 식민지로 인수인계
    상전이 바뀐 지 58년째라 93년이냐, 백년이냐?

    그 것도 부족하여 -
    외세의 서양문화 천민자본주의와 망한 공산주의 이 무식한 남의 것
    때문에 이 것들 때문에
    이 지중해 문화들을 가지고 서로 원수라고 철천지원수로 38도선이 생겼다.

    저- 위 온성에서 서귀포까지
    그 동안 이북은 소련, 중국 눈치 보며 남 것 망한 공산당 한다고 몸부림쳤고
    이남은 천하 디 천한 미 자본주의 남 것 빙신 같이 섬기며
    약350-4백만 명의 양민 학살
    군인 포함 6백만이 비참히 죽어야 했던 6.25 전후
    이 주의(사상) 두 개는 모두 서양 것

    이 때 불교, 유교, 지중해 문화 천주교, 기독교의 귀,
    눈들은 무엇을 했고 입들은 오직 처먹기만 했더냐?

    팔, 다리는 허위적, 허위적 -
    혀는 골방에서 산골짜기에서 기도만 했는가?
    그리고 38도선 군사분계선 꽉!
    미 양키 군인인 미군 일개 중령이 만들어 잘랐어.
    그래가지고 철천지원수를 만들었고 서로 증오하는 세월
    그 세월이 58년째라

    만약 이런 것들을 밤잠 주리며 설치며 못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노근리에서 매향리까지
    대한민국 백성 4500만 생명인
    국군통수권도 없는 대한민국 신탁통치, 현대판 노비문서 한미행정협정(SOFA), IMF
    거 이 매년 약 10조 원이 훨씬 넘는 미국제 구형(흔, 헌) 무기 수입
    지 민족 죽이자고,

    또 다시 한반도에서 전쟁의 미 침략이 있을 땐
    대한민국, 일본, 이북까지 깡그리 망한다.
    이북에는 나올 것이 없다.
    있다면 엄청난 파괴와 우리 동포인 인명피해 뿐

    그래서 지금은 MD 살상무기 팔려고 있을 수도 없는 전쟁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전쟁은 물 건너갔다. 고만 웃기지 말라.
    58년 째 가지고 있는 7천만 생명 줄 국군 통수권 내놔라 미 양키야 -
    이젠 속지 않을 것이다.
    이제 고만 공갈 협박하지마라

    만약 이런 것들을 구체적으로 못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원나라 시절에도 아주 지고 가서 살며 노예로 살았고
    때국 놈들 시절에는 소마차로 착실히 갔다 바쳤었고
    왜놈 시절은 기차 길, 항구 만들어 착실히 실어가도록 갔다 주 고,
    요즈음
    미 양키들은 컴퓨터를 만들어 그 냥 손가락 하나로 날려가네
    이렇게 천년이 넘도록 어느 나라에 얼마씩 매년 퍼주고 있는 지를

    만약 이 것 등을 진지하게 못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 친일, 친미 사대매국노 행위를
    민족 해방이 거꾸로 읽어보니 방해라
    이 전후 8.15, 4.3, 6.25, 3.15, 4.19, 5.16,
    부마, 5.18, 6.15,
    이 친일, 친미 사대 매국노들은 지 백성 죽이는 것
    그러면서
    또 그러면서 지 바다에서 옆으로만 가는 꽃 개 쌈질로
    한쪽은 디 지고 또 한 쪽은 훈장주고, 출세하고, 진급하고, 보상받고
    옆에서 부러워하며 박수치고
    이 병신육갑 떠는 것들
    오늘까지 이남 지진아 정치인들의 사대 매국노들의 행각

    만약 이런 것들을 충혈 된 두 눈으로 못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정치계, 법조계, 종교계, 언론계 많은 자신들과 자식들
    군대에 보내지 아니하면서
    자신들이 스스로 더러운 빨갱이들이면서 그 것을 모르고 사는 껍데기들
    쭉쟁이들 빨갱이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지랄들이고

    이남 수구, 보수 반민족 사대 행각과 탈세하는 여러 언론들
    이 놈들은 손가락으로 글씨 쓰는 것이 아니고 발가락으로 글씨를 써
    이런 더러운 심청구멍들을 만약 자세히 못 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오늘에 종교 5700개, 하나님도 5700개
    다 - 인간들이 만든 것
    그러니까 하나님도 인간들이 만들어 죽기 살기로 섬기는 것
    서로 지 형제자매를 엄청 매도하고 사대매국으로
    서로 여러 악질 적인 방법으로 지 민족 죽이는 종교들
    지중해 문화 기독교, 천주교
    이 들의 종교를 앞세우고 엄청난 식민지 살인의 이 지구 역사
    그러니까 다시 말해 중남미와 아프리카 아세아 등등의 식민지 역사

    미 양키 놈들의 군대 1945년09월08일 침략으로 들어와 58년 째 대한민국에 와 각종 범죄
    하루에 평균 5건의 범죄 도둑, 강도, 폭행, 자연파괴, 강간, 살인 등등

    만약 이런 것들을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위대하다는 눈으로 못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미국의 역사 212년 동안
    약230회 이상 남 나라 침략 전쟁
    2-1개 월 전 미국의 아프칸이스탄과 이라크 침략전쟁에 엄청난 양민들의 희생을

    만약 이런 것을 자세히 못보고 못 읽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중국인들의 점괘인 국기 태극기도 우리 것이 아니요
    스콧트랜드 민요곡인 올드 랭 사인인 우리 국가 애국가도 우리 것이 아니요

    품새, 틀 동작들은 왜놈들 것이요.
    철학은 때 국 놈들 것
    생각은 천민자본주의 식 미 양키 것
    국기 태권도도 우리 것이 다 아니야

    그러나 겨루기만은 우리 것

    모든 학문까지도 다 남 것을 표절 했드라고
    이 것이 약 1400년의 외세 예속 때문이라고

    오직 우리 것은 우리 한글뿐이었다 것

    왕왕 댔던
    유럽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가 쓴 재생 론
    대 개혁의 르네상스(Renaissance14-16세기)를 만약 못보고 못 읽었다면
    그래 선가
    구체적으로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다.

    한 생명은 이 인류와도 바꿀 수가 없는 것
    이 지구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바꿀 수가 없는 것

    한 인간 생명을 손바닥 위에 정중히 올려놓고 감히 본다면
    어떤 우수하다는 학문들도
    어떤 위대하다는 종교들도
    오늘에 어떤 엄청난 기술(technique)들도
    이 세상 모든 것은 상식에 불과 한 것

    이런 것인데 말이다.
    이런 것인데 말이다.

    오늘은 남 나라까지 가서 남 생명들을 죽이겠다는 것이다.
    살인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학살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도 남 땅에서 객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더더욱 미국 212년 역사에서 약 230회 이상 남 나라들을 침략하여
    대 살상을 서슴없이 저질은 미 양키들을 대신해서 말이다.

    14살짜리 효선이 미선이를 미 장갑차로 깔아뭉개 죽여 놓고
    미군 지들 끼리끼리 남 땅에서 남 백성을 죽여 놓고
    남 땅에서 양키 판사들이 무죄로 판결하고 지들 나라로 보내 버린 야만인 놈들이다.

    이런 어마어마하고 엄청난 선과 악
    이런 옳고 그른 분별을 만약 못보고 못 읽었다면
    이런 불의와 정의의 구분을 못했다면

    그런 태권도 보급 개척자 정신이었다면
    그런 무도인의 의식이었다면

    나는 내 눈깔을 확 빼버렸을 것이고
    그리고
    나는 나의 심장에 뾰쪽한 칼(비수)로 꽉 꼽았을 것이고
    또 말이다.
    나는 내 머리통을 당당히 꽉 잘라 뚜껑 있는 쓰레기통에 버렸을 것이다.

    9220년(2001년)07월04일.
    9222년(2003년)10월09일.
    9222년(2003년)10월31일.

    창립회장 림 원섭 씀.
    무윤학 - 전 무도 윤리 학회 - 全 武道 倫理 學會
    AMEA - All Martial arts Ethics Acad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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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11-1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화랑

    태권도는 최홍희 장군이 창시한 배달 민족의 호신 예술이당~ ^.^

    2003-07-0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

    가라데는 일본꺼 -> 태권도의 원류는 가라데
    ->쪽팔려...

    이따위식의 파시즘적인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역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다 못해
    위의 자칭 경희대생 처럼 아예 역사연구를 하지 말라고 하는 무식한 작자들도
    나타난다....대체 이게 역사왜곡에 혈안이 되었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독일
    나찌들과 다른게 뭔가...

    태권도는 한국인들 스스로 가라데에서 더욱 발전시켜 독자적이고 훌륭한(세계적으로
    이미 태권도는 쿵푸나 가라데를 능가하고 있다...) 무술로 만들었다.그러면 된거다..


    게다가 태권도의 전신인 1930년대의 가라데는 당시 일본무술이라 보기 힘들었다. 오끼나
    와(유구왕국)는 일본에 의해 침탈된 나라였고 가라데는 바로 이곳의 무술이었다.조선
    처럼 강제 병합된 나라였고 그 저항 또한 상당했었다.

    일본 본토에서 멀찍히 떨어진 오끼나와의 무술 가라데가 본토에 상륙한 것은 1910년대다.
    그리고 한국에 가라데가 도입된것은 1930년대였음이다. 겨우 본토에 상륙한지 20년 밖에
    안된 무술이었고 그나마 저항이 심했던 일본의 식민지에서 올라온 무술이었다. 이걸 일
    본 고유의(당시 1930년대) 전통 무술이라 할 수 있었을까? 물론 현재 2000년대에 있어
    가라데는 일본고유의 무술이다. 하지만 태권도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던 1930년대의 가라
    데는 결코 일본전통의 무술은 아니다. 그저 무술은 무술일 뿐이다.


    위의 자칭 경희대생(다른 경희대생에게 누가 될까 두렵다.)의 헛소리는 파시스트
    일본 군국주의자들이나 독일 나찌들의 개소리와 발끝의 때 만큼도 다를게 없다.

    나 성균관대생이 말하건데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는자 그것이 무술이 되었건 다른분야가
    되었건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는 없다. 결국 역사에게 심판받는다.
    (역사의 죄인으로 기록되었던 일본 애들처럼....쪽팔림으로...)

    알겠냐! 이 무식한 경희대생 놈아! 넌 태권도계의 수치다. 바보야...


    ps. 위의 가라데 관련 자료는 도올 김용옥의 태권도의 철학적 구성원리라는 논문에서
    인용한 겁니다. 무술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일독을 권합니다.

    2003-04-24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옛고구려벽화중에 발을 서로 차는 그림을 보고

    태권도라고 티뷔에 소개된적이있었는데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그렇게 인식이 되어서 태권도는 마치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것 처럼 알고있잖아요. 하지만...

    그 고구려벽화의 그림은 그 시대 단오날이면 씨름과 함께 전국적으로 인기를

    떨치던 택견(태껸인지 택견인지 본인은 잘 모르나 그렇게 들었음-_-;;)

    경기의 한장면이라고 들은적 있거든요. 그때는 설마 했지만

    오늘 이런글을 보고 태권도의 역사가 아주 짧은것을 알고

    좀 놀랬어염 택견이었구나 하면서...

    2003-02-13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너무 합니다.

    아무리 옳은 애기도 그러면 않된다.

    생각이 달라도 원로는 원로다.

    기본 예우는 하면서....비판을.

    2002-07-0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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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희대생

    항상 소위 수정주의자(양진방, 김용옥, 이경명...)들의 논의를 읽고 느낀것은 뭔가 증거없는 이야기들을 되게 객관적 인체하며 애기한다는 것이엇다.
    그것은 다른 태권도인들을 무식하게 봐서일가?
    송덕기하고 거의 같은 세대사람인 최헝희나 황기말을 못믿을 이유도 없고 태권도일부 발차기들의 유사성도 그냥은 잇다고 보기 어려운데 굿이 당시 수련체게나 행정조직을 기준으로만 가라데의 영향만을 절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명에욕 대문이라고 보이고 다른 무술단체 인간들의 매국노적 이기주의일 뿐이다.
    태권도인들이여..흔들리지말고 속지말자. 나는 서울대 역사학자인 신용하교수나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학생인 이창후등의 말,그리고 정근표(2002년 논문)등의 우리과 선배들의 논의를 믿지 이런 명예욕에 이끌린 시래기들의 말은 못믿는다.아냐? 개놈들아.

    2002-07-01 00:00:00 수정 삭제 신고

    0
  • 과연 무엇이 맞는가?

    태껸은 과연 무엇인가?
    실체가 있던 무술 이었나?
    아니면 그냥 싸움기술의 순수 한국말인가?
    여러 사료 기록들은 후자가 맞음을 보여 준다.
    모든 맨손무술은 그냥 수박 아니면 태껸 혹은 탁견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이 왜 공수도 시범 보고 "태껸 이구먼"하는 일갈을 했는지 알수 있다.
    그 공수도라는 것도 그렇다, 무엇이 공수도인가?
    결국 최홍희는 지가 배운 태껸기술을 섞어 만든 변형이라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무의미하다.
    왜? 무술은 기술을 기준으로 구별이 불가능하니까.
    이소룡이 이준구한테 배운 태권도를 하면 그냥 쿵후다.
    알리가 태권도 앞지르기하면 그냥 복싱이다.
    결국 개인적 기술차이만 있다.
    개인기술도 하루만에 바뀔수 있는데 뭐? 기술을 기준으로 가라데?태껸? 웃기는 소리다.
    좃대가리 꼴리는게 달를수 없듯이 두 주먹 양발로 사람 패는 기술이 어떻게 달라?
    지네만 가진 고유 기술? 개 좃까는 씹소리다.
    신화요,전설의 무협지에나 나올 좃같은 씹소리다.
    초기에 최홍희나 황기가 태껸의 역사와 줄 댈려고 태권도라고 했으면 끝난거야..이 호로 상놈의 새끼들아.
    거기 다가 사회에서 잘나가는 명사들 포함시킨, 즉 사회적 대표성 가진 명칭제정위원회에서 승인얻어 한국 전통무술로 사회적 합의까지 얻고 정부 승인까지 얻었으면 끝난거란 말야, 니엄마 보지빨 씹새끼들아...이런 역사 없으면 모르데 이런 역사가 있는데 개좃도 뭐라고 명칭제정위까지 사기라고? 증거도 없이 사기 치지마...이 씹할놈아 ...니는 배신자에다 원로 자격도 없는 개쌔끼야...폴란드까지 가서 그래 좃 뱅이치고 수십년간 니가 보급한게 가라데 베긴것이엇야? 뱡신 샤끼...

    2002-06-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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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학을 전공한 택견인

    무술 전문인은 아니지만 이런 논의의 흐름은 알고 있는 대학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또 동아리에서 택견을 오래 했엇고 지금은 지방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입니다.
    우연히 들어 왔다 보고 몇자 남김니다.

    우선 이경명 선생님의 글은 논리적이긴 하지만 사료비판으로선 지나치게 전거 즉,증거를 결여한,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에만 기댄 추측에 불과한것으로 지금 비판 중인 사료는 이미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확립된 사료로써 이를 무효화 하기엔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입니다.
    그리고 신성모라는 분도 전반적으로 객관적이지 못한 글을 어떤 목적의식에 경도되어 무비판적으로 편형적 시각으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역사학은 사실 솔직히 말해 국익에 기여하기위해 존재하는 학문입니다.
    말은 않해도 모든 학자들이 이 목적 하에 객관적인척 하면서 연구 하지요.
    그런데 객관적으로도 태권도에 도움이 될 방향의 서술이 가능한 사료마저 이처럼 처참히 난도질하는것은 한국인이 아닌 일본학자가 할짓 입니다.

    지금 역사학계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객관적인 진리라는 이름하에 일제시대를 발전적 시기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려하고 시도하여 큰 논란이 되고 있고 냉전시대에는 냉전의 원인과 관련된 수정주의와 6.25의 북침설등이 대학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적이 있지만 지금은 전통적 시각이 옳은 것으로 판가름났고 일본의 주장인 임나 일본부를 동조한 저같은 학자들은 아예 학계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도 못해 왔습니다.현재 분위기는 이런 학자들은 전체 공동체보다는 개인의 명성에 집착하여 돋보이려는 마음이 앞선 비학문적 그룹으로 치부되는 분위기입니다.

    역사적 진리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아서 그물을 놓는 장소와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것이 올라오고, 또한 학자 개인적 경험과 기억속에서 주위의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 바뀌는 속성을 가진 것입니다.
    일본서 구석기시대 유물을 조작한것...그는 최고의 학자로 명성을 가졋습니다.

    역사학으로 최고의 훈련을 받은 이들이 이럴진대...

    태권도를 매도하여 개인의 명성이나 자기 무술 집단의 주가가 더 올라 가는 것이 아니라 긍극엔 우리의 자랑거리 하나가 당신들의 알량한 그런 허욕으로 없어지게 될것입니다.

    2002-06-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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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민




    1] 남한의 태권도와 북한의 태권도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 - WTF) ; 남한의 국기

    - 세계태권도연맹의 태권도는 현재 우리나라에 본부가 있는 것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태권도이다. 한국의 초등학교 체육교육과정에 들어있을 뿐 아니라 한국 군대에서도 수련하고 있다.(교육과정에 충실한 학교를 나왔다면 5,6학년때 태권도를 배우게 되죠.) 스포츠적 성격이 강해 스포츠 태권도라고도 불린다.


    국제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kwondo Fed..- ITF) ; 북한의 국기

    - 국제태권도연맹은 최홍희의 케나다 망명으로 캐나다에 본부가 있는 것으로, 주로 공산권 국가에 많이 보급되었었으나 WTF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으로 인해 그 세력이 많이 줄었다. WTF태권도 보다 실전적인 룰로 겨루기를 하여 일본에서 열리는 이종격투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으며 실전성이나 무도성이 강해 격투 태권도라고도 불린다.




    [2] 태권도 관과 협회의 역사


    WTF태권도는 남한의 국기, ITF태권도는 북한의 국기...... 혹시 남북이 분단되면서 하나의 태권도가 나뉘어서 WTF와 ITF가 된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에 태권도가 보급된 것은 1980년이죠. 그전의 북한에는 태권도는 없었고 송도관 공수도, 레슬링, 권투 등을 혼합해서 만든 격술이 있었을 뿐입니다. 각설하고 WTF와 ITF 태권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태권도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반드시 필요합니다. 태권도 현대사를 간략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1. 관의 성립

    45년6월 청도관. 이원국. 당수도
    (당수도, 공수도 모두 가라데를 의미하며 이원국은 일본에서 송도 관 공수도-쇼토칸 카라테도오-를 배움)

    46. 연무관. 전장섭. 공수도
    (전장섭은 유도와 공수도를 배움)

    46 송무관. 노병직. 공수도
    (노병직과 이원국은 일본 중앙대에서 송도관 가라데를 배우고, 노병직은 송도관에서 송을 따와서 송무관으로 이원국은 도를 따와서 청도관으로 자신의 관 의 이름을 지었다고 함. 물론 가르치던 것은 송도관 가라데였음.)

    46. 창무관. 윤병인. 권법
    (중국무술과 수도관 공수도-슈토칸 카라테도오를 배웠음)

    47. 무덕관. 황기. 당수도
    (중국무술 태극권과 공수도를 배웠음)

    54. 오도관. 최홍희. 당수도
    (송도관 공수도를 배웠음. 29사단장으로 있을 때 그의 부하 남태희와 오도관을 만들었음. 최홍희도 송도관 공수도였고 남태희도 송도관 공수도를 배운 이원국 의 청도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청도관과 유사했으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여 형제관이라고도 하였음)

    이외에도 여러관들이 있지만 위의 6개의 관들이 주요 관들이며
    나머지 관들은 위 관들을 모태로 태어난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협회의 성립

    50. 대한공수도협회

    54. 최홍희가 태권도 명칭 만들어냄.

    55.4 최홍희가 이승만으로부터 태권도 인가를 받음.

    59.9 최홍희에 의해 대한태권도협회 창립.

    (이때 위의 6대 관장들이 모여 회의를 했으며 협회의 명칭을 황기 는 당수도를 고집했으며 노병직, 윤쾌병, 이종우 등은 공수도를 주장하였음. 그러나 1954년부터 태권도를 사용한 청도관과 오도관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여 최홍희가 작명한 태권도가 협회 명칭으로 결정되었음. 이때 최홍희는 더 이상 공수도니 당수도니 하는 왜색 명칭을 쓰지 말고 우리 고유의 명칭을 쓰자고 주장함.)

    61.9 태권도를 주장하는 관과 공수도를 주장하는 관들의 대립 끝에 둘을 합친 태수도로 결정하여 대한태수도협회로 바뀜

    65.8 최홍희가 대한태수도협회 3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65.1) 대한태권도협회로 바꿈

    65. 최홍희는 독자적으로 창헌류 틀을 제정.

    66. 최홍희 대한태권도협회장에서 불명예 퇴진.

    66.3 국제태권도연맹(International Taekwondo Federation-ITF) 창설
    69. 팔괘, 유단자 품새 제정

    71.1 김운용 대한태권도협회 7대회장으로 취임

    71.3.20 태권도 국기로 지정(박정희)

    72.1 박정희에 의해 정치적 생명을 잃고 다른 태권도 지도자들과의 불화로 인해 국내에서 입지를 잃고 ITF와 함께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 ITF는 태권도의 세계화의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대한태권도협회와는 업무한계를 놓고 오랫동안 마찰.

    73.5 세계태권도연맹(World Taekwondo Federation-WTF)를 창설

    ITF와 WTF는 태권도 양대기구로 현존하고 있으며, 우리가 접하는 것도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것도 WTF입니다.

    80년대에 ITF는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의 국기가 되었으니 남한의 국기 WTF와 함께 분단된 다른 조국의 국기가 되었습니다.


    (이상 다른 사이트에서 가져왓음을 밝힙니다.)





    2002-06-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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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민







    남북한 모두 국기로 삼고 있는 태권도는, 원래 오끼나와가 일본의

    침략을 받을때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을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오끼나와를 지배하던 일본은 모든 오끼나와 원주민의 저항을

    막기 위해 무기소지 금지령을 내리게 된다. 이에 항거를 위해서 맨손과

    맨발로 일본의 갑옷에 대항하기 위한 무술이 비밀리에 지도되었는데,

    이것이 오끼나와데이다. 나무판이나 기와 격파등을 많이하는 전통은

    이런 이유라고 할수 있겠다. 또한, 중국남부과 지역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많은 동작들이 현재의 중국 남부의 권법과 비슷하다.


    이오끼나와데가 일본에 수입되어서 가라데가 되었고 이 가라데를

    수련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서 70년대에 만들어진것이 태권도이다.

    널리 알려진 태극1장부터 8장은 명치유신이후 초중학교의 체육시간을

    위해 가라데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후나고시 기찐이 만든

    평안(平安) 형이다.


    현재의 일본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수련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태권도는 일본의 가라데나 중국의 남권등과는 판이한 방식으로

    발전하였고, 많은 연구로 어느정도 독자성을 갖춘 상태이다. 이에 관한

    출판된 책으로 많이 알려진 것은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김용옥,

    통나무,서울,1990 이다. 저자의 무술에 대한 이해부족과,

    결국은 태권도를 부정하지 못하지만, 태권도의 정통성을 부정하고는

    연구도 어려운 우리 실정에서 나온 책으로 중요하다고 할수 있다.

    실지로 내용은 태권도의 정통성을 부인하지만, 결론에

    갑자기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다.. 라고 하는 논문이 몇편 있다

    --출처 : 하이텔 무예사랑 --

    전 결코 태권도를 비방하거나 깍아내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본이 역사를 왜곡해 가르치듯 우리도 그와같은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저역시 짧은 기간이나마 태권도를 배웠었고 태권도를 자랑스러운
    국기로 생각합니다
    태권도는 레지스탕스의 정신을 가지고 있읍니다.
    가진자의 무술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자의 무술
    그것은 무기를 빼앗기고 주권을 빼앗긴 설움속에서
    이를 악물고 갈고 닦아진 무술이기 때문입니다

    오끼나와의 원주민이 그랬고 일제의 한반도 점령기에
    우리의 선배들이 일본에서 고학을 하며 무술을 익힐때의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하고 있읍니다. 이제는 유럽이나 구미의 태권도실력이
    본토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 태권도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리고
    일본 유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냉철한 눈으로 자신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수도란 빈손 즉 맨손으로 싸운다는 뜻이며
    가라데란 카라다라는 일본어가 몸을 뜻하듯 역시 맨몸으로 투쟁함을
    뜻하며 당수란 중국에서 건너 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모두 오끼나와데를 다르게 지칭하는겁니다.

    하지만 과거 중국의 무술가들은 함부로 외국에 기술을 전하지 않았음으
    로 기본적인 주먹쓰는법과 발차는 법만 오끼나와에 전했을 겁니다
    오끼나와 원주민들은 일본 본토 사무라이들의 억압에 항거하기위해
    밤마다 몰래 주먹과 발을 칼과 몽둥이처럼 갈고 닦았던 겁니다.

    태권도는 이땅에 뿌리를 내리면서 현란한 발차기 기술을 중심으로
    한 겨루기를 채택함으로써 가라데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발전하여 이제는 한국의 국기 세계적인 무술로 성장한 겁니다.

    그러나 원래 태권도의 기술은 발차기 뭇지않게 손기술역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만 경기태권도 점수제 위주의
    스포츠화로 발차기에 비해 등한시 되는 경향이 있읍니다

    적절한 방호구를 개발채택하여 (안면보호 헤드기어 개발,관절이 접히는
    글러브,사타구니 보호대,좀더 움직임이 편하고 뭄에 착달라붙는 몸통
    방호구,무릎및 팔꿈치 방호구,발등과 발의 공격부위를 쿠션으로 감싼
    경기용 태권도화) 정권,수도치기,팔꿈치치기,무릎치기,발차기의 하반신
    공격,손등공격,엉덩이 차기,쓰러졌을때 제빨리 일어나지 않으면 감점
    등의 경기규칙을 도입하여 좀더 실전에 가깝게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손기술과 발기술이 상하결합되어 적절히 조화된 형태의 무술수련이
    되도록 승화 발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002-06-22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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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섭다

    신씨 당신, 나도 당신 말투에 몹시 기분엿같아 막말을 하고 싶다만...똑같은 인간 되기 싫어 젊잖게 충고 합니다.
    그러지 마쇼..
    태권도계가 무슨 동네 체육관 규모요? 태껸기술을 맘대로 그냥 넣고 빼고 하게? 태껸기술의 흔적이 보이는건 무슨 경로 로건 접촉이 초기부터 있었다고 보야야 하지 않겠소?
    거 부산태권도협회에서 제명당하고 태권도역사 욕하며 인간문화재 정경화가 되레 사이비고 자기가 최고라고 태껸 협회까지 만들어 활동하는 쪽 그쪽 사람이라면 그 냥 그렇다고 치지만 태권도 하는 분이라면 당신 그 단어 선택 부터 고치고 좀 진지하게 태권계의 장래를 보면서 논하쇼..
    원로들 그런 정신 나간 소리하니 보기 좋앗소?
    태껸 문화재 정경화씨는 자기 책에서 태권도가 태껸의 후예라고 인정해 주는 데 그런 다른 단체나 몇몇 학벌좋은 학자들 말이라고 그냥 생각없이 막 따라하지 말아요..몇칠전 우리동네 애들이 태권도는 가라데 훙|ㅔ니까 않 배운다고 애들기리 그런다고 합디다.
    글고 학벌 좋은 사람들 자기 잘난척 하다가 다 조지는거 보고 싶고 그만좀 하쇼, 이 ㅅ씹할 개새끼들아..니엄마 보지다 개쌔끼들아..

    2002-06-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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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이 안나와

    2002-06-16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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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성민

    사실 뻔한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거가 없기에 말을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태권도를 정통무술이라 칭하지만
    근대에 일제점령기에 한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가라데 아이키도 유도 검도등 일본무술을 배워와
    이땅에 뿌리를 내리게 한것이 아닌가
    그 이전에는 어떤 문헌에도 그리도 그때 살았던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결코 들어본적도 본적도 없었던 걸로 안다
    근데 뭐 삼국시대 화랑에서 부터 전해내려왔느니(산천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했다는 구절은 있어도 태권도 익혔다는 말은 없다)
    경주의 사천왕상이 그 증거라는둥(인도의 사천왕상을 본뜬것으로 그것이
    태권도라고 말할수 없다) 중국의 무술가들이 자기 무술이 달마조사가
    가르쳤다는둥 송나라 악비장군의 비술이라는둥 하는 허풍과
    유사한 전통성만들기를 가라데인들이 해방후 만든것이다.
    무술의 이름에 道를 붙이는것은 일본무술의 근대체육화 과정의 산물인데
    이를 그대로 답습하여 태권도라고 만든것이다.
    더군다나 띠를 매고 그기에 색깔을 부여한것
    맨발무술이라는것 기술상에서도 명칭만 우리말로 바꾸었을뿐
    일본의 가라데(공수도 혹은 당수)와 똑같은것이다.
    다만 겨루기방식을 주먹공격을 제한하고 발차기를 권장하며
    택껸의 일부 발차기 기술을 채용하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고 태권도가 약하거난 우리무술이 아니라는것은 결코아니다.
    허나 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랬다고
    일부 무술인들의 사기성이 농후한 전통성운운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얻어온 역사적 사실들과 짜찝기 하고
    개똥철학으로 버무려 선전해대는 짓은 그만 두어야 한다
    왜 있는 그대로 말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일본에 배워왔고 대련규칙을 좀 수정하고 택껸의 발차기와 형식을
    몇가지 채용하여 태권도라고 만든 근대에 생성된 무술이다라고....





    2002-06-1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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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답

    2002년 경희대 석사 논문 "현대 태권도사의 TEXT적 접근"을 보면 시원하게 해결 됨니다.

    근데 박준모 당신 왠지 용어 선택이나 여러 문장 분위기의 편향성등이 수상하군...혹시 태껸 협회지 뭔지 인간문화재 제끼고 찐짜라고 막우기면서 태권도사 공격에 총력을 다하는 그 쪽 사람이나 정신나간 원로쪽 인간아뇨?

    2002-04-30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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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준모

    신동아 2002년 4월호 기사입니다.

    태권도는 가라데를 배운 분들의 한국판 가라데로서 택견의 역사를 훔친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동안의 태권도의 공로를 생각한다면 어느것이 우리 고유의 무슬인가를 따질 필요는 오늘날 없다고 봅니다.

    단지 지난 50년 세월을 가라데가 아닌 진정한 우리 무술의 발굴과 발전에 쏟아야 할 시간과 힘을 태권도 때문에 상실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물론 이 기사가 진실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제발 이 기사를 읽으시는 태권도인은 이기사가 허위임을 입증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 기사가 길지만 한 번 다 읽어보시고 귀찮으시면 중가니쯤을 보시면
    위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저도 태권도를 배운 사람이고 태권도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002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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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증언]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의 ‘태권도 과거’충격적 고백!

    시드니 올림픽 승부 개입했다
    최홍희와 김운용의 태권도 주도권 쟁탈전
    김운용에 태권도6단 준 내막
    가라테 본딴 초창기 태권도
    이승만·박정희의 태권도 휘호 원조싸움
    경기화로 국제스포츠 된 사연


    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2001년 11월 ‘신동아’는 ‘태권도 황제’ 김운용 회장의 퇴진과정을 심층취재했다. 지난해 태권도계는 2월 파행인사에 이어 4월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승부조작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 김회장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1년 내내 분규에 휩싸였다. 김회장을 지지하는 세력과 ‘범태권도 바로세우기 운동연합(운동연합)’측은 배수의 진을 치고 맞섰다. 오랜 힘겨루기 끝에 김회장의 일선 퇴진으로 파국은 막았지만, 불씨까지 완전히 꺼진 건 아니었다.

    한국 태권도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대한태권도협회(대태협)와 국기원, 그리고 세계연맹 등이다. 이 가운데 대태협은 얼마전 이윤수 의원과 구천서 전의원이 표대결을 벌여, 구 전의원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또한 세계연맹은 2001년 총회에서 김회장이 4년간의 임기를 보장받은 상태다. 문제는 국기원인데, 김회장은 지난해 ‘운동연합’ 회원들이 데모를 벌이던 도중 국기원장에서 물러났다.

    2001년 태권도 사태의 후유증은 컸다. 우선 김회장과 함께 한 시대를 이끌어온 엄운규 국기원 부원장이 운동연합의 퇴진 요구를 받아들였다. 또한 엄부원장의 오랜 측근이었으며, 국가대표선발전 당시 심판배정 등에 관여했던 임윤택 세계연맹 사무차장은 업무방해 및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됐다. 그런가 하면 김회장과 아들 정훈씨는 사법 당국의 내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종우(75) 국기원 부원장은 엄 전부원장과 함께 ‘김운용 신화’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김회장을 태권도계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며, 대태협 국기원 세계연맹의 요직을 거치면서 태권도 분파를 통합해 새롭게 형틀을 만들고 경기화를 추진했다. 엄부원장이 조직을 담당했다면, 이부원장은 김회장의 브레인이라는 것이 태권도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그는 김회장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3월5일 기자는 국기원으로 이부원장을 찾아갔다. 그와의 네번째 만남이다.








    “나는 더 이상 욕심 없다”
    ―태권도계가 1년째 파행을 겪고 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김운용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일부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소문에는 별소리가 다 나오지만, 내가 사람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건 곤란합니다. 나로서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니까 뭐라 말하기도 어렵고요. 여하튼 문제가 많은 사람(임윤택 세계연맹 사무차장)을 데려다놓은 것이 화근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조직이든 어려움에 처하면 원로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부원장께서는 태권도계가 내분을 겪는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태권도계를 이만큼 만들어놓은 사람은 김운용씨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추진력으로 오늘날 태권도가 이만큼 발전했다면, 설사 과오가 있더라도 업적을 인정해야 되지 않냐는 거죠. 그래서 데모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용서하는 기분으로 문제를 풀어라. 태권도계를 감시 감독하는 기구를 만들어서 김운용씨가 탈선하지 않도록 하자’고 제안했던 거죠. 그건 김운용씨 없는 한국 태권도는 아직 이르다고 보았기 때문이에요.”

    국기원 이사회는 최근 김회장의 복귀를 추진했다. 하지만 이것이 또 한번 분란을 초래했다. 2002년 1월 김회장의 재추대를 결정한 국기원 이사회를 향해 ‘운동연합’은 “이사들도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김운용 회장이 국기원장에서 물러날 때 이부원장이 배후에서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데모대가 김운용씨 집과 의원회관으로 몰려간다고 하니까 그건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김운용씨가 나름대로 태권도 발전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대외적인 망신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일단 사표를 받고 나중에 조용해지면 컴백시키고 싶었어요.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의원회관으로 찾아가서 ‘우선 조용하게 수습하자’고 하니까 그 양반이 사표를 써주더라고요.

    나는 사표를 학생대표한테만 보여주고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이 사람들이 데모대 앞에서 읽고 텔레비전에 비치고 그랬어요. 그래서 막 화를 내면서 ‘왜 나를 잔인한 사람으로 만드느냐’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부원장께서는 김운용 회장의 국기원장 복귀에 찬성하는 거죠.

    “당연하죠. 국기원과 세계연맹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어요. 김운용씨는 지난해 세계연맹 총회에서 4년 동안의 합법적 임기를 보장받았잖아요. 그러니까 국기원장을 맡는 게 좋다는 얘기인데 운동연합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들어요. 나는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더 이상 뭘 하고 싶은 욕심도 없어요. ‘운동연합’ 사람들이 진정으로 한국태권도를 위한다면, 김운용씨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김운용의 업적과 실수
    ―태권도계에서는 김운용 회장을 박정희 전대통령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이 컸던 만큼 과도 많았다는 지적인데, 부원장께서는 어떻게 보세요.

    “그 양반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한국 태권도가 세계화될 수 없었어요. 태권도인들이 어디 가서 돈 10원 구하기도 어렵던 시절에 윗사람의 힘을 빌려 이 만큼이나마 만들어놓았잖아요. 국기원 지을 때 태권도인이 모금한 게 얼마인지 압니까? 몇 백만원인가 그래요. 창피한 일이죠. 태권도인이 모두 나서서 그것밖에 구하지 못했다니까요. 하긴 나부터도 안 냈으니까. 돈 낼 생각은 안하고 김운용씨 얼굴만 쳐다보던 시절이었어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1960년대만 해도 태권도 사범들은 깡패 취급을 받았어요. 내가 명색이 지도관 관장을 지냈는데 42세가 돼서야 장가를 갔습니다. 주먹 쓰는 놈한테는 딸도 안 준다던 시절이에요. 그런 수준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태권도를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김운용씨 공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죠.

    김운용씨의 과는 간단해요. 그 사람이 지나치게 ‘나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자기가 열심히 뛴 건 사실이지만, 태권도인들이 도와주었으니까 가능했던 거잖아요. 그런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들어요. 태권도인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또 한가지 김운용씨는 떼거지로 달려드는 데 겁을 내는 사람입니다. 조직력이 강하다 싶으면 그쪽으로 기울어져요. 그러다가 그쪽 얘기만 듣고 문제가 많은 사람을 두둔하다가 대가를 톡톡히 치렀잖아요.”

    ―부원장께서는 ‘운동연합’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운동연합’이 태권도 발전을 생각하기보다 자기들 감정에 치우친 측면이 있어요. 내가 그 사람들을 잘 모르니까 뭐라고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소문은 많지만 남의 말만 듣고 떠들 수는 없잖아요. 한가지 얘기하고 싶은 건 자기들이 김운용을 먹여 살리고 김운용이가 자기네 돈을 집어삼킨 것처럼 말하는데 그건 말이 안돼요. 지금은 그런 걸 따져보았자 감정만 상할 뿐입니다. 이쯤에서 서로 잘못한 건 덮어두고, 잘한 것만 얘기하는 게 좋아요.”

    이부원장은 말을 아꼈다. 지난해 ‘신동아’ 인터뷰 때는 이따금씩 김회장을 날카롭게 공격했지만, 이번엔 철저히 김회장을 보호하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이것은 그가 최근 김회장의 국기원장 복귀를 추진하고 있는 점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적으로 김회장을 추종하는 세력과는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일종의 ‘비판적 지지론’인 셈이다.

    ―김운용 회장은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IOC위원으로 활발하게 스포츠 외교를 전개했습니다. 그렇다면 태권도계에서 추앙을 받아야 마땅한데 현실은 다른 것 같습니다.

    “생각하기 나름인데요. 우리가 그림 전체를 보고 얘기해야지 일부분만 보고 말하면 안돼요. 나도 그 양반한테 서운한 게 많지만 그건 개인적인 문제예요. 태권도 전체의 덩어리가 어떻게 굴러가느냐 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김회장의 가족이 태권도계에 개입했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래도록 집권하다보면 아무래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일개 군인도 장교가 되면 그 부인이 부대원들로부터 사모님 대접을 받잖아요. 하물며 대장이면 말할 것도 없죠. 군 전체를 통할하는 사람의 부인이니까. 요즘 뉴스에 보면 대통령 아들에 관한 게이트가 쉴새 없이 나오지 않습니까. 제가 구체적인 문제를 거론하는 건 적절치 않은 것 같고, 그냥 그 정도에서 판단해보세요.”

    ―지난 번에 인터넷 사업과 관련해서 개인적 불만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국기원과 세계연맹 사이트를 만들어서 태권도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내가 예산을 뽑아보니까 한 8500만원 들어가겠더라고요. 그런데 그 사업자는 그걸 다 설치해주고 3000만원을 더 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국기원과 세계연맹이 앉아서 1억1500만원을 버는 거잖아요. 그래서 담당자한테 얘기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답변이 없어요. 소문에는 나하고 누구하고 사이가 좋지 않아서 안된다는 거예요. 어찌나 기분이 나쁘던지 ‘이게 무슨 감정 가지고 할 일이야? 사적인 문제를 왜 끌어들여’ 하고 따졌지요.

    나중에 알고보니까 김운용씨 아들이 이미 계약을 끝냈다는 거야. 돈도 내놓았다가 찾아갔다는 소리까지 들리잖아. 그래서 ‘내가 명색이 국기원 부원장이고 김운용씨 참모인데 나를 속여? 이런 나쁜 놈의 새끼들’ 하고 한바탕 욕을 퍼부었지.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했으면 나도 이해했을 거야. 아들이든 누구든 사전에 계약했으면 도리가 없는 거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심판을 다루는 것도 기술
    ―지난해부터 김운용 회장의 행보를 보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오히려 긁어부스럼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재를 털어서 국기원을 지었다’는 발언이 대표적인 경우 아닌가요.

    “옛날에는 장관보다 청와대 경호실이 더 셌잖아요. 김운용씨가 경호실 출신이니까 웬만한 업자한테 부탁하면 알아서 다 지원했거든. 땅은 양택식 서울시장한테 얘기해서 기부체납 형식으로 구했고, 건축자재는 도처에서 공짜로 얻었어요. 내가 그때 김운용씨 밑에서 실무를 맡았기 때문에 내막을 잘 알아요. 김회장은 자기 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생각에서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건데, 매우 경솔한 행동이었죠. 설사 자기 공로가 있더라도 겸손하게 나왔으면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었는데, 그 양반은 그걸 못해. 꼬투리 잡힐 줄 뻔히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나도 솔직히 그게 불만이에요.”

    ―이번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보여준 김회장의 행동을 어떻게 보세요.

    “한번쯤 그 양반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겠죠. 솔트레이크시티올림픽 개최지 선정 때부터 여러가지 스캔들이 나왔잖아요. IOC위원장 경선과정에서 IOC측과 갈등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발언 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 정치적 제스처로 이해해야죠. 그 양반은 직선적인 사람이어서 감정을 숨기지 못해요.

    나는 하도 오랫동안 모셨기 때문에 그 사람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어요. 김운용씨는 승부욕과 추진력이 아주 강한 사람이에요. 한국선수단의 성적이 부진하면 가만히 있질 못해요. 국내에서 아들 문제로 시끄러운 데도 욕을 먹어가면서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을 칭찬했다면 나름대로 속사정이 있었을 거예요.”

    이부원장은 김회장의 남다른 승부욕을 강조하면서,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벌어졌던 일화를 털어놓았다. 이 내용을 곱씹어 보면, 한국이 얼마만큼 엘리트 체육에 중독돼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한국선수단의 메달 수가 적으니까 김운용씨가 심통이 나서 나를 쳐다보고 말도 안해요. 그때 한국이 다른 종목은 다 작살나고 마지막으로 태권도에 희망을 걸었거든요. 김운용씨 얘기가 ‘우리가 4체급에 출전해 금메달 3개를 땄지만, 나머지 4체급은 쿼터제한 때문에 아예 출전도 못했으니까 금메달 4개를 양보한 거나 다름없다’는 거예요. 그런 와중에 주최국 호주가 챙길 걸 다 챙기니까 김운용씨가 열통을 터뜨린 겁니다.

    내가 그때 세계연맹 부총재로 태권도 경기의 기술적인 관계를 다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경기를 앞두고 심판을 배정할 때 ‘이 사람은 된다 안된다’ 하는 것을 내가 다 결정하다시피 했어요. 심판들한테 노골적으로 한국을 봐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배 울리라고 등을 친 거죠. 눈치 빠른 놈은 금방 알아듣지만, 둔한 놈은 그런 걸 잘 몰라. 봐달라고 할 수는 없고 그냥 공정하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막상 한국이 지면 태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면 ‘왜 그 따위로 심판을 보느냐?’고 소리를 지르는 거죠.”

    ―한국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공정하게 평가받도록 힘을 썼다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그렇지. ‘공정하게 해라’ 이렇게 얘기하면 다 알고 눈치채거든. 이런 공작을 내가 책임지고 했잖아. 그런 게 없었으면 금메달 하나나 둘밖에 못 따요. 다른 나라가 아니고 한국이니까 그게 통한 거죠.”

    ―저는 한국선수가 뛴 결승전 세 게임을 모두 지켜보았는데, 한국선수가 내용적으로도 이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결승만 보면 안되죠. 전체적으로 잘 되려면 예선전부터 신경써야 해요. 그래서 그게 간단하지가 않은 겁니다. 소위 작전이라는 게 있어요. 강적은 미리 죽이는 거지. 우리가 죽이는 게 아니라 심판이 죽이는 거예요. 심판에게 ‘공정하게 하라’고 말하면 알아서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예선전부터 ‘가지치기’를 해야지 안하면 나중에 곤란해져요.”









    “페어플레이는 없습니다”
    이부원장의 입에서 ‘가지치기’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승부조작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라이벌이 될 만한 상대를 일찌감치 탈락시키는 편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선수에게 강한 A선수가 있다면, A를 예선에서 떨어뜨려 한국 선수의 우승을 돕는 것이다. 체육계에서는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당시 일부 투기종목에서 이러한 ‘가지치기’가 있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이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경우는 없었다.

    ―2001년 국가대표선발전과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때도 그게 문제가 됐잖아요. 당시엔 심판들이 특정학교 출신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설퍼서 그렇죠. 얕은 수를 쓰면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다 들통이 나잖아요.”

    ―한국이 태권도 강국의 위용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지치기’도 불가피하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무서운 사람이 심판으로 나가면 우리 마음대로 안돼요. 한국하고 결승에 붙은 선수를 그냥 죽이려고 드는 것도 곤란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어느 나라가 강하다는 걸 파악하고 시작해야죠. 심판을 배정하는 것도 기술이에요. 어느 나라가 나오는데, 어느 나라가 결승에 가면 안된다. 그러니까 누구 누구 이렇게 해서 죽이는 거죠.”

    ―태권도는 예절을 중시하는 스포츠라는 측면에서 볼 때, 그건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불공정 행위가 아닌가요.

    “심판이 장난치면 승부가 뒤바뀝니다. 한번 못 봤다 그러면 그만이고, 자꾸 감점을 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심판 한 명을 이거(손으로 목을 가로지르며) 시켰잖아요. 그 사람이 한국 여자선수에게 감점 줘서 패하게 만들었거든. 내가 심판들 모아놓고 ‘감점 절대 주지 마라. 주의를 줘라, 두 번 주의 주고 세 번째 가서 경고를 줘라’고 말했는데도 그가 감점을 준 거야. 그 경기 끝나고 ‘너 그렇게 하면 안돼. 너 감정 있어?’ 하고 소리치니까 벌써 초죽음이 되더라고요. 그러고 나니까 심판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가지치기’는 냉정하게 볼 때 승부조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공개되면 한국 망신이지만 그건 현실이에요. 예를 들어 한국과 독일이 제일 강할 경우 둘이 붙었는데 독일을 지게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이전에 독일이 결승에 올라와서 한국과 대결할 경우 불리하겠다는 감이 들면 미리 죽이는 거지.”

    ―그건 공정한 승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부원장님의 말대로라면 한국이 승부조작이라는 편법을 동원해 태권도 강국의 명성을 유지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걱정됩니다.

    “이건 국익과 관계되는 거예요. 민감한 사안입니다. 한국 태권도가 망가지면 난리가 나고 선수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요. 요즘 외국선수들 기술이 휙휙 올라가거든요. 한국이 태권도의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까 그런 일이 가능한 거예요. 쇼트트랙의 김동성도 다 그런 거죠. 페어플레이는 없어요.”

    ―올림픽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제대회에서 이런 불문율이 적용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죠. 주도권 잡은 나라가 언제든지 강국이 돼요.”

    스포츠에 강국의 논리가 작용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92바르셀로나올림픽 당시 일본 유도는 대진표가 불리하다며 재추첨을 실시한 일이 있다. 또한 88서울올림픽 때 한국의 어느 복싱선수는 불리한 경기를 펼치고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뿐이 아니다. 한국 레슬링에서는 유령선수가 대진표에 무더기로 등록되는가 하면, 종목을 가리지 않고 심판매수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구기종목에서도 경기장소 경기시간 대진표 심판배정 등에 강국의 이해관계가 반영되는 게 상식이다. 스포츠맨십은 스포츠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중요한 요인이지만, 경기 외적인 요인은 끊임없이 승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일본 유도도 텃세를 누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원장께서는 강자라면 그 정도의 특권을 누려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냥 누려도 된다는 게 아니고요. 문제는 민족혼을 살려야 한다는 거죠.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면 국민적 사기가 크게 올라가잖아요. 그런데 이런 얘기가 인터넷에 뜨면 이거….”

    ―부원장님이 생각하기에 우리 태권도가 만약 특권 없이 공정하게 대결하면 몇 체급이나 금메달을 딸 것 같습니까.

    “잘 봐서 반타작이고 그렇지 않으면 40% 정도. 열 체급 중 네 개는 욕심이고, 여섯 개는 분산될 겁니다. 그러니까 열 개 중에서 세 개쯤 딸 수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젠 기계로 판정해야 한다
    이부원장은 자신이 간접적으로 승부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국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지만, 공정한 행위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난해 태권도계가 파문에 휘말린 직접적인 도화선도 국가대표선발전에서의 편파판정 시비였다. 이부원장은 태권도의 애매한 판정기준을 보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대비책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태권도 판정기준을 보니까 ‘강하고 정확하게 가격할 때는 득점’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렇게 해놓으면 심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우리가 한 단계 뛰어넘어야 합니다. 내가 과학의 과자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전자호구(護具)를 개발했어요. 그걸 채택하면 판정시비는 대부분 사라질 텐데 그걸 안해요. 인간이 인간을 못믿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지금은 심판도 못 믿는다 그겁니다. 불행한 얘기지만 우리는 이 시점에서 기계에 의존해야 한다고 봐요. 전자채점기로 해서 때리는 대로 점수를 주는 거예요. 그냥 스쳤다고 점수가 올라가는 게 아니고 파워를 과학적으로 측정해서 처리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국내에서는 어느 정도 공정성을 회복할 수 있겠지만, 국제 무대에서는 한국이 불리할 수도 있겠네요. 복싱의 경우 컴퓨터 채점이 도입된 이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런 차원에 머무르면 태권도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사람이 하면 감정이 생기거든요. 한국을 잡으려고 이렇게 했다느니, 때린 것만 보고 맞는 건 보지 않는다느니…. 모든 사람이 그런 편견을 갖게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기계에 의존하면 차라리 마음이 편하지 않겠냐 이런 얘기죠.”

    ―승단심사에서도 불공정 시비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협회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도장은 물을 먹는다는 얘기가 파다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자꾸 의혹이 증폭된다고요. 그러니까 기계로 판정하자는 거죠. 기계가 결정하면 깨끗이 해결되잖아요. 불합격했다고 기계를 때려부술 수도 없을 테고.”

    ―지난 번에 승단심사와 심사비 문제 등을 언급하면서 ‘태권도인 전체가 범죄자’라고 말씀하셨는데….

    “나를 포함해 모두가 죄인이라는 얘기죠. ‘죄 없는 사람은 이 여자한테 돌을 던지라고 했더니 한 사람도 던지는 사람이 없더라’는 성경 말씀처럼 우리도 그런 심정으로 살아야죠.”









    권법 1단에서 태권도 9단으로
    이종우 부원장은 1928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이부원장의 부친은 경기도 이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왔는데, 천도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던 손병희 선생의 행랑채에 살았다고 한다. 1949년 이부원장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들어갔는데, 이듬해 6·25가 터지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무도계에 입문했다. 미술대를 지원한 것은 ‘전과’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다고 한다.

    ―부원장께서 무예를 처음 접한 건 언제입니까.

    “해방 직후죠. 사춘기의 꿈이라고 할까. 17세 무렵 막연하게 무림의 고수를 꿈꾸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소공동에 가면 18계를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하잖아. 그래서 거기를 찾아갔죠. 그곳이 바로 일제시대 유도 도장이었는데, 그때는 조선연무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유도부와 권법부를 만들었어요. 그때부터 권법부에서 가라테를 배운 거죠. 권법이 바로 일본 가라테거든요. 일본말로 부르면 국민감정도 있고 하니까 권법이라고 부른 겁니다.”

    ―‘장군의 아들’이나 ‘시라소니’ 같은 영화를 보면, 광복 직후의 주먹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도 가라테를 배웠나요.

    “내가 알기로 깡패 중에 가라테를 제대로 배운 놈은 없어요. 그냥 떼거지로 몰려다니면서 몽둥이로 때리니까 강해 보였던 거지, 진짜 실력으로 붙었으면 김두환이고 시라소니고 형편없었을 걸. 운동으로 성공하지 못한 ‘쪼다’들이 주먹계에 들어간 경우는 간혹 있었고.”

    ―당시 가라테는 당수(唐手)로 불렸죠.

    “당수(唐手)로 쓰는 사람도 있고 공수(空手)라고 쓰는 사람도 있었죠. 당수나 공수를 일본말로 옮기면 가라테가 되거든. 모두 같은 내용인데 도장별로 특색 있게 보이기 위해 권법이다 당수도다 공수도다 그렇게 불렀어요.”

    ―부원장께서는 조선연무관에서 가라테를 배우다가 지도관을 새로 여신 겁니까.

    “초창기 조선연무관은 유도가 중심이고 한쪽 구석에 권법부가 있었어요. 그런데 조선연무관이 6·25 때 부역을 했습니다. 조선연무관을 관장하던 이병석씨는 민족주의자였거든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곤란하니까 권법부 사람들이 다른 장소를 구해서 떨어져 나간 거죠. 을지로 3가에 있던 한국체육관이 지도관 자리였어요.”

    ―무술단수로 부원장님은 몇 단까지 땄습니까.

    “1년 넘어서 초단이 되고 2단이 되고 3단이 되고 그러면서 6·25가 났어요. 서울이 수복되고 4단 심사를 보는데 그때 내가 맹장수술을 받았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실기시험을 보았고, 나는 추천으로 4단을 땄죠. 나중에 협회를 만든 뒤에는 9단까지 올라갔고요. 처음엔 권법 1단이었는데, 나중엔 태권도 9단이 된 겁니다. 명칭이 그렇게 바뀌었으니까.”

    태권도계에서 무술단수를 얘기할 때 양념처럼 등장하는 게 김운용 회장의 실제 태권도 실력이다. 태권도인들은 김회장을 ‘명예 10단’이라고 부르는 데 여기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겨있다. 그가 태권도계에 기여한 부분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실제 태권도 실력에는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김회장이 태권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냥 무도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 양반이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혼자서 독습을 많이 했거든요.”

    ―김회장의 태권도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 부분에 대해 태권도인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경동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있던 윤병인 선생이 조선연무관에 나왔다가 나중에 종로 YMCA 체육부에 권법부를 만들었는데, 김운용씨가 거기서 운동을 했어요. 김운용씨가 경동고등학교를 나왔잖아요. 저도 정확한 단수는 잘 모릅니다. 김운용씨도 그 얘기를 한 적이 없고요.”

    ―태권도인들은 김회장에게 ‘명예 10단’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내가 지도관에 있을 때 그 양반에게 6단을 선물한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실력이 없어도 공로가 있으면 단을 주고 그랬어요. 단이라는 것이 꼭 실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연륜과 인격을 상징하던 시절이었죠.”

    ―저는 무술계를 잘 모르지만, 1단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지금은 그렇게 돼있지만 그때는 달랐어요. 인격적으로 훌륭하면 관장이 단증을 줄 수 있는 재량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기준으로 그걸 따지는 게 이상한 거예요. 일반인들은 기술이 있어야 단을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또 단증과 실력이 비례하는 것도 아니고요. 10년을 배우고도 실력이 형편없는 사람이 많거든요. 나는 유도 단증이 없지만, 유도 4단을 이긴 적도 있어요.”









    김운용에 태권도 6단 선물
    이부원장은 지난해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회장이 태권도계에 들어온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부원장은 당시 김회장의 정치력을 활용해 태권도계의 분파를 정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태권도인들은 그와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김운용 회장이 태권도계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박종규 경호실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죠. 박종규씨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옛날 복싱선수 김기수가 세계챔피언 될 때도 박종규 실장의 후원이 컸어요.”

    ―박실장이 국가대표 선수들한테 용돈도 많이 주었다면서요.

    “그 양반이 보이지 않게 우리나라 체육발전에 크게 기여했어요. 내가 알기로도 신세진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도 컸습니다. 내가 김운용씨에게 협회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니까 김운용씨 말이 ‘세 분한테 승낙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내 짐작에 세 분은 박종규 실장, 김종필 최고위원, 박정희 대통령이었던 것 같아요.”

    ―김회장이 박대통령과도 직접 통할 정도였나요.

    “그게 아니고 공직에 있으니까 허락을 받은 거겠죠. 박종규 경호실장은 직속상관이고, JP는 여러 차례 수행한 분이고, 대통령은 최고 의결권자이니까 그랬겠죠. 김운용씨가 그때 세 분을 직접 만났는지는 모르겠어요.”v ―국제태권도연맹(ITF) 최홍희 총재는 김운용 회장이 태권도계에 들어온 것 자체가 정치적 음모였다고 말합니다.

    “그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요. 답변할 가치도 없어요. 천하에 못된 자가 그 자에요. 모르는 사람은 최홍희를 대단하게 생각하지만, 그거 아주 쓸개 빠진 자입니다. 최홍희에 대해서는 내가 잘 알아요.”

    이부원장은 ‘최홍희’라는 이름이 나오자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광복 이후 강호의 고수들이 저마다 도장을 차리던 시절 두 사람은 돈독한 관계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이부원장은 최홍희 총재를 ‘사기꾼’ 수준으로 평가절하했다. 무슨 까닭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최홍희라는 인물이 걸어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홍희씨는 1918년 함경북도 화대에서 태어나 일본중앙대학과 서울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1961년 대한태수도협회(뒤에 대한태권도협회로 바뀜)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육군 6군단장을 지냈으며 가라테 유단자였던 그는 군대시절 자신만의 태권도 체계를 정리했다.









    최홍희와의 인연과 악연
    최씨는 1972년 캐나다로 망명했는데,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상당수 남측 태권도인들은 최씨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공금유용 혐의를 받고 귀국조치를 당했으며,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들어오자 위기를 느끼고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반면 최씨는 2001년 발간된 ‘태권도와 나’에서 “3선개헌에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과 부딪히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캐나다로 간 최씨는 박정희 정권을 강하게 비판했다. 1980년대엔 북한을 수시로 드나들며 군부대를 중심으로 태권도 보급에 앞장섰다. 이러한 최씨의 ‘친북행보’ 때문에 남한에서는 최근까지도 최홍희라는 이름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로 여겨졌다. 최씨는 자신이 1966년 창설한 국제태권도연맹 총재로도 활동했지만, 1973년 김운용씨가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출범시킨 이후 국제경쟁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남측의 태권도가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면서 태권도를 둘러싼 남북한의 주도권 싸움은 사실상 막을 내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4월11일 최홍희 총재가 중심이 됐던 ‘명칭제정위원회’에서 결정됐습니다. 세계적인 권위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태권도의 창시자는 최홍희씨로 나와있고요. 이건 인정하시죠.

    “최홍희가 독단적으로 ‘택견’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태권(跆拳)’으로 했던 거죠. 태권은 지축 태(跆)와 주먹 권(拳)을 합한 뜻입니다.”

    ―최홍희씨가 쓴 ‘태권도와 나’를 보니까 당시 여러 명이 모여서 협의를 통해 만장일치로 ‘태권도’라고 정한 걸로 나오던데요.

    “반대한 사람도 있었으니까 만장일치는 아니죠.”

    ―최홍희씨는 군복무 시절인 1949년부터 9년 동안 자신이 연구해서 현대적 태권도를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평가할 가치가 없어요. YMCA에 창무관을 만들고 경동고등학교에서 김운용씨에게 가라테를 가르친 분이 윤병인씨인데, 그 양반이 일본에서 최홍희를 만나서 같이 하자고 그랬는데 최홍희가 안했어요. 그 뒤 최홍희가 부대에서 여러가지를 조합해 무술을 만들었는데, 그게 모두 일본 거예요. 가라테를 기본으로 만든 거죠. 가라테를 기본으로 하고 명칭만 태권이라고 했으니까, 아예 처음부터 가라테라고 인정한 우리가 더 순수하죠. 최홍희가 나중에 이박사(이승만 대통령)한테 ‘태권’ 휘호를 신청했는데 이박사가 안 써주고 그랬어요.”

    ―최홍희씨 책에는 이대통령이 시호를 써준 것으로 나와 있던데….

    “거짓말이에요. 그건 최홍희가 쓴 겁니다. 글씨가 최홍희 글씨예요. 태권도라는 휘호는 나중에 김운용씨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받았어요. 만약 최홍희가 대통령한테 그때 휘호를 받았다면 근거가 있어야 될 것 아니에요. 우리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한테 휘호를 받았다고 하니까 자기도 지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겁니다. 당시에는 최홍희가 휘호를 받았다는 소리를 한번도 꺼낸 적이 없어요. 만일 받았다면 왜 그때 공개하지 않았겠어요?”

    ―태권도 이전에는 태수도(跆手道)로 불렸습니다. 태수도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겁니까.

    “내가 한남동 외무부장관 공관 위에 살 때 최홍희 집은 그 건너 이슬람교회 너머에 있었어요. 그래서 둘이 자주 만났죠. 5·16이 나고 얼마 안됐는데, 최홍희가 태권으로 쓰자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태권이 뭐냐? 가라테의 변형인데’라고 대꾸했어요. 그러다가 가라테(당수·공수) 하고 태권도를 합해서 태수도라는 말이 나왔죠. 우리끼리 펴면 수(手)고 쥐면 권(拳)이니까, 쥔 거나 편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도 했어요. 그때 최홍희가 6군단장이었는데 권총을 차고 막 출근하려다 말고 나하고 얘기한 기억이 나요.”

    ―부원장께서는 태수도를 태권도로 바꿀 때 왜 반대했습니까.

    “한번 정했으면 됐지 왜 자꾸 바꾸느냐고 따졌죠. 그랬더니 최홍희가 체육회에 압력을 넣고 해서 사태가 아주 복잡했어요. 그때는 군사혁명 직후니까 군인들이 요직에 많았거든요. 나는 그때 ‘왜 체육회가 명칭까지 바꾸려고 드느냐’면서 싸우기도 했는데, 결국 태수도 간판을 내리고 태권도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태권도와 나’에는 태권도 통합논의 과정에서 이부원장께서 ‘태권도협회 간판으로 갈 수는 없다’고 맞섰고, 태권도와 태수도의 표결에서 태권도 표가 더 나오자 두 다리를 뻗고 울면서 ‘죽어도 가라테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미친 놈이에요. 내가 그것 때문에 울고 그랬겠어요? 오히려 그 자식이 술만 먹으면 울면서 ‘나는 두 사람(이부원장과 엄운규 전부원장)밖에 없어. 나는 믿을 사람이 없어’ 그랬습니다.”









    남북 태권도 통합에 반대한다
    ‘태권도와 나’에는 이부원장에 대한 최홍희 총재의 불편한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 심지어 이런 표현까지 나온다.

    ‘이종우는 태권도 기술은 없고, 음모와 아첨의 명수이며,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접선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우이동 일류 요정에서 주흥이 어느 정도 오르자 김종필 곁에서 뻔질나게 귀엣말을 나누었다.’

    ―최총재가 이부원장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제일 강적이니까 그랬겠죠. 내가 그 자한테 국제태권도연맹까지 만들어주었는데, 어떻게 나를 그렇게 모략하는지…. 최홍희는 태권도를 개인 소유물처럼 여겼어요. 국제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었거든. 그래서 맨날 돈 받고 단증이나 만들어주는 수준에 그친 거예요. 그 바람에 처음에는 최홍희를 따르던 사람들도 나중에 다 떨어져 나갔잖아요.”

    ―최총재는 자신이 3선개헌을 반대하니까 박정희 대통령과 불편해졌고, 태권도계에서 조직적으로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거짓말이에요. 그 놈은 여기서 금방 이렇게 얘기했다가 ‘아까 얘기하고 다르잖아’ 그러면 ‘아까는 농담이고 이젠 진담’이라고 둘러대는 아주 소문난 놈이에요. 박정희 밑에서 말레이시아 대사까지 해먹다가 공금유용으로 귀국조치 당한 거잖아요. 그러다가 청와대 경호실 출신인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들어오니까 슬그머니 도망간 거고. 나는 그가 거짓말한 증거를 수도 없이 댈 수 있어요.”

    최홍희 총재가 북한 군부대를 중심으로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남북 태권도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 남한이 경기화와 건강증진에 역점을 두었다면, 북한은 실전용 무술로 발전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남북한의 장점을 조화시킬 경우 태권도의 경쟁력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최근 일부에서 제기된 남북한 태권도 통합론을 어떻게 보세요.

    “나는 그걸 반대하는 사람이에요. 이북은 이북대로 세계연맹의 회원국으로 들어오면 되는 겁니다. 최홍희가 국제연맹을 이끌고 있지만, 그건 사조직이나 다름없어요. 우리가 사조직과 타협해서야 되겠습니까?”

    ―남북한 태권도의 장점을 통합할 필요는 없다고 보세요? 북한 태권도는 특히 실전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우리가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기술적으로 인정할 부분은 있다고 봐요. 하지만 실전에 강하다는 건 붙어봐야 아는 거니까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기 힘듭니다. 현대 스포츠는 어찌 됐든 경기화(스포츠화) 수준에 따라 발전하는 겁니다. 과거에는 개인별로 운동하거나 국가별로 자기네 문화를 유지해도 됐지만, 이제는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경기화하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어요.”

    ―우리 태권도를 좀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북한 태권도의 기술적인 부분을 받아들일 수는 있다고 보십니까.

    “그냥 시범하는 것하고 실제로 겨루는 것은 달라요. 그래서 화면만 보고 북한 태권도의 기술수준을 평가하기가 힘든 거죠. 태권도에서는 어떤 사람이 발차기를 할 때 또는 주먹을 지를 때, 기술적인 문제보다도 눈의 발달이 중요합니다. 모든 신경계가 발달해야 되고, 감지기능이 빨라야 하거든요. 그런 것은 서로 겨뤄보기 전에는 아무도 몰라요.

    한국 태권도는 경기화하면서 기본이 변질됐어요. 그래서 기본만 놓고 따지면 북쪽이 더 낫다는 주장이 나오는 겁니다. 그쪽은 경기화하지 않아서 덜 변질됐으니까요. 쉽게 얘기해서 때릴 때 힘을 빼야 하는데 요즘 태권도 하는 아이들을 보면 힘이 많이 들어가요. 이북 아이들도 힘이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체중을 실어서 때리느냐 주먹으로만 때리느냐는 문제도 중요합니다. 때릴 때 체중을 실어야 강한 펀치가 나오거든요. 무게하고 속도가 있으면 힘이 생기는 게 물리의 법칙인데 선수들이 그걸 망각하고 있어요.

    또 우리 선수들은 뻗정다리 발차기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돼요. 무릎이 먼저 들려야 제대로 된 발차기가 나옵니다. 돌려차기를 할 때도 발만 도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돌아야 하는데 그걸 제대로 하는 선수는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스피드와 파워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요즘 선수들이 경기하는 걸 보면 고칠 게 수두룩한데 습관이 돼서 교정하기가 아주 힘들어요.”

    ―얼마 전 김운용 회장이 최홍희 총재를 초청하겠다고 밝혔잖아요.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막연하게 정치적인 제스처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 만나서 뭘 하겠습니까. 지금도 부자간에 권력다툼이나 하고 있잖아요.”

    광복 직후 한국 무술계엔 수많은 파벌이 존재했다. 그들이 저마다 도장을 열었는데, 상당수가 가라테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부원장은 이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했고, 엄운규 전부원장 고 이남석씨 등과 함께 실무작업을 맡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알고 있다.

    ―어떤 책을 보니까 광복이 되고 나서 40여 개 파벌이 난립했다고 나오던데, 이걸 하나로 묶어서 새롭게 태권도의 틀을 만든 거죠.

    “40여 개까지는 안됩니다. 지도관 청도관 무덕관 송무관 창무관 오도관…. 거기에서 파생된 유파까지 합치면 9개가 주축이죠. 우선 협회 기준으로 9개관으로 정리했는데 관 파벌 때문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통합관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렇게 하면 이종우한테 다 먹힌다’고 해서, 그냥 을지로 6가에 9개 관이 함께 쓰는 총본관 사무실을 얻었죠. 그때 9개 관이 모두 책상을 가지고 들어와서 복닥거렸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김운용씨하고도 의논해서 그때까지 각 관에서 심사를 보고 협회에 신청하던 단증 제도를 완전히 바꾸었어요. 총본관을 폐지하고 단증 발급을 협회로 넘겨버린 거죠. 그러고 나니까 관장들은 맥을 못 추게 됐고 협회가 태권도의 기준이 된 거예요. 아직까지도 파벌의 뿌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예전에 비하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태권도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전통무예에서 태권도의 원류를 찾는 부류고, 다른 하나는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신종 무예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태권도계는 오랫동안 전자를 대변해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통무예와 태권도를 연결시킬 만한 구체적인 물증이 빠져 있다. 반면 후자는 최근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가라테 유입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가라테의 잔재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기화된 태권도는 가라테와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품세 등에 아직까지 가라테적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먼저 과거의 관점으로 기술된 문헌을 살펴보자. 이종우 부원장이 지도위원으로 참여한 ‘국기 태권도 교본’(국기원, 2000)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시대적 환경이 무예를 중시한 관계로 무사단의 창설을 촉진하였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고구려의 ‘선배(帛衣仙人)’와 신라의 화랑이었으며, 이들의 심신단련과 무예수련의 방법으로 태권도가 행하여졌다고 추찰된다.’

    다음은 교육인적자원부 검정 중학교 체육1 교과서(교학사, 2001) 내용이다.

    ‘태권도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다. 삼국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조상의 슬기와 얼이 담긴 우리의 전통무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무인들의 필수 무예로 성행하였으며, 시대에 따라 명칭도 다양하게 변하면서 발전해왔다.’









    초창기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
    반면 국기원 기술심의회 김병운 의장과 경희대 최영렬 교수가 감수한 ‘신편 태권도 대백과’(2001)에는 태권도의 가라테 유입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

    ‘광복이 되면서 태권도는 급진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는다. 일제치하에서 태권도는 가라테의 영향을 받아 상당 부분 변질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선 공수도 당수도 수박도 등으로 혼용되던 명칭을 태권도로 통일하였다.’

    또한 한국체육대학 태권도학과 안용규 교수는 ‘태권도 역사·철학·정신’(21세기교육사, 2000)에서 가라테 유입설을 이렇게 정리했다.

    ‘태권도가 가라테 품세를 활용했거나 도장의 명칭을 당수 또는 공수로 썼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일부분이지만 수용할 것은 수용한 후 극복해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근대 이후에 태권도가 가라테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 태권도의 뿌리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습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좀 무리가 따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나도 그런 식으로 책을 쓴 사람이에요. 솔직히 우리가 내세울 게 없었잖아요.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도 서고 잘 먹혀들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겁니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죠. 일본 사람들이 중국 무술을 많이 개량해서 과학적으로 만들었어요. 한가지 문제가 뭐냐 하면 일본 사람들은 유연성보다 근육성에 바탕을 두고 운동을 만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몸의 움직임이 굳을 수밖에 없죠.

    우리는 이걸 가지고 스포츠로 경기화하기 위해서 겨루기를 시킨 겁니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겨루기를 안하고 혼자 하는 운동으로 놔두었고, 중국에서는 손 맞춰서 하는 유연한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볼 때 태권도는 중간 입장에서 어느 쪽도 아니에요. 쉽게 얘기하면 우지좌지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그거죠. 그런데 우리는 겨루기를 했기 때문에 급속도로 발전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중국과 일본이 역으로 우리 걸 배우게 된 겁니다. 자기들 무술은 보급이 잘 안되는 데다 젊은 아이들이 자기와의 싸움보다 치고 받는 걸 좋아하잖아요.”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나요.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아요.”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입니까.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달라요.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합니다. 택견도 현대에 와서 많이 변질됐어요. 태권도 하던 사람들이 택견을 배우니까 발차기가 태권도 스타일로 나오는 거죠.”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입니까.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나요.

    “그게 솔직한 대답입니다.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기자는 대학 시절 한 학기 동안 택견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강의를 맡았던 사람은 한국 택견의 마지막 명인으로 꼽히는 고 송덕기 옹에게 직접 사사한 도기현(현 택견계승회)씨였다. 잘 알려진 것처럼 택견은 한국 전통무예를 논할 때 1순위로 등장한다. 그래서 태권도의 역사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택견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도씨는 당시 “태권도에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가라테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부원장에게 택견 수련자들이 태권도에 대해 품고 있는 의문점을 조심스럽게 던져보았다.

    ―우리 민족의 무예는 원래 3박자로 움직이는데 비해 태권도는 2박자 운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라기 보다 일본 무예에 가깝다는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택견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시각이죠. 나는 박자를 잘 몰라요. 하지만 태권도와 택견의 발차기 자세가 어떻게 다르다는 건 잘 알아요. 택견의 발차기는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고 곧은 발로 올라가는데 요즘은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아요.”

    ―택견은 시작할 때 손을 앞쪽으로 모으고 정중하게 인사하잖아요. 반면 태권도는 손을 허리에 대고 기마자세를 취하고. 그게 일본적 특성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건 한국적 기준으로 일본적인 것을 구분하는 방법일 뿐이죠. 일본 가라테에도 다양한 유파가 있고, 그 중에는 자세가 다른 것도 많아요. 중요한 건 손발을 움직여서 얼마나 강한 타력을 만드느냐 하는 점입니다. 제가 볼 때 택견에는 그런 타력이 없고, 가라테에는 있다는 거예요. 중국 무술에도 그런 타력은 힘들어요.”

    ―태권도는 직선적인데 택견은 곡선적이므로 택견이 전통무예를 계승하고 있다는 주장은 어떻게 보세요.

    “글쎄요. 힘은 거짓말을 못해요. 직선적이라야 강한 힘이 나오는 겁니다. 내가 주먹으로 때리는 데도 여기서부터 둥글게 돌아나가는 것보다 곧장 나가야 파괴력이 있거든요. 어떤 경우든 곡선은 직선의 힘에 미치지 못합니다.”

    ―한국 전통무예 중에 주먹을, 그것도 정권을 지르는 무예가 있었느냐?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맞는 얘기라고 봐요.”

    ―옛날 ‘무예도통지보’ 같은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동작은 직선보다 곡선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건 간단한 신체운동이나 보건체조로 볼 수도 있고, 다른 형태로 해석할 수도 있겠죠. 물론 투기적인 요소가 어느 정도 가미됐겠지만, 과학적으로 발전한 가라테에 비하면 전혀 다르다고 봐요.”

    ―결국 부원장님께서는 기술적인 수준으로 평가할 때 한국무술이 일본무술보다 뒤떨어진다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은 태권도가 경기화해서 앞서 있지만, 태권도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일본이 훨씬 앞섰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이니까요. 당시 한국무술은 송덕기 옹이 하는 택견뿐이었고요. 하지만 택견은 보건체조 수준이었어요. 그러니까 동작이 부드럽게 나가고 건강관리에 효과가 있는 거죠. 태권도도 강력한 힘을 가지려면 부드럽게 나가야 해요. 모든 펀치가 힘을 가지려면 미는 것이 아니라 탁 끊어줘야 하거든요. 그렇게 하려면 부드러운 자세가 필요한 거고.”

    이부원장은 태권도의 경기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사람이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화해야만 상품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도장들이 품세 수련에 매달릴 때 한발 앞서 겨루기를 도입한 것이다. 태권도에서 겨루기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주먹보다 발차기가 효과적인데, 발차기는 전통적인 일본 가라테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용인대 태권도학과 양진방 교수는 “가라테는 손 동작과 품세를 강조하며 겨루기가 없다. 따라서 발차기 겨루기 경기화 등은 현대 태권도와 가라테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즉 겨루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설명이다.









    경기 태권도와 가라테의 차이
    ―태권도의 경기화를 추진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십시오.

    “간단해요. 혼자 하는 무술은 고달프거든. 상대가 있어야 서로 경쟁력이 생기고, 지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면 기술이 발전하는 겁니다. 다른 도장에서는 ‘사람 죽는다’고 반대할 때 우리(지도관)가 먼저 겨루기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일제시대 부민관이 있던 장소에서 시합을 열었는데, 우리쪽 아이들이 다 이기다시피 했어요. 다른 도장은 시합을 안 했으니까 질 수밖에 없었던 거죠. 처음엔 지도관의 겨루기를 두고 다른 도장에서 말들이 많았어요. 사람이 죽는다고 난리를 쳤지. 그때 내가 ‘죽긴 뭘 죽어, 밥을 죽여?’ 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가 다른 도장들도 노상 질 수는 없으니까 겨루기를 적극적으로 시키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우리 도장이 맥을 못 추는 신세가 됐어요.

    저는 처음부터 태권도의 가치를 높이려면 경기화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부상자가 나와서 욕도 많이 먹었지만, 그건 미미한 비율이었어요. 그보다는 싸우면서 선수들의 기술이 날로 발전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합니다. 스포츠 전체를 볼 때 수기(手技)는 권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족기(足技)로 발전해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경기에서는 주먹을 못쓰게 하고 경기 규칙도 발공격 중심으로 만들었고….

    이걸 가지고 일부에서는 ‘태권도가 발만 쓰는 건 아닌데 주먹 점수를 없애면 어떡하느냐’고 항의해서 지금은 주먹을 쓰되 얼굴을 때리면 반칙을 주도록 고친 겁니다. 어떤 운동이든 스포츠로 발전하려면 뭔가 독특한 것이 있어야 돼요. 말하자면 축구는 발로 차는 거고 농구는 손으로 던지는 게 특징이죠. 그래서 우리는 발 중심으로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만일 태권도를 서로 엉겨붙어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경기로 만들었다면 아주 지저분한 싸움이 됐을 거예요.”

    ―경기화해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싸움을 붙여보니까 재미있거든. 서로 지지 않으려고 경쟁을 하잖아. 솔직히 태권도를 배웠다는 놈들이 밖에서 매 맞고 들어오면 기분 나쁘잖아. 그래서 매맞지 말라고 시킨 건데, 아이들이 단순히 손발만 빨라지는 게 아니더란 말이에요. 제일 중요한 건 순간 포착력이 빨라진 점입니다. 결국 경기화가 선수들의 말초신경까지 발달시켜놓은 거죠. 저는 실전 경험이 많아서 그걸 잘 알아요.”

    ―안전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습니까.

    “초창기엔 검도 선수들의 투구를 헤드기어로 이용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때리는 사람은 손에서 피가 나고, 맞는 사람은 투구가 흔들려 머리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거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스펀지를 넣어서 헤드기어를 만들었죠.”

    ―저는 초등학교 때 1년쯤 태권도를 배웠는데, 당시 사범이 태권도는 자기수련이라고 자주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요즘 들어서 태권도가 경기화에 치중하다 보니까 자기수련 기능이 약화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건 옳은 얘기예요. 태권도는 스포츠로 인격을 기르는 운동이기 때문에 도(道)라는 말을 붙이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떤 게 더 흥미있고 즐길 수 있느냐를 무시할 수는 없어요. 혼자 하는 품세는 고독하고 힘들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겨루기를 시작한 거고. 겨루기를 하다보면, 이기면 이길수록 신이 나고, 지면 그날밤 잠을 설치면서 자기가 어떻게 맞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단 말이에요.”

    태권도는 유난히도 정치바람을 많이 탔다. 지금까지 한국 태권도계를 이끌어온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채명신 최홍희 김용채 김운용 최세창 이필곤…. 또한 역대 대통령들도 태권도에 상당한 관심을 쏟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날 태권도인들이 시범을 보인 것이나, 군사정권 시절 학교와 군대에 태권도가 집중적으로 보급된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태권도가 ‘국기’라는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광복 직후부터 맺어진 정치권과 무도계의 특수한 관계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

    ―태권도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김운용씨를 회장으로 모신 건 그 양반이 당시 태권도인들보다 좀 낫고, 자금 등 여러가지로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볼 때 태권도인 중에서는 마땅히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가 가진 역량이 뻔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용한다고 한 일인데, 오히려 이용당한 측면도 있어요. 지금 시점에서 득과 실을 따져보면 득을 많이 본 게 사실입니다.

    군사혁명 시절에는 채명신 장군을 이용하려고 했는데 돈 한푼 내지 않았고, 그 다음에는 김용채씨를 앉혔죠. 그 사람은 나름대로 국고지원도 받고 해서 기초를 잘 닦았어요. 공화당 청년분과위원장을 지냈기 때문에 요로에 많은 협조요청을 할 수 있었거든요. 그 뒤를 이어 김운용씨가 큰 일을 했고….”

    ―태권도계 인사들을 보면 과거 주먹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 태권도를 한 사람들이니까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문제는 그런 사람들로 해서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누르려는 저의가 숨어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요. 이건 말하기 곤란한 얘기인데, 상대방이 수 틀리게 나올 때를 대비해 제어장치로 갖다놓은 사람도 있고…. 결국 그 사람들은 죄가 없고, 우리 같은 사람들이 죄인이죠.”

    ―총회나 이사회 같은 데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사소한 문제로 눈에 거슬릴 때가 많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을 내세우면 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던 거죠.”

    ―태권도계의 해묵은 파벌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뜻인가요.

    “그렇죠.”

    ―얼마전 대한태권도협회는 우여곡절 끝에 두 정치인이 맞붙어서 구천서 전의원이 회장으로 당선됐습니다. 정치인이 회장을 맡는 건 문제가 없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일하기 나름이죠. 처음에는 누구나 잘 하겠다고 약속하지만, 들어와서는 공약을 지키지 않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태권도인들 스스로 태권도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태권도인들한테 몰매 맞아 죽을 얘기인지도 모르지만, 심사비를 규정대로 받는 도장이 아마 별로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반성할 때가 된 겁니다.”

    ―1980년에 태권도계의 국보위 정화자 명단을 이부원장께서 직접 작성하신 경위를 설명해 주세요.

    “국보위에서 정화자 명단을 내라고 통보가 왔잖아요. 그러니까 김운용씨가 고심하더라고요. 그래서 나하고 의논해서 명단을 작성하고, 원로들도 다 퇴진하기로 결정한 거죠. 무더기로 사람을 자르고 원로랍시고 눌러앉아 있으면 말이 안되니까 저도 일선에서 물러났던 거죠. 저는 그 뒤에 김운용씨가 이규호 장관한테 얘기해줘서 컴백했고요.”









    죄 없는 사람은 돌을 던져라
    한국태권도는 현재 수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권도가 건국 이래 최고 히트를 기록한 문화상품이라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태권도 인구는 무려 5000여 만명에 이른다. 태권도가 민간외교에 기여한 부분과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에 끼친 효과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태권도의 역사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는 좀더 미래지향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태권도는 앞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이자 스포츠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태권도의 미래를 어떻게 보세요.

    “현 상태로는 암담합니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쌀도 씻을 줄 모르고 조리질도 할 줄 모르면서 밥이 되다 질다 탔다며 불평하는 꼴이죠. 남이 한 걸 우습게 생각해선 안돼요. 나도 내가 제일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러면 안되는 겁니다.”

    ―태권도를 취재하면서 연구가 부족하다는 말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국기원에서 연구를 담당하는 부원장으로서 책임을 느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당연히 느껴야죠. 그런데 말이 그렇지 뭐 하나 되는 게 없어요. 내가 벌써부터 다 준비해두었어요. 전자호구도 만들고 기술연구도 해놓고…. 1년에 4500만원인가 들여서 했는데, 그뒤에 지원이 끊기고 채택도 안하고 그래서 다 집어치웠어요. 이 동네가 생각보다 아주 복잡해요.”

    ―자금지원이 안되는 건가요.

    “어느 정도 결과물이 나오면 그걸 받아들여서 일을 진행시켜야 하는데 그게 안돼요. 그러니까 ‘이까짓 거 해서 뭘 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저도 편히 지낼래요.”

    ―앞으로 한국이 태권도 종주국의 위상을 지켜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세요.

    “용서하고 단결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아까 얘기한 대로 ‘죄 없는 사람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거예요.”

    오전 9시10분부터 시작한 인터뷰가 5시간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이부원

    2002-04-29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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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사범

    교수님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역사적 확인은 정말로 감사합니다
    우둔한 저로서는 그저 책만 읽어볼뿐 모순을 찾지 못했는데
    교수님이 이렇게 글을 써 주시니 이해가 되는군요
    태권도의 실기뿐 아니라 이론과 역사적사실도 아주 중요 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교수님의 좋은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태권도 발전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시고 연구하시는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2002-04-07 00:00:00 수정 삭제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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